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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 묘비, 묘표, 묘갈, 신도비 >
-비석(碑石)
비석(碑石)이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 비(碑), 빗돌, 석비 등 여러 말이 있다. 그리고 비석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사당 문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 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구덩이 안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墓壙)(무덤구덩이)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 아닌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한 말기나 후한 초의 일이다. 우리나라는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은 대개 비신과 이수(螭首), 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이수(螭首)의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또는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비액(碑額), 돌기둥, 돌계단, 인장(印章), 종(鐘), 솥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碑額)의 이수(螭首)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지금의 이수와 비신(碑身), 귀부(龜趺)를 가진 비석 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한 건 중국 당나라 때이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비석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당나라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비석을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 비석의 양식이 통일신라에 수용되어 한국의 비석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형태의 비석이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비석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비석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묘비(墓碑)
무덤의 상석(床石) 우측에 세우는 비로, 아래에 농대(籠臺) 또는 반석(盤石), 그 위에 비신(碑身), 맨 위에 가첨석(加檐石)을 얹고, 특별한 경우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얹고 이수(螭首:뿔없는용, 새끼용)를 얹는다. 비신에는 사자(死者)의 관직, 본관,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장지 등을 기록한다. 요즈음은 가첨석이 없고 본관 ·성명, 생몰연월일, 자손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묘표(墓表)
무덤앞에 세우는 푯돌(표석(表石) 문체가 비갈(碑碣)과 비슷하다.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는 모두 뜻이 다르지만 명대(明代) 이후로는 모두 합쳐 묘표라 부른다. 천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석이고, 빈표는 장사지내지 않았을 때 세우는 표석이며, 영표는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 세우는 표석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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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내용으로는 죽은 이의 성명, 자호, 관향, 선조, 현조(顯祖), 부모, 생졸연월일, 처, 자녀, 손증의 선계 손록과 죽은 이의 행적, 찬자의 송사(頌辭), 묘소, 찬자의 성명 등이 수록된다. 그러나 찬자에 따라서 기술하는 순서가 다르다. 한정적 공간에 글을 새겨 넣어야 하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내용의 골자만을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내용면에서는 자료적 가치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묘갈(墓碣)
‘묘갈’과 ‘묘비(墓碑)’는 본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묘갈은 형태가 둥글고 묘주(墓主)의 품계가 5품 이하로 본래는 구분되었으나 후대에 와서 서로 통용되었다. <후한서 後漢書> 주(注)에 “네모진 것이 비(碑), 둥근 것이 갈(碣)이다.” 하였다. 비의 체재(體裁)는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소박하고 고상하다.
묘갈은 엄정한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이의 방명(芳名 : 이름, 좋은 평판)을 후세에 유전시키려는 것이 사명이므로, 객관적 시각에서 한 개인의 진실 된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사가의 열전(列傳)과는 다르게, 나쁜 것은 빼고 좋은 점만을 기록하는 속성이 있어 내용면에서 재료적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神道)라고 하여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중국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신도비가 태조의 건원릉신도비와 세종의 영릉신도비등 초기 왕릉에만 있으며, 이후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반면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증직, 贈職)으로 정2품 이상인 경우에 세울 수 있었다. 비의 크기를 보면 높이가 네 척 정도부터 일고여덟 척되는 큰 비까지 있어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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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成氏 始祖 中尹公 墓表**
유아(惟我 )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의 휘(諱)는 인보(仁輔)이고 위계(位階)는 중윤(中允)이다. 근안(謹按) 하건대 오성(吾成)은 고려중엽(高麗中葉)에 발상(發祥)하였으며 동방성씨록(東方姓氏錄)의 저성(著姓)에 들어 있다. 그의 시말(始末)은 기송무징(杞宋無徵)이며 관휘(官諱)는 성원고보(成原古譜)에서 전래(傳來)되어 창녕호장(昌寧戶長)에서 중윤(中尹)이 되셨다는 것이다.
