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문학관 글 : 한국수필작가회
위치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에 있다.
[개설]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여 시인의 발자취를 오래도록 기리고, 지역민과 문학인들을 위한 문학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 선생의 선양과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시인이 20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하여 시인의 삶과 문학과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되었다.
구상 시인은 본적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이며,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한 후 20여년간 이곳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에 칠곡군은 2002년 왜관읍에 구상문학관을 건립, 헌정하였다. 이에 구상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2만 3천여권의 도서와 자료를 기증하였다. 구상문학관은 개관 이후 칠곡군 지역민들을 위한 문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칠곡문인협회의 모임이나 행사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최근에는 구상문학관 내의 문학세미나 교실에서 만난 문학동인들(시나루, 언령, 꽃자리)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문학관의 시설 규모는 부지 면적이 1,611㎡(487.33평)이고 건물 연면적은 699.87㎡(211.71평)이다.
☞구상의 대표작품 : 1946년 동인지 시집 응향(凝香) 시 '밤', '여명도(黎明圖)' 발표.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이 남다른 시인 구상은 일상을 사랑하고, 가족은 물론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을 아끼고, 깊은 하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박정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여서 관계가 부각되었을 뿐 오히려 절친은 화가 이중섭, 시인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마해송, 걸레 스님 중광 등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인(奇人)이어서 구상은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들과 사귀는 즐거움을 알았다.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비(非)규격품인 기인(奇人)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재미도 주지만 거리에 청량감을 주는 살수차 역할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나의 생애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칠죄의 연못을 휘저어 온
모험과 착오의 연속,
나의 심신의 발자취는
모과 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다.
예서 앞길이 보이지 않기론
지나온 길이나 매양이지만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모과옹두리에 사연이’ 중에서)
유명한 신앙에세이 <그리스도 폴의 강>(1978년), <나자렛 예수>(1979년)가 출간된 것도 이 시기였다. <영원 속의 오늘>(1976년), <우주인과 하모니카>(1977년)도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 이 시기에 구상은 역사현실에서 빠져나와 관상적 세계에 몰두한다.
구상은 왜관을 떠나 한강이 보이는 여의도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며 서재의 이름을 ‘관수재’(觀水齋)라 짓고 ‘관수세심’(觀水洗心)에 몰두했다. 구상은 <그리스도 폴의 강> 프롤로그에서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라고 썼다. 이어 “당신의 그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을 흉내라도 내 가노라면, 당신이 그 어느 날 지친 끝에 고대하던 사랑의 화신을 만나듯, 나의 시도 구원의 빛을 보리라는 그런 바람과 믿음 속에서 당신을 따라 강에 나아갑니다”라고 적었다. 구상에게 강은 인생의 배움터였다.
강은
과거에 이어져 있으면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강은
오늘을 살면서
미래를 산다.
강은
헤아릴 수 없는 집합(集合)이면서
단일(單一)과 평등(平等)을 유지한다.
강은
스스로를 거울같이 비춰서
모든 것의 제 모습을 비춘다.
강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한다.
강은
그 어떤 폭력이나 굴욕에도
무저항(無抵抗)으로 임하지만
결코 자기를 잃지 않는다.
강은
뭇 생명에게 무조건 베풀고
아예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
강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스려서
어떤 구속(拘束)에도 자유롭다.
강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무상(無常) 속의 영원을 보여 준다.
강은
날마다 판토마임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 (구상, ‘강 16’)
그는 ‘신비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고,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고 고백한다(‘강 20’). 구상이 의식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어에는 자괴감이 끝없이 반추된다. 그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은 이렇듯 단명(短命)한 것인가” 한탄한다(‘강 27’). 그리고 강에서 내면의 평화를 희망한다.
한방울의 물로
강이 되어 흐르는
나는, 이제 내가 없다.
그렇듯 나를 꿈꾸게 하고
그렇듯 나를 절망하게 하고
그렇듯 나를 달뜨게 하고
그렇듯 나를 외롭게 하고
그렇듯 나를 불안하게 하고
그렇듯 나를 비치게 하던
내가 쓰러지고 없고
오직 흐름일 뿐이다.
그러나 비로소 나는
천연의 질서와 자유와
그 평화를 누린다. (구상, ‘강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