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의 우리의 삶에 주의 동행하심을 경험한다 합니다. 때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연합은 구원의 서정의 가장 높고 심오한 경지인 것처럼 알고들 있습니다. 주와 연합과 동행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의 단편적 지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연합의 원리는 기독교, 즉 하나님의 영존하심부터 그리스도, 우리의 인격, 사역의 모든 현장에까지 골고루 적용되는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원리입니다. 연합이야말로 철학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오직 복음과 믿음의 지혜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은혜의 진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서로 다른 둘 이상의 존재가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연합입니다. 그것은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타납니다.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의 특수성을 따라 구분되지만 거기에는 자존하심이나 능력과 지혜의 무궁하심에 결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삼위하나님께서 일체로서 한 인격으로 존재하심이 삼위일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중에 잘못된 하나는 사람의 몸을 쓰셨다는 표현입니다. 즉 속은 하나님인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은 본질을 하나님으로 두고 참 사람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비단 육신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몸과 더불어 마음의 여러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성자의 신성과 예수의 인성이 한 인격으로 존재하심을 말합니다. 그 인격에서 어느 부분이 신성이고 어느 부분이 인성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거기에는 오직 예수의 한 인격이 있을 뿐입니다.
철학에도 하나님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완전하여 인간이 사는 불완전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삼각형의 이상적 형태는 오직 유토피아에만 존재하고 이 세상에는 그러한 완전 세계의 삼각형을 상상한 개념으로만 존재한다는 것과도 같은 이해입니다. 따라서 철학적 이해로써는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천국에만 존재하셔야 타당하지 어찌 불완전한 인생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치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불완전한 세계를 떠나 있음으로 완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을 품으시더라도 창조주시므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전혀 손상이 되지 않는 그러한 완전하심입니다.
주와 나의 하나 됨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예수 한 인격에만 국한 된 개념이 아닙니다. 주의 모든 사역의 결국은 모든 택하신 자들과 하나 되심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개념이 모든 성도의 인격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주께서 우리 죽은 영에 하나 되어 다시 소생케 하심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거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초월의 세계이므로 영의 소생이 현실의 우리의 삶에 어느 시점과 동일한가는 무의미한 질문이 될 것이며 실상 어느 시기와도 아무런 시간차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소생한 영은 주와 하나 된 존재입니다. 소생한 영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그것이므로 이 땅에서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
인간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인생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결국을 영혼의 구원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벧전 1:9) 영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혼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영, 혼, 육의 삼분론을 사용하는 이들은 혼을 따로 구분하여 신과 짐승의 중간 영역을 혼이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혼의 능력이 극대화하여 거의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을 중시하지만 이러한 이해에는 영혼이 담고 있는 연합의 원리가 빠져 있습니다. 성경에 표현된 영혼은 영과 혼이 연합한 상태입니다. 이는 둘이 서로 혼합되어 있음이 아니고 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즉 영, 혼, 육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나 주와 연합하여 영이 소생한 것과 거듭남을 구분하여 영과 영혼의 구원이 별개인 것처럼 나누어 놓는 가르침으로 인하여 소생한 영의 생명이 영혼으로 통하여 우리 인격의 회복을 가져오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이 큰 폐해입니다.
하늘
하나님의 창조가 없는 상태에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셔서 그 자체로 영원의 세계이십니다. 창조 시에 시간과 공간과 만물이 창조되고 이 때 하나님은 이 창조에 속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늘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보좌를 두십니다.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창조 된 세계 안에 임재하신 이 사건은 영원의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결합하는 연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전개 되는 사건들의 흐름을 좇아 역사를 주관하시고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해 섭리하십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늘이 우리 인격의 내면이심을 밝혀 세상과 인격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원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의 연합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음은 동서양의 의학과 현대 두뇌 과학이 괄목한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연합도 다른 모든 차원의 연합과 마찬가지이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그 광범위한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의 연합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인격, 즉 나의 인식이 결코 하나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조화로 인하여 다중 인격을 갖거나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 것도 이해되는 것은 본디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양하여 그 많은 것 중에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개인이 의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바로 다음에 언급할 성육신적 사역의 실마리도 풀리게 됩니다.
성육신적 사역
이는 네 이웃이 네 자신임을 알고 사랑하라는 계명에 해당합니다. 위에 언급한 모든 존재와 모든 창조의 현장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연합의 개념으로 볼 때 창조된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합되어 있고 따라서 이웃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닌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육신적 사역은 내가 너보다 가진 것이 많으니 너를 돕는다는 식의 봉사가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 되심이 타인으로 그저 동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 되시며 한 인격이 되신 것처럼 나와 이웃이 하나이며 이웃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데서 이루어지는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실상 성육신적 사역은 흔한 사역의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깨달음의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