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아직까지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잃어본 그 슬픔을 공감하기는 아직 어렵고 힘들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잘 와닿지 않는다.
“태의 열매”에서는 아들, 주인공 본인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서, 아버지를 차차 이해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그동안 그들이 지낸 삶을 되짚어 본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왜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본인이 대성통곡을 할 때 가만히,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느냐고 주인공에게 물어본다.
아버지의 엄마, 즉 주인공의 친할머니가 죽었다. 할머니는 크리스챤이었고, 한 대형교회의 권사였기에 장례식장에 목사가 찾아왔다. 목사는 할머니의 유골함을 들고 그동안 고인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해 보라 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아버지는 유골함을 부여잡고 엉엉 울며 그야 말로 대성통곡을 해댔다.
주인공은 그때 어렸다면 어리기도 했고, 그냥 좋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고. 나는 이 느낌과 감정이 뭔지 알 것 같다. 내가 기억나는 내 주변 사람의 장례식은 두 개 이다. 하나는 몇 번 뵌 적이 있던 아빠의 할머니의 장례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같이 그래도 살을 부대끼고 살았던 엄마의 할머니의 장례식이다.
누군가가 생을 마감했다는 건 기억해야 할 만한 일이다. 누군가의 부모였기에 기억할 만 하고 각 사람의 삶은 그 삶 자체로 소중하기에 기억할 만 하다. 또 나도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기억할 만 하다. 특히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누군가를 잃게 된다면, 그 슬픔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장례식에 참여했을 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어른들은 슬퍼서 우는 거고, 나는 잘 몰라서 멀뚱멀뚱 있다가 그 멀뚱멀뚱이 싫어서 문제집을 풀었다. 장례식은 뭔가 슬픔을 강요하는 느낌이라 그 자리에 있는 게 거북했다. 어떻게든 고인을 추억해야 해서 어려웠다.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그 사람을 잃은 후에도 그 사람을 게속해서 추억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추억하는 것보다는 가끔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사람을 계속 추억한다면 계속 슬픔에 파묻혀서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나도 내가 죽으면 누군가 나를 가끔 추억해 줬으면 좋겠다.
임국영의 소설집 <헤드라이너>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