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대속
너는 무릇 초 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 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찌니라. 출애굽기 13:12-13
우리가 말씀에서 구원과 구속, 대속, 속죄에 대한 부분을 여러 차례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대속이라 하면 대신 속죄라는 이해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 대속을 이야기할 때 보아스와 다윗왕을 거론하고 회복을 이야기하니 마치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것 같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에 성경이 증거 하는 바를 살펴 우리가 한 가지로 받은 구속의 참된 의미를 확증하고 그 능력이 실질적으로 우리 인격과 삶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구분하고자 하는 개념은 속죄와 속량의 차이입니다. 속죄는 죄를 사하는 것이고 속량은 잃은 것을 다시 찾는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바는 이 두 가지 모두 스스로 할 수 없기에 누군가가 대신한다는 의미로 대속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속죄는 행위적으로 범한 죄에 대한 것이고 속량은 땅과 관계된 것으로서 구약에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속, 즉 대신 속죄, 대신 속량은 성경에서만 나타나는 개념이지 다른 문화권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렵습니다. 대개는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이나 재산권에게 제한을 가하는 형태로 처벌을 하지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 속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을 잃었어도 가까운 친척이 이를 다시 사서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셨고 죄를 지었어도 짐승을 죽여 그 피로 대신 속죄하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는 후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입니다.
먼저 땅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단순히 생활터전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약속의 성취였고 거기는 모든 자유와 축복이 함께 하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 즉 이 땅에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의 해석법 중에 하나는 병행 구조를 찾는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 역사에서 오늘날 천국을 향해 가는 기독자들의 삶을 발견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출애굽과 광야 생활, 그리고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과 씨에 대한 것의 성취였습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에 대한 언급을 하는 이유는 구약의 대속 중 대신 속량, 즉 잃은 땅을 다시 사서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를 살피기 위함입니다. 가나안의 생활에서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여호수아를 통하여 각 집안에게 주신 것이므로 설혹 잘못 간수하여 잃었어도 옆에서 그것을 다시 사서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신 대속, 대신 속량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과도 같은 가나안 땅이 이후 구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 순탄치 않고 솔로몬 이후 르호보암 대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고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가나안 땅은 거기 그대로 있어도 더 이상 약속의 땅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흩어진 유력한 유대인들, 즉 에스더나 다니엘 같은 분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택하신 백성들의 믿음에 더 이상 물리적인 땅이 약속의 상징이 아닌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대속, 대신 속량에 대한 개념도 흐려져 예수님 당시에는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대신 속죄로서의 대속, 즉 제사장이 짐승을 죽여 죄를 사해 주게 하신 제도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도 이방에 포로로 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지켜지지 못하고 단지 개인적 신앙을 지키고 살던 중이었습니다. 주님도 나사렛 예수 시절에는 이 짐승의 제사 제도를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중심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짐승의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모든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그 죄를 다 사하셨다는 깨달음, 즉 신학적 해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정이 무너지고 가나안 땅의 주권도 다 상실하고 스룹바벨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명맥이 유지되다가 그도 무너지고 그 자리에 세워진 헤롯성전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는 시점에 그들의 주된 사역인 제사무용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종교적 근간을 뒤집어 놓는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구심점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교회로 바뀌게 되었고 전통으로 내려오던 대속, 즉 대신 속죄의 개념도 제사가 아닌 믿음의 형태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뀐 것은 대신 속죄의 개념만이 아니라 대신 속량, 즉 땅에 대한 속량의 개념도 포함되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은 더 이상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개념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대신 속량의 의미가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되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본래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은 보이는 가나안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냐 하는 점입니다. 구약에도 천국의 개념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의 약속과 대속의 제도는 미래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문제가 아닌 현실의 독립과 자신들의 유업에 대한 아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였듯이 만일 땅에 대한 대신 속량이 죽은 이후 천국의 문제라면 그들의 현실적 느낌은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즉 이 천국에 대한 속량 역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직면한 문제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문제, 즉 현재의 삶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보면 구약의 땅의 대속과 죄의 대속의 서로 다른 개념이 우리의 인격 안에서는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권세에 대한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실상 죄의 권세에 끌려 범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의미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개념이 한 주제로서 연결되어질 것을 이미 구약에서 알게 하신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자를 대속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무론 이 때 사용되는 대속도 다른 두 사례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속죄의 의미나 속량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장자를 대속하는 것은 그 이유가 권세, 혹은 기력에 관련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 쌔,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 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찌니라 출애굽기 13:14-16
이 세 번째의 대속은 기력, 즉 삶의 권세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례를 출애굽 사건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현실의 우리의 구속에 대한 병행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음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히 한 나라의 독립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약속이 들어 있고 또한 출애굽의 과정에서 바로의 권세를 장자를 죽이는 재앙으로 꺾고 하나님의 권세로서 택하신 자녀들을 이끌어 나오신 권세의 바뀜이라는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대신 속죄의 문제를 다룰 때 깨달아 진 것은 그것이 단순히 개인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닌 더 광범위하게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출애굽의 병행 구조에서 죄의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죄의 대속은 곧 이전의 나의 자아의 권세를 꺾고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로 바뀌는 과정이 되니 그것이 곧 장자의 대속의 개념과 통하는 것이 되고 그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가 되니 이는 곧 땅의 대속의 개념과 통하는 것이 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인격에서 죄를 발견하는 것은 이전에 나 자신인 줄로 만들어 놓은 외형적 자아가 아직 그 권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자신이라 하지 않고 악이라고 합니다. 그 권세가 주 안에 있는 나 자신으로 회복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내 인격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제자들이 깨달은 다음의 구절은 그 짧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1: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