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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속죄와 구속 개념의 변천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의문 중의 하나는 주님의 구속을 속죄로 볼 것이냐 대속으로 볼 것이냐의 관점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바로는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 해 주신 것이 구속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논의는 오히려 이전에 우리에게 부여하셨던 것을 잃어 버렸기에 이를 주께서 대신 지불하시고 본래대로 회복시켜 주신 대속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한글성경은 개역한글판을 표준 번역 성경으로 하고 다른 번역본을 참고하고 있으며 영어는 가장 원어에 충실하여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였다는 NASB를 표준 번역 성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번역의 과정에서 선택되는 어휘나 단어들은 당시의 그 언어를 사용하던 신학자들의 신학의 경향을 보여줍니다. 한글성경에서 사용하는 구속과 대속은 영어에서는 공히 redemption으로 표현됩니다. 같은 단어를 때로 대속으로 때로는 구속으로 번역한 한국 신학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구원과 대속의 개념을 함께 포함하고 싶은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의도가 참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다 싶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로는 이러한 구원과 대속의 연합된 의미로서의 구속보다는 속죄의 의미로의 구원에만 매달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경에 나타난 구속과 속죄, 그리고 대속의 표현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합체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표준 번역 성경 : 원어 성경은 그 필사과정의 착오문제만 제기 될 뿐입니다. 그러나 번역 성경은 언어 변환 과정을 거치면서 항상 번역성경의 표현이 변동 될 수 있는 요인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 원어 표현 자체는 고정되어 있으나 번역할 언어는 생활의 변동과 함께 꾸준히 변화되고 있으므로 어느 시점에 번역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번역이 가능합니다. 또한 언어 변환과정에서 동일 언어를 번역할 수 있는 단어나 표현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언어 환경으로 동시에 번역을 한다 해도 번역자에 따라 꼭 같은 가치를 가지 여러 번역본이 가능합니다. 번역의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번역 성경을 두고 한 가지 미리 확정 지워 둘 것은 표준번역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표준 번역본을 정하는 원칙은 정통 교회의 가장 권위 있는 첫 번역본으로 번역 성경의 기본을 삼고 단 번 확정된 성경 번역본은 언어 환경의 변화를 따라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두되 실제로는 언어 환경이 수백 년 이상 변화를 한다 해도 그 표준 번역본은 변화될 필요가 없도록 지켜져야 합니다.
백영희 조직신학, 이영인, 총공회목회연구회, 1982. p98
우선 구약에서는 속죄와 대속(혹은 구속)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사용됩니다. 영어성경에서의 표현으로는 속죄는 atonement로만 나타나고 구속 혹은 대속은 모두 redemption으로 표현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속죄라는 표현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오직 구약의 인용에서만 나타나며 그 대신에 죄 사함이라는 forgiveness of sins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이 속죄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고 먼저 대속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의 구속 혹은 대속은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다시 사서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셨던 기업의 땅 가나안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가정별로 분배 해 주셨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거친 후 가나안에 들어가는 모든 과정에도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느헤미야 1:10
They are Your servants and Your people whom You redeemed by Your great power and by Your strong hand.
이때의 구속은 우리가 아는 대속의 개념인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이미 주셨던 것을 다시 회복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에서는 우리가 아는 바대로는 대속의 개념이 구속과 속죄의 개념을 전적으로 다르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구속은 주로 약속의 땅의 회복의 개념으로, 그리고 속죄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사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의 속죄제가 있었지만 그 제사들에는 공통적인 부분을 포함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죄 지은 자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합니다. 이때 흔히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2)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습니다.
3) 피를 찍어 뿌리거나 피를 모두 단 아래 쏟는 등, 피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4) 그 짐승을 태워 번제로 드립니다.
