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려 문하시중 成松國(二世 )]
*요약 : 고려 중엽 이후 1219년경 出生 하셨고 관(官)은 군기감, 문하시중(軍器監, 門下侍中)이시다.
효행이 뛰어나게 지극 하였으며 부친(父親, 성인보)이 조정사(朝正使)로서 신년하례(新年賀禮)를 드리기 위하여 송경(宋京)에 갔다가 병으로 별세하셨다. 公은 천리 먼 길을 부친의 시신(屍身)을 지고 고향인 창녕까지 와서 맥산에 모셨다.
公(侍中公 諱 松國)이 천리의 먼 길을 시체를 지시고 고향인 창녕으로 오시는데 창녕(昌寧)의 청산원(靑山院, 지금의 고암면 어은에 위치한 주막 만댕이)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원(院)의 문밖에서 가숙(假宿) 하셨는데 밤에 갑작이 큰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범의 발자국이 시체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앞산으로 간 것이 있었다. 이상히 여겨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지포(池浦) 뒷산머리에 이르러 그쳤는데 그곳에만 눈이 녹았으며 넓이가 자리 하나 깔만하였다.
마침내 이곳에 장례를 모시니 창녕현(昌寧縣) 맥산(麥山)으로 해좌사향(亥坐巳向)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천신(天神)을 감동(感動) 시켜서 대지(大地)를 얻었고 자손이 대대로 현달(顯達) 하였다고 한다. 公이 별세하시고 미쳐 장례(葬禮)를 치르지 못했는데 산사(山寺)의 중이 찾아왔다. 여러 상제들이 매우 공경히 접대하자 중은 그 의(義)에 감동하여 왜 아직까지 장례(葬禮)를 모시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장지(葬地)를 구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중이 한 혈(穴)을 지점(指點)해 줌으로서 장례(葬禮)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경남 창녕군 이방면 대곡리 우항산(慶南 昌寧郡 梨坊面 大谷里 牛項山) 인좌(寅坐)이다. 이곳은 영남(嶺南)의 삼대명당(三大明堂)중의 하나라고 한다.
1616年(光海君 8年) 병진(丙辰)에 후손 진선(後孫 晉善)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어 묘소(墓所) 앞에 비(碑)를 세우고 비문(碑文)을 찬(撰)하였다. 1789年(正祖 13年) 기유(己酉)에 산 아래에 사는 자손들이 노상, 노하파(路上, 路下派)가 별파(別派)라고 한 것을 협의하여 비(碑)를 개수(改立)하였는데 후손인 참판 덕조(參判 德朝)가 중각(重刻)에 대한 후면에 식문(識文)을 지었으며 후손 종인(種仁)이 글씨를 썼다.
1906年(高宗 42年) 을사(乙巳)에 신비(新碑)를 개립(改立)하고 진선 후인 정운(晉善 後人 廷運)이 비문(碑文)을 찬(撰)하였다. 건국(建國) 후 1956年 병신(丙申)에 또 다시 새 비를 세웠는데 후손 기덕(耆悳)이 찬(撰)하고 한영(漢永)이 썼다.
후손 참의 환(參議 瑍)이 公의 사실을 부연(敷衍)하여 십도(十圖)를 만든 다음 찬문(贊文)을 짖고 성시중공 효행록(成侍中公 孝行錄)이라 이름 하였다. 1732年(英祖 8年) 임자(壬子)에 발행하여 세상에 내 놓았으며 후손 인호(麟鎬)가 추보(追補)하여 1900年(高宗 37年) 경자(庚子)에 재간(再刊)하였다.
창녕(昌寧)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주향(主享)되셨다.
1712年(肅宗 38年) 임진(壬辰)에 창효사(彰孝祠)를 물계(勿溪)의 위에 세웠는데 1729年(英祖 5年) 기유(己酉)에 사당(祠堂)을 서원(書院)으로 만들고 판중추부사 이복원(判中樞府事 李福源)이 원정비문(院庭碑文)을 찬(撰)했으며 군수 조윤형(郡守 曺允亨)이 썼다. 또 영천 대천동(永川 大川洞)에 배향(配享)되었다.
