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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거룩케 하심, 성화
이 장에서의 논의는 성화에 대한 부분인데 성화의 주체, 더 정확히는 성화를 이뤄가는 주체에 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구속, 즉 구원의 내용적인 면에서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혹은 성화구원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점차 공감 되어 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나누는 주제가 ‘구원, 그 이후’라고들 합니다. 즉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 받은 것을 믿음으로 확인하였으면 그 다음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성화, 즉 거룩케 하심입니다. 성화와 거룩케 하심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역시 동일한 내용의 한자, 한글 표현의 차이뿐이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입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거룩할 수 없는 존재인데 이러한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이 구속이며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속됨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떠한 상태를 말할까요? 인간들의 가치를 논할 때 흔히 진, 선, 미, 그리고 성(聖)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거룩함이 마치 인간의 수양의 경지가 높아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인식되곤 하지만 실상은 인간 세상에 거룩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인간 세상의 거룩함은 모두 하나님과 관련된, 혹은 속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언급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결코 부정한 것들과 함께 하실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여기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나는 무수한 성물, 성소, 성도에 관련된 조건들 때문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무수한 조건들이 마치 거룩함을 위한 준비라고 여기기에 충분하고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들은 부정하여 하나님이 결코 거기에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여기게 됩니다.
실상 이러한 생각은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철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은 믿음에 의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하고 속된 인간 세상에 함께 하신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생각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세상 철학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속된 인간 세상에 함께 하심이고 완전하심이 불완전과 공존하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과 이성의 협력으로 가능하지 이성만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되 부정하고 속된 세상, 특히 인생과 함께 하시더라도 그 거룩하심이 결코 훼손되거나 부정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속된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였던 고라는 회중의 유명한 족장 이백오십인과 함께 모세를 거스려 일어나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더불어 논쟁하였던 주제가 바로 거룩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누가 거룩한 자인지 보이시게 하자 하여 모세와 별도로 하나님께 분향할 향로를 각 250인이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일면 타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가나안 들어가기가 중단되고 광야의 유리하는 생활이 시작되려던 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약속은 이제 다시 없고 오직 광야에서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들의 불평이었으니 이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불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회중에 계시고 모두 거룩하니 모세여 왜 당신이 스스로 회중 위에 군림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이 분당을 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시작된 것이었기에 그들의 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부정한 중심들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분향을 받지 않으셨고 오히려 향로에서 불이 나와 저들을 사르고 발 아래 땅이 꺼지며 산 채로 음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이루어진 상황에 주목해 보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너는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을 명하여 붙는 불 가운데서 향로를 취하여다가 그 불을 타처에 쏟으라. 그 향로는 거룩함이니라. 사람들은 범죄 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민수기 16:37-38
이러한 장면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죽은 사건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기 10:1-2
성물들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
여기 다른 불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향 외에 다른 향을 사르는 것을 말합니다. (출30:9) 여호와께서 명하신 향 만드는 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출애굽기 30:34-36
이와 더불어 성소에서 분향하는 것은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일인데 다음은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져서 스스로 여호와의 전에 분향하려하다가 문둥병이 걸리게 되는 장면입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역대하 26:16-20
이처럼 구약의 성물에는 나름의 거룩하게 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합당한 제조방법이 제시되고 또 소금으로 정결케 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향하는 역할도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입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분향에 관계된 일만이 아니고 여타 다른 성물들, 즉 성막, 성전, 성산, 성일, 성물에 대하여 거룩하게 하는 각각의 규례가 다 적용이 되었고 택하신 족속, 성도들에 대한 것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제사장을 위임하여 거룩하게 하는 규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찌니라. 출애굽기 29:4-9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나 웃시야 왕의 경우처럼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자들을 사르거나 혹은 머리에 문둥병이 발하는 현상 등은 여호와 앞에 부정하여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을 나타내는데 고라자손은 당시에 제사장들이었기에 분향하는 기구나 방식, 또 그들 자신이 구별된 제사장들이었다는 점에서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문제 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세우신 자 모세에 반하여 무리를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규례와 방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의도가 문제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목하여 살펴보려는 것은 그들이 불에 살라지고 그들에게 속한 무리들이 땅에 삼켜진 이후 거기 남은 분향하는 향로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민수기 16:38