십구세손(十九世孫) 초선 경연관 근묵(抄選 經筵官 近黙)이 성씨세대연표총론(成氏世代年表總論)에서 시조 중윤공(始祖 中允公)의 연대(年代)는 불가고(不可考)나 현손 문정공 여완(玄孫 文靖公 汝完)의 생년(生年)인 고려 충선왕 원년(高麗 忠宣王 元年) 기유(己酉) 서기1309년(西紀一千三百九年)에서 소급추산(遡及推算)하여 갑자년(甲子年)을 기년(紀年)으로 한다면 아마도 인종 22년(仁宗 二十二年) 갑자(甲子) 1144년(一千一百四十四年)을 그의 세대(世代)로 추정(推定)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윤공(中尹公)의 생년(生年)을 밝히려는 첫 시도(試圖)였으며 후일(後日)의 고증(考證)에 좋은 참고자료(參考資料)가 될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건국초기 918년(建國初期 九百十八年)에는 민심수습책(民心收拾策)으로 지방호족(地方豪族)에게 호장 부호장(戶長 副戶長) 등의 향직(鄕職)을 수여(授與)하여 지방자치(地方自治)의 임무(任務)를 맡겼다.
권매헌행장(權梅軒行狀)에 장민자칭호장(長民者稱戶長)이라고 한 것은 이때의 향직호장(鄕職戶長)을 이른 것이다. 점차(漸次) 나라가 안정(安定)되자 성종2년(成宗二年) 계미(癸未) 983년(九百八十三年)에 지방관제(地方官制)의 정비(整備)에 이어 주군향리직(州郡鄕吏職)을 고쳐 호장 부호장(戶長 副戶長)을 향리(鄕吏)로 격하(格下)해버렸다. 이로부터 호장(戶長)은 고을의 수리(首)吏가 되었다.
수연(雖然)이나 일찍이 김점필재(金佔畢齋)는 저명(著名)한 고려호장가(高麗戶長家)는 혁세관면(奕世冠冕)으로 해동갑족(海東甲族)이 되었다고 기린 바가 있다. 세원적일(世遠蹟逸)하여 표덕(表德) 강몰(降歿) 배위(配位)는 불전(不傳)이다. 보록(譜錄)에 의하면 공(公)은 정조호장(正朝戶長)인 조정사(朝正使)로서 왕(王)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드리러 송경(松京)에 가셨다가 병몰(炳歿)하시니 아들 문하시중 송국(門下侍中 松國)이 천리부시(千里負屍) 환향(還鄕)하여 기이(奇異)한 수군(獸君)의 점지(占地)로 이곳 맥산 해좌지원(麥山 亥坐之原)에 안장(安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시중공(侍中公)은 천하대효(天下大孝)로 드러나서 물계 대천 양서원(勿溪大川兩書院)에 주향(主享)되어 있고 사행(事行)은 효행록(孝行錄)에 상세(詳細)히 실려 있다. 장손 공필(長孫 公弼)은 추봉 봉익대부 판도판서(追封奉翊大夫 版圖判書)이고 차손 한필(次孫 漢弼)은 도첨의문하찬성사(都僉議門下贊成事)이며 가전유문(家傳遺文)에 두 분은 남달리 훈지상화(壎篪相和)하였다고 적혀있다.
증손(曾孫)에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 군부(君阜)는 시랑(侍郞), 군백(君百)과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이다.
현손(玄孫)에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 여완(汝完)은 정당문학상의 창녕부원군 , 호 이헌, 시 문정(政堂文學商議 昌寧府院君 號 怡軒 諡 文靖), 준득(準得)은 총부상서 예문관제학, 호 동고(摠部尙書 藝文館提學 號 東皐), 유득(有得)은 좌정승(左政丞), 윤득(允得)은 지신사밀직부사(知申事密直副使), 이(履)는 검교문하시랑 우문관태학사(檢校門下侍郞 右文館太學士), 저(貯)는 밀직사선부전서(密直司事選部典書)이다.