註 : 松京: 조선 때 이후, 고려의 서울이던 개성(開城)을 일컫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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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항산론(牛項山論)]
(주:우항산론은 성송국(2세)선조님의 묘소에 대한 풍수적 해설이다. )
[창녕읍(昌寧邑) 서쪽 우항산(牛項山) 기슭 인좌(寅坐)인 묘혈(墓穴)은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성공(成公)의 산소(山所)인데 공(公)의 휘(諱)는 송국(松國)이다.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중윤 호장(中允 戶長)인 휘 인보(諱 仁輔)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는 바로 公의 아버지이다.] (본문 중에서 ...)
우항산(牛項山論)은 화왕산(火旺山)에서 처음 한 줄기가 떨어져 나와 시조墓의 주산(主山)이 되었고 꾸불꾸불 저하(低下)하여 평강룡(平康龍)으로 가다가 중간에 山하나가 높이 솟으니 이름은 태백산으로 학(鶴)이 여러마리 닭 속에 서 있는 학립계군격(鶴立鷄群格)이 된다.
서쪽으로 10여리를 가면 용세(龍勢)가 지자(之字) 현자(玄字)로 굴곡하여 주사(蛛絲) 마적(馬跡) 봉요(蜂腰) 학슬(鶴膝) 등과 같은 貴格을 모두 구비하였다. 우항산에 이르러 평지로 크게 끊겼다가 건너가 산이 되어 迎送하는 情이 있는 듯하다.
주성(主星)이 돌기(突起)하였는데 太陽이 금체(金體)이며 靑龍 白虎가 감쌌고 한 가운데 주혈(主穴)은 짧은 유체(乳體)로 되었다. 청룡의 한 줄기가 아래 水口를 꽉 막았고 명당이 평탄하며 內案은 단정하고 外案은 앞을 향한 봉우리들이 총총히 벌려있는데 옛부터 術者들은 臥牛形 火草安이라고 한다.
오른쪽 물은 서북의 산꼴짝에서부터 합류하여 명당 앞에 이르고 왼쪽물은 시조墓 앞에서부터 십여리를 흘러 내려와 本山의 큰 국내(局內)에 이른 다음 청룡 머리를 감싸고 거슬러 올라와 명당 앞에 이르러 오른쪽 물과 합해서 질펀하게 停蓄하고는 비로소 남쪽으로 흐르는데 몇번이나 굽었는지 알 수 없게 굽이굽이 흘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術者들은 이 때문에 盤龍水라고 하고 외쪽물이 流逆하여 명당으로 오기 때문에 朝宗水라고도 한다.
중국사람 두사충(杜思沖)과 승려 성지(性智)는 이 산을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영남에 명당 세곳이 있는데 여기가 그 하나이다. 자손이 마땅이 天地와 함께 무궁할 것이다.”
하였다.
산세는 임감(壬坎)에서 출발하여 중간에 행한 것은 동서남북에 침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우항산에 와서는 을진행맥(乙辰行脈,동남동)에 갑묘입수(甲卯入首,동쪽)로 인좌신향(寅坐申向 동북동- 서남서)이며 술득수(戌得水, 서북서) 정파(丁破,남남서)이다. 시중공 산소 좌변부터는 본향의 宗人이 선대 兩憤을 썼다 . (출처:창녕성씨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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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高麗門下侍中昌寧成公松國墓碣文(三次改竪)]
창녕읍(昌寧邑) 서쪽 우항산(牛項山) 기슭 인좌(寅坐)인 묘혈(墓穴)은 고려(高麗)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성공(成公)의 산소(山所)인데 공(公)의 휘(諱)는 송국(松國)이다.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중윤 호장(中允 戶長)인 휘 인보(諱 仁輔)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는 바로 公의 아버지이다.
公이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겼었는데 중윤공(中尹公)이 타향(他鄕)인 송도(松都)에서 별세(別世)하시자 직접 시신(屍身)을 지고 천리(千里)나 되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다가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니 해가 저물고 눈이 많이 내려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院)의 사랑에서 유숙(留宿)하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범이 그 곁을 여러 번 맴돈 흔적(痕迹)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발자국을 따라 맥산(麥山)에 이르니 발자국도 멈추고 눈이 녹았는데 넓이가 산소(山所) 한자리쯤 되었다.
