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급 세단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다 해도
베르나의 존재감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내 옆에서 나란히 노년기를 맞는 손때 묻은 물건이
하나쯤 가까이 있는 것도 축복이라면 축복
“끼.이.이.이익!”
폭스바겐 하면, 무조건 딱정벌레 모양의 비틀을 떠올리던 시절.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시간조차 없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적한 1차로를 달리던 아주 긴 20톤짜리 대형 컨테이너 트럭이 갑자기 우회전을 할 때, 2차로에서 서행하던 폭스바겐 비틀은 그 트럭의 몸체를 향해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트럭의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낀 비틀은 그 트럭이 90도 각도로 우회전하는 힘과 속력에 밀려서 인도로 던져졌다. 가해 운전자는 영국계 캐나다 젊은이. 무면허였다.
내가 눈을 뜬 곳은 병실의 침상 위. 기절했던 모양이다. 액땜이라 하기에는 엄청나게 큰 대형 사고였지만, 나는 멀쩡했다.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비틀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던 도로 주행 강사가 말했다.
“베르나르도야! 그때 왜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니?”
“선생님께서는 왜 밟지 않으셨어요?”
주행 연습용 차량에는 조수석에도 브레이크 페달이 있다. 주행을 가르치는 강사조차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교통사고였다.
그렇게 호된 신고식을 치른 지 50년. 캐나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 그리고 한국에서 운전을 해오고 있다. 다행히 무탈하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운전을 해보니, 한국의 운전문화가 가장 험악하지 싶다. 주행 차로인 1차로에서 굼벵이처럼 운전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거니와, 고의성이 다분한 끼어들기 운전이 주행 흐름을 망치는 경우도 적잖기에 하는 말이다.
50년 운전 역사 중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승용차는 ‘베르나’라는 수동식 기어가 장착된 소형차이다. 에어백이 없고, 연식이 1998년인 이 소형차는 2002년에 내게로 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에서 경기도 산골을 오가는 내가 보기 딱했던지, 어떤 신자가 비교적 수리가 잘 되므로 필요하면 쓰라고 빌려주었다. 엔진이 아주 튼튼한 모델인지라, 23년이 지났고 23만 킬로미터를 달렸음에도 고속도로 주행까지 거뜬하게 소화한다. 시속 160킬로미터도 무난하게 밟을 수 있다. 하지만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 자리한 단골 정비소에서는 120킬로미터를 초과하지 말라고 했다.
“신부님, 이 차는 외제인가요?”
한번은 개신교 신자인 나이 지긋한 자매님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런 농담을 한 것은 그분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차량인 데다 오래된 구식 디자인이라서 그렇다.
“신부님, 이제는 폐차하시는 게 더 나아요.”
2년 전쯤 단골 정비소 사장의 진지한 조언이었다. 이제부터는 유지 비용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차는 멀쩡했다. 15~20킬로미터 이상의 연비로 견고하게 굴러갈 줄 아는 자동차라는 매력까지 폐기하고 싶지 않았다. 원주시 문막의 폐차장에 가면 필요한 부품을 구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부품을 구했던 적도 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해 가업을 잇는 정비소 사장의 아들도 베르나 사용을 권장했다.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면서 어느덧 식구가 되어버린 처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목숨을 건진 베르나는 지금도 여주 산골에서 굴러다닌다. 반드시 운동해야 하는 ‘노구’인 까닭에 매일 꾸준히 조금씩 바퀴가 돌아가게 한다.
나도 매일 노동을 한다. 자동차가 부속을 교체하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처럼, 사람도 인공관절을 넣거나 장기나 세포를 이식하여 장수할 수 있겠지만, 노화기의 신체는 경직되기 쉽고, 부러지면 젊은 사람처럼 회복되지는 못한다. 더구나 첨단 의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돌발 상황이 얼마든지 있다. 돌발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거니와 대비할 수도 없다. 다만 운동과 노동으로 근력을 키우고 유연성을 키운다면, 돌발 상황에서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앞으로 베르나가 얼마나 더 우리 공동체에서 우리와 함께 굴러다닐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구약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최고급 세단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다 해도 베르나의 존재감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내 옆에서 나란히 노년기를 맞는 손때 묻은 물건이 하나쯤 가까이 있는 것도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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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www.bos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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