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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교회의 중요성
홀로 있는 아담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록되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8 고 하셨으니 아담을 지으신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이 종결되었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하와를 지으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는 완결되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롬5:14)이었고 창조의 모든 과정에 적용하셨던 모든 개념은 성경의 전 역사를 통하여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데까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역사하심으로 성경의 모든 섭리가 완성되었지만 해와를 만드신 것으로 창조의 모든 과정이 종결되었듯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모든 섭리의 종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교회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창조와 섭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최종 결과물로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몸에 연관하여 설명하는 교회의 원리
이 장에서 교회에 대한 논의는 몸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몸과 교회는 한 분 하나님의 동일하신 지혜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우리의 몸에 적용하신 원리를 통하여 참된 교회를 알아가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입니다.
머리인가? 생명인가?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1:22-23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고 그 형상대로 인생을 창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함께 거하게 하시려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언되고 있는 내용은 그 충만함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로서 성취될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 충만하심의 내용은 다음 구절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2-13
아담과 해와의 관계를 ‘한 육체’라고 하셨으나 남녀의 관계가 때로 한 몸이 되지 못함을 쉽게 경험할 수 있으니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남녀의 관계라기보다 한 육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육체라는 이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머리와 몸으로 표현합니다만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머리와 몸의 지체는 각각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로서 단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차이의 수준이 우리가 알고 믿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여 찾아뵙고 문의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이 땅에 주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 우리 안에 계시고 그 거처를 함께 하지지만 그 격이 동일한 현실 상황에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표현을 적용하려다보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시는 머리의 자리에 흔히 교회의 목회자가 있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즉 달리 표현한다면 ‘목사는 교회의 머리’로 이해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십분 양보하여 이 표현도 위에 언급한 바처럼 단지 역할의 차이로서 이해된다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표현은 단지 역할의 차이라고 하면서 이해는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지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는 어쩌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한 데서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된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들과 대등한 입장에 있는 단지 역할이 다른 존재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주님의 교회에서의 위상은 머리의 위치가 아닌 몸의 생명으로 계십니다. 이 주님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위치도 명확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의 위치입니다. 스스로가 주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지체로서 머리와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알면 목사가 교회에서 주님의 자리에 앉을 일도 없고 또 지나치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생명
생명은 살아 있는 생물에게 분명 존재하지만 분리하여 꺼내 보여줄 수 없듯이 주님도 믿는 이들에게 분명 함께 하시지만 역시 보여줄 수 없게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생명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주님 없는 교회는 죽었습니다. 죽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에스겔에 분명히 증거 되어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에스겔 37:11
교회가 곧 믿는 자들이면 당연히 주께서 함께 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단지 주께서 아직 그 안에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로 죽어 있게 합니다. 주께서 자신들 안에 오시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표현은 마치 겸손이고 열심인 듯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주께서 이미 오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현재의 상태와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주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오셔서 하나 되어 계시고 이를 알리는 것이 복음이요, 이를 듣고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변화와 회복은 그 이후에 주와 더불어서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주와 함께 하지 않는 변화와 회복은 없습니다. 생명은 늘 살려주는 일을 하듯이 주님은 우리, 곧 교회 안에 계시면서 모든 상황 속에서 살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세포에 피가 공급되어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일을 합니다. 피가 곧 생명은 아니지만 성경에 피를 생명으로 비유하셔도 무방할 정도로 피는 생명이 하는 역할에 중요합니다. 구속론에서 거론하기를 구약 짐승의 제사에서와 주님의 십자가에서 공통적으로 피를 다루는 절차가 포함되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죄에 대한 처벌의 개념과 죄를 치유해야 할 것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했습니다. 처벌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죽음이고 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생명을 공급함이 됩니다. 세포와 기관과 온 몸에 피가 공급되어 살아 있게 하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으로부터 그 존재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를 위해 신구약의 모든 섭리를 통하여 주께서 부활하신 존재가 되시고 우리와 하나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머리와 머릿돌
교회의 회복을 생각할 때 성경에서 언급하신 교회의 원리를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나누려는 것은 특별히 교회에서의 목사의 위치에 대한 부분입니다. 물론 바울의 목회서신 등에서는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처신과 자세 등에 대하여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의 본질을 언급할 때 목회자가 거론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다루게 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입장이 지나친 경향이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서 야기되는 현상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야기하는 교인은 그다지 많지 않아도 교회를 잘못되게 하는 목회자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많은 부분이 교회의 머리에 대한 오해로부터 기인합니다. 위에서 잠시 진술하였듯이 교회의 머리를 그리스도라고 한 표현은 두 가지의 오해를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신데 현실적으로는 안계시니 그 자리에 보이는 대상인 목사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처음 이 땅에 설립되기 시작한 신약시대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개체로서 존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라는 표현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그 당시 주님이 부활하시고 자신들과 현실적으로는 함께 하지 않으신 상황도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사람에게 하듯이 주님과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역할이 위에서 진술한대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의 기능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머리가 하는 역할을 목사들이 하게 되다보니 마치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입장이 된 줄로 착각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드러나게 하든지 아니면 종종 말없음표 속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그 경우 문제가 야기 됩니다.