오세손(五世孫)에 기(紀)는 판서(判書), 석린(石璘)은 영의정부사 창녕부원군, 호 독곡, 시 문경(領議政府事 昌寧府院君 號 獨谷 諡 文景), 석용(石瑢)은 기백개성유후 보문각대제학, 호 회곡, 시 문숙(畿伯開城留後 寶文閣大提學 號 檜谷 諡 文肅), 석연(石珚)은 에조판서겸수문전대제학, 호 상곡, 시 정평(禮曹判書 兼 修文殿大提學 號 桑谷 諡 靖平), 석번(石璠)은 낭장(郎將), 연(連)은 판사(判事),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 이고려충신망복수의,
시 정절(寶文閣直提學以高麗忠臣罔僕守義 諡 貞節), 태준(台俊)은 사인(舍人), 사준(士俊)은 좌랑(佐郞), 갑신(甲臣)은 평리評理), 을신(乙臣)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언신(彦臣)은 지임주사(知林州事)이다. 이 대(代)에서 13파(十三派)를 이루어 장공예구세동거(張公藝九世同居)에 준(準)하는 화목(和睦)을 꾀하고 있다. 이 이하(以下)는 번불록(繁不錄)한다.
여경유조(餘慶遺祚)가 운잉(雲仍)에게 미쳐 대배(大拜) 복상미배(卜相未拜) 문형 호당 남대 초선 경연관 청백리 공신 증시 봉군 종묘배향 승무 충신 효자 유현 문장 서화가 명장 등단 문무제곤 불조 정려 향사원 사마 문무과급제자(文衡 湖堂 南臺 抄選 經筵官 淸白吏 功臣 贈諡 封君 宗廟配享 陞廡 忠臣 孝子 儒賢 文章 書畵家 名將 登壇 文武制閫 不祧 旌閭 享詞院 司馬 文武科及第者) 등등이 기려불억(其麗不億)으로 배출(輩出)되어 우리나라굴지(屈指)의명벌(名閥)이되었다.
을유 광복(乙酉 光復) 이후(以後)에도 각 분야에서 연면부절(連綿不絶)로 문중(門中)을 빛내고 있거늘 이 어찌 공(公)의 음덕(蔭德)의 발로(發露)가 아니리오. 현종15년(顯宗十五年) 갑인(甲寅) 1674년(一千六百七十四年)에 외예(外裔) 지현(知縣) 이파공(李坡公)이 수갈(竪碣)한 이래로 세구퇴휴(歲久頹虧)하고 그 규모(規模)가 너무도 미미(微微)하여 제예(諸裔)가 개비(改碑)할 것을 누차(屢次) 발의(發議)하였다.
입신도비 100주년(立神道碑 百周年)을 기(期)해서 이번에 묘역(墓域)을 보수(補修)하고 여러 가지 의물(儀物)을 갖추어 드디어 궁비(穹碑)로서 개수(改竪)하게 되었다. 오호(嗚呼)라 이비문(螭碑文)에 공(公)은 높은 덕행(德行)과 쌓인 인공(仁功)이 당처럼 두터웠고 바다처럼 깊었는데도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고 서술(敍述)되어있다. 참으로 통탄(痛嘆)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절념(竊念)컨대 자천우지(自天祐之)로 그의 잠덕유광(潛德幽光)이 반드시 천지간(天地間)에 현양(顯揚)되어 우리 성문(成門)의 앞날에 새로운 장(章)이 열릴 날이 있을 것이다. 불녕(不佞)은 불인천학(不仁淺學)하여 훌륭하신 조선유선(祖先有善)의 10중 2, 3(十之二三)도 전(傳)하지 못했으나 이로써 중윤공(中尹公)의 묘비음기(墓碑陰記)로 삼는 바이다.
西紀 二千五年 乙酉 五月 三十日
二十三世孫 樂善 謹識
二十七世孫 奎萬 謹題
大宗會長 二十三世孫 樂友 監役
昌 寧 成 氏 大 宗 會 謹竪
-註 : 原文은 始祖公의 職銜이 中尹인데 中允으로 修訂하였다. 시조(始祖)의 구묘표(舊墓表) 외손 이파(外孫 李坡)가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있을 때 1674年(顯宗15年) 갑인(甲寅)에 시조(始祖)의 묘표(墓表)를 세웠는데 “시조고려중윤성공인보지묘(始祖高麗中允成公仁輔之墓)”라고 각자(刻字)하였다.
편집: 성범모(경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