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교회 pan-church
각 교회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서 제공되지 않기도 하지만 에베소교회가 반드시 생명나무와 연관되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다른 교회에 비하여 에베소 교회가 반드시 첫 번째 등장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즉 초대 교회 당시의 많은 여러 다른 교회들 중에서 여기의 일곱 교회만 선택될 무슨 특별함이나 그 나열된 순서 등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 존재하던 교회를 들어 성경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최종 결과물로서의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만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기를 바라고 책망만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또 다른 목표와 거기에 따른 제한을 제공하는 의미 밖에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믿는 이들에게 여전히 짐을 지우는 방식입니다. 각 교회에 나타내신 주님의 모습을 부분적이 아니고 전체를 보아야 하듯이 각 교회에게 말씀하신 이긴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나 그 교회들의 상태는 전체로서 파악함이 타당합니다. 만일 개교회의 특성과 상급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를 바라셨다면 일곱 교회만이 아니고 초대교회 당시의 모든 교회의 특성과 그에 따른 상벌을 다 제시하셔서 새로운 신명기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오직 일곱이 되게 하시기 위한 선택이셨고 창세의 기록과 역사가 그러하시듯이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충만을 향한 회복의 과정을 표현하는 한 방편이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특별히 우리는 교회에 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일곱 교회는 전체로서 하나인 pan-church의 개념입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1:20
일곱별의 비밀
형식적으로는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지만 주목할 것을 편지를 받는 당사자입니다. 이를 각 교회의 사자(angel)라고 하셨고 이들을 신비로운 일곱 별로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편지의 수신자로 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당연히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사는 에베소 교회에서와 사데 교회에서 표현되기를 주님의 손에 잡힌바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교회에 수신자로서 있다는 말이니 이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번역자가 이런 면을 고려하여 원어인 헬라어에는 모두 angelo로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2장과 3장의 천사는 사자로, 그 외 55회 등장하는 천사는 그대로 천사로 번역한 듯 보입니다. 즉 교회의 편지 수신자로 되어 있는 사자 혹은 천사는 사람, 즉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받는 이에 대한 호칭은 “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복된 개인들의 또 다른 역할을 마주하게 됩니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주와 연합함으로 영의 소생과 영혼의 구원, 그리고 육체의 구원을 얻는 회복의 길을 걷게 되지만 회복된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교회로서의 사명입니다. 한편, 동시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범 교회의 수신자로서의 사자 혹은 천사는 회복된 개인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동반자로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주 안에서 회복된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반자로서 함께 동역하는 장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명의 부여, 즉 동역으로의 부르심을 촛대를 세우신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일곱별의 조건은 들을 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요한계시록 2:7
동업은 양측의 의견이나 형편이 충분히 모두 고려되어야 하고 서로간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관계입니다. 주 안에 회복된 개인들의 교회로서의 삶은 더 이상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삶은 없고 오직 주님의 사역만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닌 서로의 입장과 형편이 모두 고려되는 동업의 개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회복된 개인은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만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닌 주님의 입장과 그 사역의 의미를 함께 고려하고 살피는 관심과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또한 그러하십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 촛대
일곱 촛대를 생각할 때 각각 떨어져 서 있는 일곱 개의 촛대를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로 제작된 일곱 가지를 가진 촛대를 생각할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합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치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실 때 이는 개별적 촛대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지만 위에 언급한 범 교회 pan-church의 개념으로 보면 이는 일곱 가지를 가진 촛대를 생각함이 마땅합니다. 어찌 보면 주님의 교회는 개별로 독립되어 있더라도 주님의 사역으로서의 전체 교회는 늘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러한 면에서도 일곱 가지 촛대를 생각하게 됩니다.
촛대가 아닌 등대
본래의 의미는 등대입니다. 촛대는 초의 연소로 인하여 그 형태가 축소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반면 등대는 그 안에 있는 기름이 타면서 등대 자체의 형태는 변화가 없습니다. 교회의 덕은 은혜이지 희생이 아닙니다. 초가 타면서 축소되어가는 것은 희생을 보여주고 거기에는 결국 자신의 의가 등장하게 되지만 등대는 그대로 있고 오직 기름이신 말씀으로 주님의 빛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므로 교회는 마땅히 등대로 상징되어져야 합니다.
성소 안의 일곱 등대
범 교회로서의 일곱 등대는 성소 안에 비치된 성물 중 하나입니다. 성소가 그리스도 자체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면 그 안에 있는 등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의 외적 사역을 나타냄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등대는 빛을 비추는 도구입니다. 이 역할은 “이기는 자”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이기는 것은 곧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빛을 비추는 것은 대상을 꺾고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비추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회복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빛은 빛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비춤으로 그 의미를 얻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회성의 실적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한 상태를 만들어 그 상태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것은 한 번 이겼음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닌 지속적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결국 충만함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