이 절차는 안수, 죽음과 피, 그리고 태움 등으로 구성되는데 그 과정들이 나타내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로인한 죄 사함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의 근거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해입니다. 비단 이 제사의 절차들만이 아니고 구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의 성물들은 다 부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거하고 있고 부분적인 역할들이 전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다 성취되었기에 더 이상 그 역할들을 수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7:27
구약시대에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의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의 심정이나 주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의 심정이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속죄 atonement는 제물을 잡고 피를 흘리게 함으로 죄를 없이 한다는 면에 치중한 데 비해 죄 사함 forgiveness of sins는 물론 주님의 피 흘리심이 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더 비중을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본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데 어떤 조건이 요구될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논의보다 먼저 구약의 속죄의 절차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안수입니다. 이 때 죄 지은 사람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합니다. 물론 낱낱이 다 고백하지 않고 당연히 인생으로서 죄가 있음을 간주하고 안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을 때 그 죄를 회개하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인생으로서 당연히 있을 죄를 놓고 사함을 받은 것으로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히 구약의 이스라엘도 자신의 지은 모든 죄를 남김없이 기억하고 다 고하는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 같은 경우에도 미처 알지 못하는 부지불식간에 마음으로라도 지은 죄라도 있을까 하여 이를 두고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욥기1:6)
안수는 신구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인데 그 의미와 적용은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1) 죄의 전가 2) 책임의 전가 3) 직위의 위탁 등의 의미로 안수를 행하다가 신약에 오면서는 직위의 위탁과 더불어 4) 능력을 행함 5) 성령을 받음 등의 의미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죄의 전가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위기 1:4
2) 책임의 전가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찌니라. 레위기 24:11-14
3) 직위의 위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민수기 27:18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6:6
4) 능력을 행함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복음 8:25
5) 성령을 받음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사도행전 19:6
이상에서 보듯이 안수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기능을 수행하는 행위입니다. 그 중에 흥미로운 것은 아사셀의 염소에 관한 일입니다. 이는 성경전체를 통하여 레위기 16장에 단 한차례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찌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찌니라. 레위기 16:7-8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 레위기 16:21-22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며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 레위기 16:26-28
여기서도 안수를 하는 것은 죄를 전가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다른 짐승의 제사의 경우와 동일한 절차에 의해 드려지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역시 같은 방식으로 안수하며 이스라엘의 범한 모든 죄를 고한 후 정한 사람으로 이를 끌고 광야로 나가게 하고 무인지경에 이르면 이를 놓아 보내게 합니다. 다른 성경에서 그 용례를 살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극단적 해석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보내진 염소로 하여금 죽게 하는 절벽을 가리킨다는 것이고 또는 죄의 궁극적 원천으로 다시 보내졌다는 측면에서 마귀나 사단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언급하는 바대로는 무인지경에 이르렀을 때 놓으라는 내용만 있을 뿐이고 이 놓는 행위가 염소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시해 주지 않는 부분을 임의로 첨가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언급된 내용만으로 아사셀의 염소를 상고해 보는 것이 바람직 한 태도입니다. 이는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로 드리는 제사에 대한 언급과 관계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브리서 10:4-5
아사셀 염소에 대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바는
1) 그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한다.
2) 무인지경의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놓아 보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타 다른 속죄의 제사에 드려지는 짐승의 경우와 동인하게 죄를 전가하는 안수를 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제사에서 안수한 후에 행하는 절차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안수 후에, 물론 여기에는 죄의 고백이 수반됩니다만, 짐승을 잡고(죽이고) 그 피를 가지고 어떤 절차를 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짐승의 부분 혹은 전체를 불로 태우는 순서를 갖습니다. 아사셀의 경우 무인지경의 광야로 놓아 보낸다는 것이 죽음으로 보내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풀어 놓는 것인지가 불분명합니다. 물론 두 가지의 해석들이 다 제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염소라는 동물은 자연 상태에서 아마 절벽에 살기에 최적화 된 동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따라서 돌이 많은 사막으로 보내는 것이 염소에게는 물 만난 고기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로도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사셀이 염소를 죽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롭게 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듯이 짐승을 잡아 죽이고 그 피로 뿌리거나 쏟는 등의 행위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인지 아니면 생명을 상징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분명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죄에 대한 속량은 처벌이라는 생각에 젖어 온 상황에서 죄가 자유로이 소멸된다는 생각은 너무 생소한 개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논의해 온 바에서 악은 본래로부터 지나쳐진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면 죄가 소멸되는 것이 온갖 인위적인 외형의 자아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소멸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짊어진 아사셀의 염소가 무인지경에서 놓여 자유로워지는 것은 주와 연합한 상태에서 우리의 죄가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이 자신의 죄를 대신 지고 죽임을 당할 때 그것을 대하는 죄 범한 사람의 심정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죄는 죄를 지은 사람이 배상을 하거나 체벌이던 사형이던 스스로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속죄제의 경우, 짐승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의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인데 자신의 죄의 중하기가 이 짐승의 죽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서 필시 더 중요한 어떤 실상이 대체될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더 중요한 실상은 당연히 이 땅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은 