즉 향로가 준비되는 과정은 위의 향을 준비하고 향로를 준비하는 규례를 좇아 행하여졌지만 정작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물론 모든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고 충족되어야 하지만 그 모든 준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어떤 물건이나 대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여와와께 드림, 즉 하나님과의 접촉에 의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한 것이지 방식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룩하게 됨의 원인, 즉 무엇이 더 본질적인 이유인가에 대한 언급은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로마서 11:16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태복음 23:19
위의 구절들에서 보여주는 원칙은 떡덩이보다 곡식 가루, 예물보다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근본적이라는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향로가 거룩하여 진 것은 그것이 규례대로 준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드려졌기 때문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거룩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사도행전 10:11-16
구약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여 부정한 것은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거룩하게 구별하는 일이 먹고 마시는 일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데 베드로는 히브리인으로서 당연히 이러한 속된 짐승들을 먹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명시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규례더라도 그것을 진정 정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속되다고 정해진 것들조차 하나님께서 정하게 하시면 그것은 정한 것이 됩니다.
이 상황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점에 보여주신 환상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언약은 오직 택하신 이스라엘 족속에게만 국한 되었는데 부정한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서 택하심 가운데 두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천명하신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거룩함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점을 알게 합니다. 그것은 거룩함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구별된 무리, 성도
구약에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있는 구별된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도 구별해야 했고 여러 가지 성결케 하는 규례들을 지켜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할례를 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구별된 무리, 즉 거룩한 자를 가리키는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성결케 하는 규례들이 지금까지 지켜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의 노력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족속들이 여호와 앞에 규례들을 지키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지금은 그 모든 과정들이 성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뿐입니다. 즉 오늘날 택함을 받은 성도들인 기독자들도 성화, 즉 거룩하게 됨을 위하여 구약의 이스라엘들이 스스로를 성결케 하려고 지켰던 여러 가지 규례들처럼 오늘날도 무언가를 열심히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규례들 자체가 거룩하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규례들이 변개치 말아야 했을 것이고 지금도 향을 만드는 규례대로 향을 만들고 관유를 만들어 뿌리면 거룩해져야 할 텐데 오늘날 그런 방식들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줄 것으로 믿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의 고찰에서 보듯이 어떤 대상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로 인한 것이지 그 규례가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거룩하게 하는 규례들을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택하신 자들이 신앙생활에서 거룩하게 됨, 즉 성화를 위하여 하는 모든 수고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심
이제 논의는 잠시 돌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부분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내용이 담겨 있는데 언어에 따라서 그 중에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이 있는 데가 있고 삭제된 데가 있습니다. 한글판은 개역된 것이나 기존 것 막론하고 이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개역개정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개역한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English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일본어 十字架じゅうじかにつけられ、死しにて葬ほうむられ、
“陰府よみにくだり”、三日目みっかめに死人しにんの內うちよりよみがえり、
중국어 被钉在十字架上,受死,埋葬,“将在阴间”, 第三天从死里复活升天
라틴어 “descendit ad infern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헬라어 “κατελθόντα εἰς τὰ κατώτατα”, τῇ τρίτῃ ἡμέρᾳ ἀναστάντα ἀπò τῶν
νεκρῶν,
위에 열거한 여러 언어 중에 “주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이 없는 것은 오직 한글판뿐입니다. 이는 한국 신학의 부재를 나타내는 아주 심각한 현상입니다. 사도시대에 작성되어 모두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오늘날까지도 다른 언어권에서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 이 구절이 한글판 사도신경에서 삭제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셔서 악으로 가득 찬 지옥에 내려가실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이상향, 유토피아에만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히랍 철학자들의 사상이 그대로 한국 신학계에 잠복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에 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며 인간 중에 악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이 시공세계에 하나님은 계실 곳이 없고 오직 천국이라고 하는 곳에 고결하게 계셔야 하는 분으로 몰아내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그 거룩하심은 오히려 속된 것을 접하실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되었던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포함되게 하는 것입니다.
