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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천로역정의 기독도는 쁄라라는 천성을 향하여 길을 떠났고 달마는 좌선을 통하여 해탈에 도달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곳과 그곳이 다르지 않다고 우기는 이들이 종교통합의 장에 이름을 내 걸고 ‘가보지 않았으니 누가 알랴’ 식의 후안(厚顔)을 들이대지만 이도 또한 저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한 동안 먹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들린 양, 먹고 마시는 데 온 국민이 열병을 앓듯 하더니 이제는 좀 배가 부른지 지금은 그동안 누가 손 발목을 묶어 놓기라도 했다는 듯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상을 들쑤시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도 하늘이 움직임이지 사람 생각으로 저리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싶기도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로마가 온 세상의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하고 그 길로 주님의 복음이 전파 되었듯이 이러한 소란함도 하늘이 무언가를 준비하심이다 생각하면서 그저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볼 따름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나 오늘 우리가 어디로 가야 주께로 가는 것이며 또 어찌 해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을 수 있을지를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는 길을 찾아 떠나는 것과 같아서 모르는 길을 떠날 수도 없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길을 모르니 그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머물러 사는 사람이 가진 것들을 다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길에 필요한 것들 한 두 가지면 족합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단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입니다. 주님은 낯선 곳, 주님이 가시려는 각동각처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전대를 가지지 말고 오직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떠나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실은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먼저는 출발점이고 다른 하나는 도착점입니다. 나에게로 떠나는 길을 표현대로 본다면 도착점이 나인 듯하여 반대로 출발점을 생각해 보면 그도 역시 나인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나에게로 떠나는 이 여행의 종착지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거기도 역시 주 안에 있는 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인생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음을 근거로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가장 극단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늘이 땅에서 먼 것같이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생각처럼 들려 하나를 취하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할 듯 보이지만 실은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길에 오른 우리들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제공합니다. 즉 가장 높은 곳은 지금 내가 있는 곳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즉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 있는 이곳에 와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계신 하늘은 저 높은 하늘이 아닌 우리의 눈높이 하늘입니다.
눈높이 하늘
하나님은 우리를 마주 바라보시려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에 귀 기울이시고 기쁨에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과 약한 것과 때로 좀 속된 것까지 아시고 받아주셨습니다. 세상을 살게 하시려 약간의 장점을 주시고 서로 부족한 손을 마주 잡고 살라고 단점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늘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좋고 더러는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도 반석은 아니고 신실함도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가 우리 됨을 우리 자신에게 두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실 때 우리는 그 눈을 통하여 영원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직 주 안에서 영원에 있는 존재들임을 알게 됩니다.
나여도 괜찮아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 아마 자신을 가장 용서하지 않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용서는 다른 어떤 이들에 대한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서 중 하나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회개는 거의 고해성사, 즉 죄에 대한 자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 가지 않는 변화를 말합니다. 하지만 회개하고 또 돌아가 죄 짓는 현상은 기독자들의 신앙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일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다시 짓지 말라 하는 것은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왜 빨리 뛰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회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코가 회복되면 저절로 냄새를 맡게 되듯이 우리가 주 안에서 본래대로 회복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곧 사랑이시기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죄인을 정죄의 대상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장점과 단점을 주셨는데 우리는 늘 장점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단점은 오히려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이는 높고 크고 많으면 선하다고 하는 세상의 가치의 기준을 받아들인 연고입니다.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모습을 두고 스스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미 나의 지금 모습을 두고 판단치 아니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은 오히려 정죄를 그치고 쉬어야 할 시기라는 말입니다. 주와 연합한 생명이 이제 생수의 강처럼 우리 인격을 통하여 흐르게 되면 아프던 곳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고 잃었던 기능들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주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신 것은 그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께서 함께 하시는 이유입니다.
오늘을 산다.
오늘은 하고 많은 날 중의 하루가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날입니다. 어제는 기억 속에 있을 뿐이고 내일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이들은 오늘 모든 조건을 다 구비하면 내일을 원대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어제의 자랑과 고생을 걷어내고 내일의 불안을 밀어둔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영원을 건네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천 년을 산다면 시간은 더 이상 의미를 잃고 오직 오늘에 침착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마음은 영원을 만나는 마음과 같습니다.
70%의 완전
인생을 사는 것은 완전하려 함이 아니고 충만 하려 함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충만을 12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2지파, 12제자, 12바구니, 그리고 인 맞은 자의 수 12지파의 각12,000수인 144,000. 그런데 이러한 충만을 나타내는 것들은 꽉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가 빠져있는 것들입니다. 인 맞은 자 중에는 열두지파에서 단지파가 빠지고 열두 제자 중에서는 가룟 유다가 궐이 납니다. 그리고 12바구니 가득히 거둔 것은 부스러기들이었습니다. 이는 인생의 충만이 완벽하고 완전한 데 있지 않음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부족한 충만.
