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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론
1. 마태복음 11:2-15을 통한 고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Matthew 1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마태복음 11:2-15
때로 말은 본의미를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 안에 속내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듣는 사람은 그 본뜻을 바로 알지 못하지만 두고두고 생각하며 결국에 말하는 이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게 됩니다. 이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적 화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화법 의 하나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언어의 기교를 십분 그의 복음에 활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러한 본 의미를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귀 있는 자는 들을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듣는 이가 알아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침노’라는 다소 격한 단어의 사용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천국이 어찌 침노를 당하는가? 침노하는 자는 어떤 자세를 의미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 특히 천국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크신 분들이나 성화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왠지 천국과 성화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더 열심을 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의미로 미루어 짐작하곤 합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야 그것이 죽음 후의 내세를 가리키던 아니면 현실의 인격과 삶이던 뜨거워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 구절의 의미에 있어서는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던 바가 과연 그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 공감하듯이 침노 혹은 폭력, 폭행이라는 단어가 결코 좋은 표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특히 난해절에 대해서는 그 구절만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문맥을 통해 살펴야 합니다. 문맥은 먼저는 그 구절이 담긴 그 상황기록이 먼저이고 다음은 그 상황기록이 담긴 책의 문맥이고 그리고 동일 저자가 기록한 책들의 문맥이고 다음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있어서 기본적이며 필수적으로 말씀하신 당시의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옥에 갇힌 상태에서 주님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묻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요?’라고 물은 것에 대해 답을 해서 보낸 후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였습니다. 요한의 이 질문은 주님과 우리를 조금 당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헤롯왕 앞에서조차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직언을 하던 선지자였는데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종용한 것과 주님을 두고 하나님의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분이시라고 증거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르기를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비록 몸이 옥에 갇힌 상태라고는 하지만 주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였을 것인데 그러나 주님은 항상 억지로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의 믿음으로 알 수 있을 만큼만 역사하시므로 요한에게도 그에게 합당한 답을 해서 보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사야 35:5-6
직접적으로는 ‘내가 그로라.’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이 그 예언의 성취자로서 오셨다는 것을 답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요한을 두고 선지자와 비교하시고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선지자는 장차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데 비해 요한은 친히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그저 하나님과 말씀을 증거 하면 되지만 친히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뿐 아니라 사람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정작 옥에 갇혀 곤궁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때의 힘이 자신의 믿음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하는 사역은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사역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남았을 때 나의 믿음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바로 그런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은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으시고 곤궁한 그에게 합당한 답을 주어 보내었던 것입니다. 실상 그 말씀으로 요한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본문에서 “침노”와 더불어 또 하나의 난해한 표현이 바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표현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주님도 여자가 낳은 것이 사실이고 또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사람 중에 요한이 제일 크다는 말인가? 남자가 낳은 자도 있나?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고 다음은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니 그럼 요한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나?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기에 요한이 천국에 못 들어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해석은 주님께서 친히 오셨고 모든 예언과 약속들이 성취되었으니 이제 후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문제가 결정되는 것인데 요한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구약선진들의 구원 문제와 연관된 내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과연 주님 오시기 전에 있던 선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 왜냐하면 분명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주신 율법과 말씀으로 믿음의 길을 간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음을 배우고자 할 때 예수님 이후 사람들에게서만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분명히 구약의 선진들도 우리와 동일한 믿음의 선상에 있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구약선진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구원론 1강, <아담의 구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선은 이 “여자가 낳은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표현을 일반적 출생의 의미로 사용하시면서 주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남과 은연 중 비교를 하십니다. 이 때 세례요한을 크다 정의하는 것은 그의 사역의 중요성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의 사역은 보내실 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라기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5-6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역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와 하나 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됩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을 비교할 때 주와 하나 된 새 생명은 이 땅의 그 어떤 사역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세례요한은 천국에 가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주님이 주신 답을 받고 평생의 자신의 사역으로가 아닌, 오직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저도 천국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례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구절입니다. 세례요한이 큰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 사자가 직접 사람으로 나타나 그 사역을 함으로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보내신 자 그리스도라 증거 하였기에 가장 큰 사역을 한 것이 되었지만 정작 더 큰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세례요한의 때나 지금이라고 표현된 때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기를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하였고 먼저 사역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천국도 죽음 후의 세계를 가리키지 않고 당시의 현재형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물리적 시간도 공간적 차이도 아닌 세례요한의 사역과 주님과의 차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진술된 천국은 곧 주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의 표현은 “침노를 당한다.”라고 되어있지만 영어의 표현은 suffers violence, ‘폭행에 시달린다.’의 의미인데 여기에는 ‘맹렬함’이라는 의미도 있고 이것이 다음에 이어지는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폭력적이면서 맹렬한 사람은 힘으로 이것을 취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주님 자신이 곧 천국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시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경우, 주님을 얻는 것은 곧 천국을 얻는 놀라운 비법이 마치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안 사람들은 놀랍고 맹렬하게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주님을 소유하려 할 수도 있고 불법적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비결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당시에 사람이셨던 주님을 뵌다면 아마 더한 일을 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힘으로 이를 취한다.’고 그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얻는 천국은 당시의 천국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이라도 생각하기를 지금도 어떤 이가 스스로 서서 내가 곧 재림 예수라든지 혹은 예수께서 내 안에 재림하셨다고 하여 그에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는 복음과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말할 것입니다. 당시에도 사람으로 오신 것을 믿는 믿음이었듯이 지금도 사람으로 오신 것을 믿는 것인데 무엇이 다르냐?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이 결정 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바로 아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사람으로 오셨기에 그 앞에서 믿음을 가진 것이고 지금은 주님이 이미 부활하셔서 모든 택하신 자녀들의 인격에 연합하여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 오늘날의 천국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오늘도 그 길에서 천국을 얻고자 할 때 맹렬함이던 조금 지나치던 혹은 힘으로 얻으려 하던 주님은 다 용납하시고 열어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지금 우리 안에 천국으로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