자명한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논의 할 것은 그 짐승의 죽음과 피, 그리고 불사름이 상징하는 바가 예수의 죽으심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짐승의 죽음이 곧 예수의 대신 죽으심을 상징하고 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예수의 몸의 생명이 가치적으로 수억의 짐승이라도 결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가치 있지만 인생과 같은 몸으로 오셨어야 했고 예수님의 몸도 역시 상하면 죽는 몸이었기에 결국 짐승이 죽어 죄를 사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죽을 그 몸이 죽음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없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그 분의 육체마저 신성화해야 하는 것인 줄 아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분위기로 볼 때 상당히 거북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사셀의 염소를 무인지경에 놓아 보내는 것도 결국 죽게 보내는 것이라는 이해도 상당히 동조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염소를 자유로이 놓아 보내는 것이라는 해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듯이 짐승의 제사를 죽이는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더 큰 생명을 주실 것에 대한 요구로 볼 것이냐 하는 점도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짐승의 제사에서 불로 태우는 절차는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의 히브리어가 가진 뜻도 올려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은 구약의 짐승의 제사의 모든 절차가 의미하는 바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으심의 형식적, 의미적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이어질 논의는 역사를 통하여 구속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에서의 구속의 개념은 실제 이 땅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셨고 자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다시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고 그렇게 해서 각 가정별로 분배된 땅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소유권이 바뀔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구속 개념, 즉 대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사서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에 대한 믿음이 바뀐 것은 아닌데 땅의 의미에 대한 이해에 변동이 왔습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땅의 온전한 영역을 다 회복한 다윗 왕의 시대를 벗어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쇠퇴하였고 영토는 축소되었으며 결국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이어 남유다조차 바벨론에 침략당하고 맙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온 세계에 흩어지는 소위 디아스포라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더 이상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고 심지어 포로로 잡혀간 이들 중 상당수가 가나안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니엘이 그러하였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흐려져서가 아니고 약속의 땅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연고였습니다. 시대는 바뀌고 중동을 둘러싼 패권에도 변화가 생겨 팔세스타인을 지배하는 나라가 로마가 되었을 때 이 땅에 주님이 오시는 약속이 성취됩니다. 이해가 빠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물리적 지역이나 패권에 있지 않음을 알았지만 여전히 주님을 통해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사역과 복음을 통하여 주께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이해와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물리적 국가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와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속죄의 개념에는 별 변동이 없었습니다. 물론 속죄의 제사가 회개의 세례로 대체되고 결국 주님의 죽으심이 이전 짐승의 제사를 모두 대체하셨다는 깨달음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죄를 속량해야 하고 그 과정에 제물이 필요하고 짐승에 안수하듯이 죄를 고백하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절차와 의미의 과정에는 별로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좀 전에 언급한 바대로 구속의 개념이 더 이상 물리적인 땅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이라는 이해의 변화가 있음으로 이 두 가지, 즉 구속과 속죄의 개념상의 연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두 개념을 하나로 정의한 것은 바울이었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1: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그가 이 두 개념을 하나로 정의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디아스포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바라지만 가나안땅이 아닌 이방의 땅 다소에서 나서 자라면서 헬라의 교육을 받고 자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율법의 모든 행위에 흠이 없이 행하면서 줄곧 바라는 것이 죄 사함의 문제와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피에 의한 죄 사함의 복음을 들으면서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죄를 진 자의 속량과 약속의 땅의 대속이 한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이해하게 되면서 속죄는 단순히 죄를 없이 한다는 개념이었던 데 비해 대속은 이미 주어졌던 것을 다시 회복하게 한다는 내용이 합해지면서 죄 사함이 단순히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땅의 소유권과 연관된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의 땅은 우리의 인격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거기에서 소유권이라 함은 발생된 죄가 아니라 죄를 발생하게 하는 근본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영의 자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주님의 피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즉 발생한 사건적 죄를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의 주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련된 주님의 피가 상징하는 바도 그 피로서 값을 치러주었다는 이해보다는 주권이 회복되게 하여 이전에 가진 소유권을 다시 갖게 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이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생명은 물건처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영으로 우리 영에 연합하시고 부활하신 인격으로 우리 인격에 연합하심으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죄 사함은 발생한 죄의 처리보다 죄를 생산하는 죄의 본성을 해결함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하나 되심으로서 얻은 새 생명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죄를 생산해 내던 인격의 내면이 이제는 바뀌어 생수의 근원이 되고 거기가 곧 어린양의 보좌가 놓인 자리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본성이 주님의 생명과 하나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에 있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히브리서 6:1-2
한편, 주님의 돌아온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깨달음에 대한, 용서와 복권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분명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은 자였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용서하십니다.(속죄) 거기에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보시라는 둘째 아들의 말을 일축하시고 몸을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십니다. 이는 단순히 속죄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해주시는 대속의 개념이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구속이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