택함의 의미와 기독교의 폐쇄성
이제 우리의 논의는 다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주신 거룩해지는 규례와 방식에로 옮겨 갑니다. 물론 이러한 규례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할 수는 있어도 결국 실질적으로 모든 대상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임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준비 과정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로만 가능한데 여기에도 구약의 규례를 지키는 것처럼 믿는 자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수고와 노력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상 구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 규례와 법도는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그의 택한 백성들도 거룩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이는 위에서 한 예로 들었던 향의 제조법처럼 성막이나 성산, 성물, 성일, 그리고 성도들의 거룩하게 함에 대한 모든 방식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로 비추어 볼 때 죄는 결국 거룩하여 지는 데에 거슬리고 반대되고 부족한 모든 것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택하신 자들은 부정한 것들을 먹지 말아야 했고 그것을 어기고 부정한 곤충이나 짐승을 먹게 되면 이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와 법도들은 변개되었고 더 이상 먹고 마시고 씻는 것들에 대한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는 것은 사람의 태도와 성품, 그리고 마음을 살피는 것들도 대체되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은 이런 구절들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5:18-20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이 규례를 지키며 거룩하고자 한 것이나 오늘날 기독자들이 마음을 살피며 성품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 다 그 목적은 거룩해 지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수고와 구별되고자 하는 노력이 과연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구약의 향을 준비하는 규례대로 누군가가 그것을 준비한다고 그 향 자체는 결코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품의 변화와 행동의 구별을 통하여 거룩함에 이르려 하는 같은 수고와 노력을 타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하는 면에서는 기독자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절대 거룩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의 성물
구약의 거룩하게 하는 규례들은 그 물건이나 대상 자체가 다른 것들과 다른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를 하지만 이것이 가지는 영양상의 이유나 분자구조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굽이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지금은 돼지고기를 먹고 먹지 않는 것이 성도들의 성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습니다. 굽이 갈라진 것은 분별하는 지혜로, 새김질을 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로 이를 이해합니다. 성전은 그 자체로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무수한 성물과 기구들, 구조와 장식들은 각각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의 존재적 표현입니다. 여기서도 거룩함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에 근거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들이 신약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들을 상징하는 규례들을 지키며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자 했던 모든 수고와 심정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지금은 말씀을 상고하고 분별하는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먹지 않을 것과 먹을 것, 가까이 하지 않을 것들을 구별하여 생활하는 것들을 통하여 그들은 선택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그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현이 달라질 것을 예언하는 성격으로 각종 성물에 대한 규례를 주셨고 새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예수로 나타나신 것은 본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규례들이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이전 것들의 참 언약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날은 주께서 더 이상 나사렛 예수로 계시지 아니하고(막16:6) 택하신 자들 각자와 하나 되어 계심을 아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먹고 마시며 성물들을 준비하는 규례들을 지키며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준비를 하였듯이,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율법과 규례들이 상징하는 바가 우리의 인격과 생활 안에 주와 동행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깨닫고 성품과 인격을 거룩하게 하려고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거룩하게 하는 규례들이 그 자체만으로 결코 아무 것도 거룩하게 할 수 없었듯이 신약의 성도들이 아무리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고매하게 가꾸고 보존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규례대로 향을 만들고 성막을 지었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한 성물이 될 리 없었듯이 신약시대에도 하나님 없는 성품이 아무리 고매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룩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물들이 일시적 예언의 성격을 가진 상징들이었듯이, 우리 인격의 고매함도 영원이 세계에서는 단지 이 시공세계에 속한 소멸될 것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성도들이 규례를 지키며 자신을 단속하던 그 심정과 수고를 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규례를 잘 지켜 성물을 준비했어도 고라의 무리들처럼 그 도모와 심정들이 악하게 되어 있으면 결코 하나님은 그들을 받지 않으시고 거룩하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인격과 성품을 가꾸고 신앙의 경건한 모습을 갖춘다고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심정과 수고를 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거룩하게 하지도 못하는 각종 규례와 수양의 과정을 성도들에게 요구하실까요? 그것은 거룩하게 하심에 대상이 되는 우리들의 동참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과 동행하심에 대한 동참, 그리고 역사하심에 대한 의탁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러한 것은 규례를 지키고 수고를 하는 여부보다 더 중요하게 항상 요구되는 사항들이며 규례를 지키고 수고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들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규례를 잘 지켰으나 마음이 합당하지 않았던 고라의 무리가 징계를 받았고 규례를 지키지 않았어도 복음을 사모하던 고넬료는 거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태복음 23:23