완전에의 욕구는 쉽게 우리를 지나치게 합니다. 그것은 결국 악하여지고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본디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다 장점과 단점을 갖게 하셨습니다. 장점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고 단점이 있음으로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서로 나누며 충만하게 살도록 하신 것인데 인생이 완전에의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은 영의 죽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두려움은 인생으로 하여금 그 두려움을 가리려고 무언가 영속할 수 있는 것들로 자신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오늘을 사는 인생들에게서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소유욕과 권력욕은 오늘의 세상을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얻고자 하였는데 그 방법은 선과 악을 나름 규정하여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면 하나님처럼 완전해 질 수 있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로서 오늘날 종교가 하는 일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물론 이 범주에 속한 기독교도 많습니다.
결국 완전에의 욕구는 아무 것도 아닌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욕구로서 그 끝은 없고 그 과정에서 자신다움이나 적당한 분량을 지나쳐 악하게 되고 맙니다. 모든 회복은 주와 우리 내면의 연합으로부터 시작하고 우리가 알기로는 완전함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신 것의 적당함을 믿고 자기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충만함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전히 완전을 요구하지만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의 70%면 족하다 하는 것이 회복의 지혜일 것입니다.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
그 날 애굽에는 죽음이라는 천사가 집집을 다녔는데 오늘날은 스트레스라는 이름의 살인자가 소리 없이 다니고 있습니다. 암(癌)은 어두울 암(暗)자를 쓰지는 않지만 하는 일이 꼭 어둠이 하는 일을 합니다. 가장 신체적이고 심리적이며 영적인 병이 이것인지라 사람이 살아오고 살아가는 인격을 바꾸지 않는 한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병의 특이한 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인격이 좀체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남자는 일반적으로 강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약한 남자들이 강한 체, 등 떠밀리고 있듯이 인격에서 가장 피곤한 것이 의지(意志)입니다. 스트레스는 주로 이 의지가 지나친 요구를 받을 때 생기는 무리현상입니다. 인격의 회복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가장 많은 비중은 의지에게 지워진 짐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짐을 벗겨 주시는데 오히려 오해하여 의지로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게 종용하는 가르침 속에서 의지는 신앙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에 힘겨워 합니다. 의지는 그리 강인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저 상황을 살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 굳세기만 하면 족합니다. 의지가 육지라면 감정은 바다와 같습니다. 늘 출렁거리는 것이 그의 할 일입니다.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를 통제하라는 그릇된 가르침은 파도를 의지로 정지시키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은 순화되는 것이지 통제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생각도 그러합니다. 주께서 생각의 범위로 죄의 기준을 낮추신 것은 그것들을 의지로 통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영역으로 관심을 이끌려 하신 조치였습니다. 인격은 더 깊은 내면이 외면을 형성하게 하는 구조로 움직입니다. 의지와 감성은 서로 독립하여 움직이고 그 내면은 생각이 움직이고 생각은 인식의 틀 위에서 운행합니다. 사람의 인격이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의지나 감정, 혹은 생각이 그 내면의 인식의 틀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은 마치 감정의 한 질병인 것 같지만 실은 그 뿌리가 훨씬 더 깊은 데 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의 가장 내면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회복이 단순한 행동이나 생각의 변화로 될 수 없는 것은 근본 회복의 능력이 인격 내면에 있는 아무 것도 아닌 두려움에서 바뀌어 주와 연합되어 소생한 영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공짜는 없다.
왕이 신하들을 모아 명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지식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져오라. 신하들은 한 달을 연구하여 책을 지어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왕이 보기에 그도 많아 보였습니다. 이 책도 양이 많으니 이 책의 내용을 다시 줄여 한 문장으로 만들어 오라. 또 다시 한 달을 연구하여 드디어 세상 모든 지식을 담은 한 문장을 가져 왔습니다. “공짜는 없다.”
성경은 2700여년에 걸쳐 각기 다른 교육정도와 문화배경을 지닌 약 40명의 저자가 기록한 역사, 법률, 시가, 잠언, 예언, 서신 등으로 되어 있고 기록하는 데 사용한 언어만도 4가지나 되는 방대하면서도 복잡한 책입니다. 만일 이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한 규정집으로 본다면 끊임없이 행동을 규제하는 새로운 해석들이 적용되어야 할 터이고 역사로 본다면 한 때 흥왕하던 다윗 왕조가 급히 망하고 결국 다시 소생하지 못한 불행한 민족의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잡한 성경을 단순화 하신 작업은 여러 차례 제시 되었습니다. 십계명이 그러하고 주기도문이 그러하며 십계명 중에 큰 계명과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행동에 대한 규정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장애를 회복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장애를 가진 이에게 왜 빨리 뛰지 않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합니다. 정죄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코가 고쳐지면 냄새를 맡고 눈이 고쳐지면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듯이 장애가 회복된다면 뛰는 것이 본성일 것입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생은 본래의 기능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회복의 시작은 죽은 영이 주와 하나 되어 소생한 사실을 듣고 아는 것으로부터 입니다.
성경을 정리하고 줄여 한 가지로 한다면 그 모든 역사와 주님의 사역의 결과는 주께서 우리 죽은 영에 연합하여 소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삶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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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