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JVbIIaFZZE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비유에서는 큰 아들을 주목합니다.
큰 아들이 왜 분노할까요?
분노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요?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가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보며 분노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에게 이 비유를 건냅니다.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큰 아들과 같다고 지적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과 세리와는 다르다고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으며, 명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자기는 저들보다 '의롭다'는 것입니다.
자기'의'가 쌓인 이들은 그 잣대로 다른 사람을 봅니다.
사실 그들 모두 '은혜'로 사는 자들인데 말이죠.
은혜가 아닌 자기 '의'로 채워진 인생은 자기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를 보면 무시하고,
그런 이들이 자기와 같은(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 같으면 분노합니다.
그러한 대우는 자기와 같은 노력과 능력을 갖춘 자가 받아야 한다는 '의'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기준은 결국 하나님을 판단하는 데까지 갑니다.
큰 아들은 너무 당당하게 아버지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은혜를 받고 살아왔음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를 '당신'이라고 부르며 분노를 표합니다.
마치 나쁜 고용주에게 항의하는 고용인 관계 같습니다.
이런 아들인데, 아버지는 그를 부릅니다.
"아들아..."
여전히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입니다.
작은 아들을 조건없이 받아들였듯이 큰 아들을 조건없이 사랑합니다.
아버지로서 당신의 '의'를 한 줌도 내어보이지 않고 그저 사랑합니다.
지금 큰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사랑'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지금 그 자리에 있으며, 여전히 은혜로 사는 자임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진정 아들로 살 것입니다.
또한 자기 '의'를 내려놓고 은혜 가운데 거할 때, 돌아온 자기 동생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하며,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많은 정책들,
반값 아파트 정책,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 기본 소득 정책 등...
능력주의 기준으로 보자면 있어서는 안되는 정책이겠지만,
은혜의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좀더 평평하게 하는 일이고,
내가 받은 은혜가 내게만 머물지 않게 하는 제도이며,
내가 겪었던 어려움과 쓸데없이 과도한 경쟁과 노력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까요.
큰 아들의 시선을 거두고 아버지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볼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