여기에 이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가리키고 저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처럼 규례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도 행하고 저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신앙생활에 힘써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그러나 거룩하게 함, 즉 성화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심령에 더 중한 인식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화에 대한 오해
성화된 인격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우리는 흔히 성품과 인격의 어떤 수준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인격은 단일한 구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의지와 감정이 움직이고 그것들은 생각을 좇습니다. 생각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따라 형성됩니다. 전혀 모르는 것이 갑자기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들이 통합되며 새로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흔히 우리가 고매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인격은 의지나 감정을 잘 통제하는 등의 것을 생각하지만 실상 그러한 부분은 인격의 외면을 형성하고 있으며 정작 인격의 중요한 부분은 가지고 있는 지식, 즉 개념과 이미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성화에 대한 가장 많은 오해는 아마 성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감정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그것은 의지로 통제되는 영역이 아니고 별개의 영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은 거의 외부에 표출된 상황으로 이미 발생된 감정을 통제한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노출함으로 더 건강한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이는 칭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질 좀 죽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 최초로 순교되는 제자가 되었고 요한도 후에 이단들에 대해 격한 분노의 마음을 숨기지 않은 것을 성경과 이후에 교부들의 기록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주 앞에 배반도 하고 불쑥불쑥 나서는 성품이었지만 나중에는 마가가 유약하여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이탈하였을 때 그를 거두어 성숙한 제자가 되게 하기까지 수고한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의 성격과 감정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성도의 변화는 감정의 조절이나 의지에 의한 현명한 선택을 의미하기보다는 보다 더 깊은 영역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정의를 지식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로새서 3:10
하나님 안에 포함 됨
거룩하게 됨, 즉 성화의 결과는 인격의 고매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포함되는 것을 말합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거룩함이 이루어지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포함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창조하신 분 안에 창조된 것이 동일한 본질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그 충만하신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회복된 우리 자신이 주 안에서 충만해진 인격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구별된 무리, 성도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로마서 11:16
구별된 무리는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거룩하게 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택하심과 임재는 하나님 단독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이해와 동의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협력할 만한 어떤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의사 앞에 누워있는 환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환자를 기절을 시켜서라도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치료에 임하는 의사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규례를 주시고 그것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고 소망하며 그것에 감사할 마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규례를 주신 목적입니다. 따라서 규례를 지키는 동안 소위 택하신 자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입니다. 그것이 곧 고라자손의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주신 규례를 지키면서 내가 이 규례를 지키는 열심과 수고가 스스로 거룩하게 할 줄 알거나 그것들을 하는 것으로 그렇지 못한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곧바로 고라자손의 멸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기독자는 분명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지만 기독자가 가진 가장 큰 병폐가 바로 폐쇄성인데 그것은 소위 성도라는 구별된 무리로서의 교만에 기인합니다. 오늘도 그래서 수많은 고라자손이 멸망의 구렁텅이 앞에서 자기를 사를지도 모르는 향로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