세포의 분화과정을 보면 머리가 먼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기관들과 함께 동시에 만들어집니다. 머리는 생명기능과 감정, 이성과 의식을 주관하고 다른 모든 기관들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기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도 역시 그러합니다. 교회의 모든 면을 살피고 각자가 다 행복한 그런 교회가 되도록 늘 살피고 돌보는 일이 목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교회의 일부분일 뿐이지 그가 교회의 기초도 아니며 교회를 충만케 하는 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를 논할 때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 모퉁이 머릿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21:4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0-22
바울이 머릿돌을 언급했을 때 아직 세포학이 발전되기 이전 시대였지만 그가 가진 생각은 분명 세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모퉁이 돌로부터 시작하여 각 건물이 지어져 가듯이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구성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퉁이 돌은 최초의 수정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화하고 발생하여 몸의 여러 가지 기관이 되고 한 인간의 몸을 이루게 되듯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인격 안에는 한 교회를 구성할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단지 한 가지가 다른 것은 세포는 하나가 분열하여 둘이 되고 넷이 되지만 교회된 우리들은 주께 부름 받은 이들이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 만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세포와 세포사이에는 어떤 물리적 연결물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서로가 서로를 동일한 몸에 속한 세포임을 인식하고 모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모인 곳의 기능을 따라 공동작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분화가 진행되면서 최초의 세포가 따로 남아 있지 않듯이 교회에도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심령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알면 내가 이 교회의 개척멤버니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산 돌
베드로는 교회의 근본을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4-5
잠시 인간의 출생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아담은 창조의 방식, 해와는 분리분식의 방식, 그리고 이후 인류는 잉태와 출산의 방법에 의해 출생하였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의 방식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람으로 난 것은 잉태와 출산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으로 거듭난 것은 성경에 이른 바 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이를 다시 구분하여 본다면 영은 주님의 영과 영원의 세계에서 연합함으로 소생하였고 시공세계에서 우리의 인격이 주님의 부활하신 인격과 연합함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방식을 좇지 않고 오직 주님의 성육신의 본질을 좇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산 돌을 우리 몸의 경우로 비교해 본다면 이는 최초의 수정란에 해당할 것인데 인간의 수정란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수정란, 즉 산 돌은 주 안에 하나 된 나 자신을 가리킵니다. 거기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풍성함이 자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충만함,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부르심
수정란은 세포분열을 통하여 발생하고 분화의 과정을 거쳐 한 개체를 형성해 갑니다. 만일 주 안에 하나 된 나 자신이 산 돌, 곧 주의 몸된 교회의 수정란이라면 이후의 세포분열을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흔히 생각하듯이 전도를 통하여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차리는 것을 말할까요? 전도한 사람들을 자신의 복제 혹은 수확물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만일 그렇다면 목사는 스스로 개척한 교회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은퇴는 없다고 밀고 나가는 양상을 보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을 주는 과정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기쁘신 뜻에 따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어디에 말하였듯이 목회는 복음을 전할 뿐 구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영원의 세계에서 영이 주와 합하여 소생한 사실과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격에 하나 되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한 몸에 속한 세포는 서로를 알아보는 지표들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이처럼 서로를 인식하는 지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주님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요10:4)라고 표현하셨고 요한은 이를 두고 “귀 있는 자”(계2:17)라고 하였습니다. 성부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통하여, 주님은 임재하신 생명으로, 그리고 성령님은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와 하나 된 자들을 모으시고 한 교회로 서게 하십니다. 이것이 부르심인데 마치 세포가 분열하여 개체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서는 데는 누구가 공로자라 할 의미가 없고 오직 인도하신 이를 따라 모이고 살려주는 역할을 수행해 갈 뿐입니다.
줄기 세포
생물유전학의 최근 관심은 모든 기관으로 발생이 가능한 줄기세포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의 세포는 전체 개체를 구성할 모든 정보와 능력을 모두 갖고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주와 하나 됨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 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이 주와 하나 됨 안에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