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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64집, 2015.6, 221-251 (31 pag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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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불교유신과 소태산의 불교혁신
-<요약문>
이 논문의 목적은 불교개혁운동과 관련하여 만해와 소태산 간의 철학적 관
계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소태산이 만해의 불교개혁운동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극복하려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철학적 관계는 아래의 여섯 가
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소태산은 만해의 불교개혁사상으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들을 차용하였
다. 특히 그의 조선불교혁신론은 만해의 작품, 조선불교유신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둘째, 소태산은 총론에서 만해의 불교 개혁 이념을 공유하였지만, 각론에서
는 그것을 극복하려 시도하였다.
셋째, 그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공유하였다.
넷째, 소태산이 만해의 불교혁신론 항목 중 몇몇을 삭제한 이유는 그가 이미
개혁안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소태산이 불교의 개혁론을 쓴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원불교 교
화 업무들을 통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패러다임을 불상으로부터
일원상(진리의 상징)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종교와 정치의 관계와 관련하여, 만해는 분리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
지만, 소태산은 협력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 이 논문은 2014학년도 원광대학교 교비지원에 의하여 수행됨.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한국예다학연구소(sichung@wku.ac.kr)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4 : 2015. 연구논문 06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22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4집 연구논문
주제어 : 원불교, 소태산, 만해, 조선불교유신론, 조선불교혁신론, 불교개혁
목 차
Ⅰ. 이끄는 말
Ⅱ. 만해의 불교유신사상
1. 만해 불교개혁 정신의 기반
2. 조선불교유신론의 성격
3. 불교대전의 불교개혁사상
Ⅲ. 소태산의 불교혁신사상과 만해
1. 소태산의 불교혁신방향
2. 만해와 소태산 불교개혁사상의 대비
Ⅳ. 맺는말
Ⅰ. 이끄는 말
1923년(원기8)은 백학명(白鶴鳴, 1867∼1929)이나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 두 사람 모두에게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은 학
명과 소태산이 동시에 봉래산을 벗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티브
를 제공한 것이 만해일 것이라는 추정이 선행연구에서 제기된 바 있다.1)
학명은 1914년(원기 전2) 중국과 일본을 순방하고 돌아온 후, 1915년(원기 전
1)부터 월명암의 조실로 추대되어 선원을 개설하고 후학을 제접하기 시작한
다.2) 그리고 월명선원 문설주에 ‘도를 얻은 자는 들어오지 말고 도를 얻지 못한
자는 들어오라(得度者勿入 不得度者入)’라고 써 붙이고 10년 기한으로 산문 밖
을 밟지 않기로 맹세했었다고 한다.3) 그랬던 학명이 약속기간 1년을 남기고 월
1) 정순일, 「백학명과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62집, 2014,
10쪽. 본 논문은 그 후속논문의 성격을 지닌다.
2) 朝鮮佛敎界第1號, 1916,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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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에서 전격적으로 하산을 결행한 이유는 만해로 인해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50세의 만해는 같은 해인 1923년(원기8)에 월명암에 내방한다. 학명은 만해
를 월명암 근처에 있는 양진암에 머물게 하였다. 3일간 머문 것으로 알려졌는
데,4) 만해가 떠나면서 학명에게 준 두 수의 시가 만남의 목적을 짐작케 한다.5)
만해가 다녀 간 후 학명은 이틀 밤낮으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장사로 내려갔다
고 한다.6) 만해와의 만남은 그가 두문불출 10년의 서약을 깰 만큼 파괴력이 큰
사건이었다. 이후 학명은 내장사 중창불사를 일으키고 선농일치를 실천하는 일
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7) 아마도 학명은 만해가 시 속에서 언급한 것처럼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심경으로 불교개혁에 앞장서기로 한 것으로 보인
다.8) 그러면 소태산은 그 와중에서 어떤 영향을 입었을까? 학명과 소태산은 매
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 필지의 사실이므로, 소태산은 그 과정에서 평소 지니
고 있던 불교개혁이라는 뜻을 세상에 펴고자 하는 생각이 굳어지는 특별한 계기
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9)
그렇다면 만해와 소태산은 어떤 사상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을까? 어떤 식으
로든 소태산이 만해의 불교개혁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입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
다. 본 연구의 주된 목표는 그 사상적 연계관계를 밝히는 데에 있다. 그러한 작업
을 통하여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이 생길 수도 있
으며, 그 관계를 통하여 원불교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가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된다. 또한 한국불교의 근대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개혁불교사상의 축을 이루는
두 사람의 입장을 정리한다면 한국의 사상사적 흐름 위에서 근대불교의 새로운
성격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3) 같은 곳.