그 곳을 표시(表示)해 놓았다가 이곳에 안장(安葬)하니 사람들은 지극한 효성(孝誠)의 감응(感應)이다 하였다. 사림(士林)들이 추모(追慕)하여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모셨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공필(公弼)은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한필(漢弼)은 도첨의 문하찬성사(都僉議 門下贊成事)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혜암(惠巖)은 대선사(大禪師)였고 군미(君美)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이며 군부(君阜)는 중낭장(中郎將)이었다.
찬성(贊成)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군백(君百)은 광정대부 문하평리(匡靖大夫 門下評理)였고 군보(君補)는 문하평리(門下評理)였다. 총랑(摠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충(漢忠)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여완(汝完)은 부원군(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중낭장(中郎將)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준득(準得)은 총부상서(摠部尙書)였고 유득(有得)은 정승(政丞)이었으며 윤득(允得)은 지신사(知申事)였다. 광정대부(匡靖大夫)의 아들 이(履)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었으며 평리(評理)의 아들 저(貯)는 선부전서(選部典書)였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의 아들 기(紀)는 판서(判書)였고 부원군(府院君)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석린(石璘)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고 석용(石瑢)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석연(石珚)은 이조판서(禮曹判書)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며 석번(石璠)은 낭장(郎將)이었다. 상서(尙書)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연(連)은 판서(判事)였고 준(遵)은 중서시랑(中書侍郞)이었다.
정승(政丞)의 아들 사제(思齊)는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시호(諡號)는 정절(貞節)이다. 지신사(知申事)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태준(台俊)은 사인(舍人)이었고 사준(士俊)은 좌랑(佐郞)이었다. 시랑(侍郞)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갑신(甲臣)은 평리(評理)였고 을신(乙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전서(典書)의 아들 언신(彦臣)은 지림주사(知林州事)였다.
아! 근원(根源)이 깊어 파류(派流)가 길고 뿌리가 견고(堅固)하여 지엽(枝葉)이 무성하다. 대대로 훌륭한 전통(傳統)을 이어받아 끊이지 않아 정승(政丞)이 五名, 문형(文衡)이 二名, 호당(湖堂)이 五名, 장군(將軍)이 一名이었다. 종묘배향(宗廟配享)이 一名, 문묘배향(文廟配享)이 一名, 사(祠)와 원(院)에 배향(配享)된 분이 三十四名이다.
공신(功臣)에 봉(封)해지고 봉군(封君)을 받으며 시호(諡號)를 받고 정려(旌閭)를 받은 분은 다 열거(列擧)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이 어찌 公이 음덕(陰德)을 쌓은 결과(結果)가 아니겠는가.
옛날 광해군 병신년(光海君 丙申年)에 후손 경상감사 진선(後孫 慶尙監司 晋善)이 처음으로 묘표(墓表)를 세웠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이지러졌으므로 건릉(健陵) 기유년(己酉年:正祖十三年)에 본향(本鄕)의 여러 자손(子孫)들이 다시 세우고 참판 덕조(參判 德朝)가 음기(陰記)를 지었다.
그러나 너무 소략(疏略)하여 모두들 다시 세웠으면 하였다. 오래 상의한 끝에 결정하여 마침내 새 비석(碑石)을 세우고 구첩(舊牒)을 의거(依據)하여 위와 같이 음기(陰記)를 쓴다.
二十四世孫 耆悳은 삼가 撰함 一九五六年丙申十月 세움
註 - 成耆悳 : 貞節公派 一八八四年生
碑原文에는 “二十四世孫 成耆悳 謹撰”이란 文句가 없는 것을 口傳에 依해 記錄하였다 함
註 - 原文(원문)에는 중윤호장(中尹戶長)인 휘 인보(諱 仁輔)인데, 중윤호장(中允戶長)인 휘 인보(諱 仁 輔)로 수정(修訂)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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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정리, 편집 : 성범모/ 경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