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 에 따르면, "성(成)씨는 주문왕(周文王)의 일곱째 아들인 성(郕)나라 숙무(叔武)의 후손이다. 자손들로 인하여 나라를 氏로삼았는데 뒤에 초(楚)나라에게 멸망되자 고을 읍(邑)을 떼고 成氏가 되었다. 시조인보의 아버지는 숙정(叔正)으로 신라때 대관을 지낸 성저(成貯)의 후손이다."라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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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문왕 희창> 주 문왕(周 文王,기원전 1152년~1056년)은 중국 상나라 말기 주(周) 씨족의 수령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이다. 둘째 아들인 서주 무왕이 주나라를 세운 후 문왕으로 추숭했다. 후세에선 도통(道統)의 전인(傳人)들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생애> - -상나라 말기에 서백(西伯)이 되었고, 이 때문에 백창(伯昌)으로 일컫기도 한다. 임용(任用) 태전(太顚), 산의생(散宜生) 등의 유능한 사람들을 등용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니 국력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이는 제신이 꺼리는 바가 되어 유리(羑里)에 갇히게 되었다. 수금된 기간 동안, 주역 일서(一書)를 써냈다. 이후에 유신씨(有莘氏)의 딸과 려융(驪戎) 문마(文馬) 등 보물을 바치고 조정 신하들과 소통하여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우(虞), 예(芮) 두 나라의 쟁단을 해결해 주었고, 병사를 내어 견융(犬戎), 밀수(密須), 려(黎), 한(邗)을 공격했고, 또한 숭(崇)을 쳐 멸했다. 풍읍(豐邑, 지금의 산시성(陕西省) 후이구(户县))을 수도로 정했으며, 세력을 넓혀 장강, 한수, 여수(汝水) 등의 유역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상나라를 멸망시킬 준비를 한 것으로 전해오는 말로는 그의 만년에 이미 셋으로 갈라진 천하 중 둘을 취한 국면이었다고 한다.
문왕은 임종 시에 둘째 아들인 서주 무왕을 불러 서둘러 상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라고 당부했다. 전해오는 말로는 현재 통용되는 주역 및 후천팔괘(後天八卦, 또는 문왕팔괘(文王八卦))가 모두 문왕의 저서라고 한다. 문왕은 본래 음주를 좋아하여 술병 천 개를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무주를 세웠을 때 스스로 무씨(武氏) 가문은 문왕의 후대라고 일컬었고, 이에 문왕을 시조(始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숭했다.
유교의 고전인 주역의 괘사(卦辭)를 지었으며, 복희 선천 팔괘를 연역(演易)하여 문왕 후천 팔괘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후대에 문왕을 찬미하기 위한 서술로 지적된다. 오늘날에는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문왕, 주공, 공자가 주역을 나누어 지었다는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 에 따르면, "당나라 때에 학사(學士) 성경(成鏡)이 있었는데 상곡(上谷) 사람으로서 동쪽 조선(朝鮮)으로 건너왔다. 그후 백제에는 성충(成忠)이 있었고 신라에는 성저(成貯)가 있었는데 모두 절의 또는 관벌로 한 시대에 드러났다. 고려때에 휘(諱) 숙창(淑昌)이란 분이 계셨는데 벼슬은 호장부정(戶長副正)이었다. 호장부정(戶長副正)이란 바로 옛날의 원외랑(員外郞)인데 이분이 휘(諱) 인보(仁輔)를 낳으시니 벼슬은 중윤호장(中尹戶長)이었다."라고 적혀있다.
먼저 [국조문헌비고(國祖文獻備考)]부터 검토하자,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문왕(文王)의 처인 태사(太姒)가 백읍고(伯邑考)를 낳고, 다음으로 무왕발(武王發), 관숙선(管叔鮮), 채숙도(蔡叔度), 성숙무(郕叔武), 곽숙처(霍叔處), 주공단(周公旦), 조숙진탁(曹叔振鐸), 강숙봉(康叔封), 담계재(聃季載) 를 낳았다"고 하며, [사기-관체세가(史记-管蔡世家)]에 따르면 "무왕(武王)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10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태사(太姒)라고 했다。
문왕(文王)의 정비(正妃)이다. 그 장자가 백읍고(伯邑考), 다음이 무왕발(武王发), 관숙선(管叔鲜), 주공단(周公旦), 채숙도(蔡叔度), 조숙진탁(曹叔振铎), 성숙무(成叔武), 곽숙처(霍叔处), 강숙봉(康叔封), 염계재(冉季载)이다. 염계재가 가장 어렸다."다고 하여 숙무가 문왕의 일곱째 또는 다섯째로 기록하고 있다.