4) 김광식,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 불교평론제25호, 2005.
5) 정순일, 앞의 논문 참조.
6) 이 시기는 동년 하반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 실제로 학명의 불교개혁운동이었던 선농일치운동을 실시한 기간은 1923년부터 입적 때
인 1929년까지 7년간 지속된 것으로 평가된다. 김광식, 위의 논문.
8) 김광식, 위의 논문, 219∼220쪽.
9) 어쩌면 만해와 학명이 만나는 자리에 소태산도 동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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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만해의 불교유신사상
1. 만해 불교개혁 정신의 기반
만해(萬海 韓龍雲, 1879∼1943)는 1905년에 입산⋅출가하였다. 그리고 백
담사에서 불교의 경전을 수학하고, 건봉사에서 참선을 통하여 불교사상을 익혔
다. 이후 세계 일주를 계획하고 시베리아 여행(1906)을 하였고, 명진학교에서 신
학문을 접하였으며(1906), 양계초의 음빙실문고를 탐독하고 일본탐방(1908)
을 단행하였다. 이어 불교개혁의 지름길로 구상한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는 건백
서를 구한국 정부 통감부에 제출한다.(1910, 5월, 9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의 불교개혁에 관한 열정은 구체화되어
조선불교유신론의 집필(1910년 7∼8월)과 간행(1913년 5월)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조선불교유신론의 구체화작업으로 불교대전을 1914년 4월에 출판
한다. 그로부터 그의 일생은 독립운동과 불교개혁운동, 그리고 시인과 소설가로
서의 삶으로 전개하는데 그것은 모두가 그의 대승적 보살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
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정신에 입각한 삶을 문학에 대입하면 많은 문학작품이 나
오고, 그 삶의 정신을 독립운동에 대입하면 조국의 독립운동으로 전개하며, 그
정신을 불교 내부에 조명하면 불교개혁운동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➀ <禪友에게>
천하의 선지식아
너의 家風 高峻한다.
바위 밑에 喝 一喝과
구름 새의 痛奉이라
묻노라, 苦海衆生
누가 濟空하리요.10)
➁ “일체 중생이 愚癡로부터 애착을 생하는 고로 병이 생기느니 일체 중생이
병이 생기면 보살도 또한 병이 생기는지라. 보살은 생사를 떠났으니 생사를 떠나
10) 한용운, 한용운전집제1권, 서울: 신구문화사, 1973,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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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병도 없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생사고락을 중생으로 더불어 같이하는 까
닭이며, 법의 體性으로 보면 중생과 보살이 차이가 없는 고로 중생이 병들면 보살
도 또한 병들고, 중생이 병이 나으면 보살도 또한 낫나니라.11)
이상의 두 작품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정신은 대승보살정신이다. ➀의
경우는 당시의 한국불교의 분위기에 대한 경계의 내용으로 분석된다. 당시의 선
지식이라 하면 산중에서 고요히 앉아 선의 경지를 논하며 사는데 그 선기(禪機)
를 대표하는 것이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봉(棒)이다. 만해는 임제의 할을 바위
밑에서 지르는 소리로, 덕산의 봉을 구름 위에서 치는 몽둥이로 비유함으로써
중생제도와 전혀 관계없이 스스로의 선적 경지만을 즐기는 당시 선객들의 풍토
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보살의 정화를 육바라밀로 꼽을 수 있다면 그 육바라밀의 첫 번째가 보시
바라밀이다. 보시는 뒤의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다섯 가지 바라밀
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사실상 뒤의 5바라밀은 대승 이전의 불교에 이미 존재하
는 덕목들이었다. 거기에 6바라밀의 대승정신이 된 것은 맨 앞에 보시바라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타적 보살은 바로 보시의 정신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며, 만
해는 바로 이러한 이타적 대승행을 하지 않는 선수행은 의미가 적은 것으로 파악
하고 있는 것이다.
➁의 경우도 비슷한 대승보살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보살의 병이 중
생의 병으로 인하여 생긴다는 내용을 말한 것으로, 대승정신의 정화로 통하는
유마경의 내용임에 틀림없다. 만해는 유마경의 정신을 법의 체성에 둠으로
써 중생과 보살의 일체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정신은 보살과 중생
을 동체(同體)로 알고 대비(大悲) 정신을 구현하는 데에 있다. 만해는 이와 같이
보살의 본분을 말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당시의 불교계가 지니고 있는 소승적 은
둔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불교개혁정신은 이와 같은 시대인
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11) 위의 책, 제3권,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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