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아픈 용서에 대하여 / 용서에 관한 세 가지 말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고
1.
“어쩌케 이렇게 아름답게 말을 한대요?”
“말로 치자면, 공자보다 장자가 그 위고, 부처는 그보다 더 위다 이놈아. 아니지 또 있다. 누가 내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 무슨 말인지 아느냐?”
“그것이 무슨 말이다요?”
“용서하라는 말 아니냐.”
“어매 겁나게 훌륭하네요. 대체 누가 한 말입니까?”
“예수께서 한 말인데, 용서를 이렇게 비유한 사람은 예수 이전에 없었다.”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대역죄로 몰려 검고 어둡고 무서운 흑산도에 유배 온 정약전과 그곳에서 만난 창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자산어보」의 한 대목이다. 용서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용서를 저토록 아름답게 비유한 것을 두고 약전은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며 미소띤 얼굴로 뭔가를 회상하고, 제자는 귀를 씻으며 천주쟁이의 말이라며 웃는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좀 더 새로운 생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불온한 자로 죽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 시대에, 다름은 관용과 조화로 나아가지 못하고, 배제와 배척의 이유가 되었던 불길한 시대의 단면을 본다.
나야 목사라서 용서를 저토록 위대하고도 아름답게 말할 수 있음에 푹 젖어 들지만, 창대처럼 귀를 씻고 싶기도 하다. 아니, 또 다른 영화 속 주인공 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기도 하다. 나더러 용서하라고 하시는 하나님, 그 아름답지만 죽기보다 싫은 일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름다울까?
2.
내게 이청준은 겁나게 훌륭한 작가다. 모르는 이가 드물다. 소설로 말하면, 「당신들의 대한민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있고, 영화화된 소설만 해도 꽤나 많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와 “서편제”,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로 재탄생시킨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있다.
내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대학 선배의 조언이었다. 80년대는 사회과학의 시대이었기에 철학과 사회과학 공부에 몰두하면서도 왜 그런지 문학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해서, 국문과 다니는 교회 형에게 소설가 한 명과 시인 한 명을 추천해 달라 부탁했다. 시인은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의 정호승이었고, 소설은 이청준이었다.
내게 이청준은 철학자이었다.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 삶과 인간에 대해서 여느 철학자 이상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지금 내가 철학책을 읽는 것인지, 소설을 읽는 것인지 이따금 헷갈리곤 했다. 나의 성향을 잘 아는 형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벌레 이야기」이었다. 신과 용서에 관해서, 반박 불가의 논리와 서사로 밀어붙이는 그 앞에서 나는 벌레 한 마리로 위축되었다. 대놓고 저항하지 못해도 마음 한 켠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가 이런 것은 아닌데, 이건 아닌데, 라며 적합한 언어와 논리를 장만하지 못한 채 께름칙하게 마음에 묻어두기만 했다. 신이 인간을, 용서가 인간을 외려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신앙의 이면을 여지없이 까발린 이 책은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귀를 씻고 싶을 만큼.
3.
영화 「밀양」이 워낙 알려진 터라, 둘을 비교하면서 줄거리를 소개해 볼까 한다. 영화와 달리 원작은 남편이라는 제삼자의 시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아내가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구원의 희망을 조심스레 말하는 이창동과 달리 이청준은 용서할 최후의 권리를 빼앗긴 인간의 도저한 절망을 죽음으로 신에게 항변한다.
마흔에 낳은 아들, 알암이가 숫기도 없고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웠던 약사 부부는 주산 학원을 너무 좋아해서 안심하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때부터 엄마는 실성한 듯 백방으로 찾아 나선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전부터 전도하려던 이웃집 김집사가 등장한다. 안 그래도 교회는 물론이고 절에도 찾아가 거액의 연보를 바치며 아들을 무사 귀환을 기도하던 터라, 적극적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근처 재개발 지역의 건물을 허무는 중에 시신이 발견된다. 살인범은 주산학원 원장이었다. 이후 아내는 우리에 갇힌 맹수마냥 복수심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도를 받고 다시 교회를 다닌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과 은혜에 감사합니다”를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도로 발전한다.
은혜에 한껏 취한 그녀는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그리고 찾아가서 복음과 용서를 전하기로 한 것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남편과 김집사도 주저했음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녀는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뒤로 식음을 전폐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사형수가 남긴 마지막 말을 듣고 결국 생명을 마감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나는 주님에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그녀의 절규 앞에 과연 용서는 아름다운 것인가? 피해자에게 용서는 가슴 저미는 아픔이건만, 사람이 벌레로 만드는, 아니 벌레만도 못한 걸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4.
용서는 왜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걸까?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용서에 관한 세 가지 말을 하고 싶다. 첫째는 김집사다. 용서를 강요하는 대목에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죄인을 아주 용서하도록 하세요. 그게 틀림없이 주님의 뜻이며 기쁨이실 거예요.” 화자에 의하면, “용서를 간곡히 당부했다. 그것도 그저 한두 번이 아니고 틈이 있는 대로 끈질기게 계속했다.” 기독교 복음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에서 시작하고,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완성된다면, 그녀의 말은 복음의 정석일 테다.
허나, 복음은 은혜이고, 자발적이고 비강제적이다. 용서를 강요하면, 율법이 되고 만다. 그리고 피해자를 더 나쁜 죄인으로 만든다. 참척의 슬픔 속에서 흐느적대며 흐느끼는 이에게, 아들을 죽인 자도 용서하라고 은근한 압력이란 대체 뭘까? 아들 잃은 어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용서의 강요가 아닐까? 김집사의 모습에서 용서를 설교하는 내 얼굴이, 열심히 넘치는 기독교인이 포개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두 번째는 가해자는 당사자에게 용서받기 전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진실이다. 이 점은 소설보다는 영화에서 더 두드러진다. 복음을 전하고 용서하기 위해 힘들게 찾아온 아이 엄마 앞에서 사형수는 더 이상 평안할 수 없는 얼굴이다. 외려 한술 더 뜬다. 아이와 엄마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노라고, 응답받아 기쁘다는 말을 건넨다. 과연 그는 용서받았을까?
우리 주님의 산상수훈은 기이한 진리를 설파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불화한다면 예배드리는 중에라도 일어나서 그 사람과 화목한 다음 예배를 드리라고 한다. 주기도문에서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연후에 하나님께 용서를 간청한다.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청한다거나,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한 채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산상수훈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서, 제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눈물 콧물 흘렸다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은 착각이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도 풀고, 땅에서 매면, 하늘도 맨다.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한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존엄성을 해친다. 그럴 때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이 이청준의 판단이다. 아마 주님께서도 쾌히 동의하시리라. 그것이야말로 값싼 은혜요, 값싼 용서이리라.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에게서 용서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용서받을 생각 말라는 것이 용서에 관한 두 번째 말이다.
마지막으로 알암이 엄마. 왜 성경은 용서의 주권을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까? 간단하다.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때문에, 모든 죄는 하나님에게 지은 것이다. 알암이를 유괴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유괴해서 살해한 것이다.
하나님 = 주인 공식은 내가 피해자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예수의 혁명 중 하나는 하나님만의 용서의 권리를 인간에게 이양해서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하여 주었듯이, 너도 타인이 잘못을 용서하며 살라’는 말이렷다. 그 특권을 오남용해서 내가 너의 주인이고,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는 한, 누구도 용서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실상은 주인도, 신의 자리가 아닌 노예와 절망의 자리이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를 내 마음에, 내 삶의 중심에 두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여, 내게 악을 행한 자가 내 마음의 왕좌에 등극해서 언제까지나 그의 망령에 시달리고 만다. 알암이 엄마의 비극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내게 피해자에게 용서할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작가의 말처럼 그것이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권리이요 존엄인 면도 있지만, 내가 그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아들에 대한 소유권 주장도 함축한다. 아들은 엄마의 소유물일까?
용서의 권한이 하나님에게 있음은 그가 누구라도, 설사 살인자라도 내가 그의 주인이 아니며, 또한 용서하지 못함으로 피해자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뜻이다. 용서해야 자유다. 내가 주인 노릇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겁나게 잔인하지만, 겁나게 아름다운 일이다. 참 아프고 아름다운 말이다, 용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