[국조문헌비고]에서는 [사기]의 내용을 따라서 기록한것으로 보이며, 숙무는 무왕의 친동생인것이 확실하다. 숙무는 본래 주족처럼 희씨(姬氏)였으며, 자(字)는 광숙(邝叔)이고, 백작(伯爵)이었기때문에 성백(郕伯)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그림1:郕나라 伯爵 姬叔武>
다음으로 주나라의 종족특성을 살펴보자. [맹자(孟子)]에서는 주문왕을 서이(西夷)사람이라고 적었고, [사기(史記)]에서는 그 선조가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嫄)의 아들 후직(后稷)이라고 했다. 유태씨는 동이족의 조상인 염제열산씨(炎帝烈山氏)의 후예라 한다. 곧, 주족(周族)은 부계는 서이이고, 모계는 동이로 생각된다. 동이의 홍산문화(紅山文化)와 서이의 감숙성(甘肅省)유적은 모두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부근에서 시작되었다.
또, 후직의 증손 공유(公劉)는 종족들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전신인 융적(戎狄)들 땅으로 유랑하여 그 뒤로 8대 300여년 동안 융적의 풍습을 따라 그들과 이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300여년을 흉노풍습을 따랐다는 것이다. 공유의 9세손 고공단보(古公亶父)때부터 정착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고공단보는 뒤에 주나라 태왕(周太王)이라 추존되었고, 그 손자가 주나라 문왕(周文王) 곧, 서백(西伯) 창(昌)이다.
[성나라의 위치] 를 살펴보자. [사기-관체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성숙무(成叔武)는 문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동생으로서,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후 성(成)에 봉해졌다. 成은 郕, 盛으로도 표기하는데, 동한(东汉)시대 성양현(郕阳县)을 옛날의 성백(郕伯)의 나라라고 했다. 지금에 산동성(山东省) 범현(范县) 근방이다." 라고 했고, [백가성(百家姓)]에서는 이곳을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녕양현(寧陽縣) 동북지방으로 고증하고 있다. 지도에서 Cheng이라고 표시된 나라이다. 강태공(姜太公)의 제(齊:Qi)나라와 주공단(周公旦)의 노(魯:Lu)나라 사이에 위치했었다.
성나라는 서주시대 말기쯤에 초(楚:Chu)나라에게 멸망되고, 이후 성씨들은 뚜렷한 근거지 없이 생활하였다. 한무제(漢武帝)때 [사기(史記)]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성기(成己)라는 대신(大臣)이 있었다고 하고 [북량록(北凉錄)]에는 같은 시기에 옛 흉노부락 도격족(屠格族)에도 성씨가 분포했다고 하여 중국변방으로 진출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성씨가 번창하게 된 것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기에 이르러서 인데, 각각 하북회래(河北懷來)와 하남복양(河南濮陽)에 큰 취락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회래지역 성씨들이 상곡군망(上谷郡望)을 형성하게 된다. 백가성(百家姓)에는 상곡군만을 언급했는데, 복양지역 성씨들은 동군군망(東郡郡望)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승인무학전(僧人無學傳)]에 따르면 우리나라로 건너온 성경(成鏡)이란 학사가 상곡인(上谷人)이므로 상곡군망만을 살펴보자.
[백가성(百家姓)]에 기록된 "상곡군(Shanggu)" 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군제(统一郡制)로서, 성씨(成氏)가 속했던 상곡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张家口)인데, 작은 오대산(小五台山) 동쪽, 적성(赤城)과 북경시 연경현(延庆县) 서쪽, 만리장성 안쪽(內長城)과 북경시 창평현(昌平县) 북쪽에 이르는 곳으로 가칭 "상곡군"이라 했다고 한다. 북위(北魏)는 잘 알려진 바와같이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였다. 성씨가 번창한 때는 공교롭게도 이 시기였다.
선비족은 수당(隨唐)시대를 거쳐 대부분 한화되어 없어진 종족들이다. [백가성]이 편찬된 시기가 북송(北宋)때이니까 아마도 남북조시기부터 북송시대에 걸쳐서 성씨들은 상곡에 모여살았나보다. 성경은 당나라때 우리나라로 건너온다. 박시인님의 [알타이神話]에서는 상곡은 우리나라말 '수리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섬서성 북부인 상군(上郡:Shang)도 '수리고을'로서 같은 의미라고 했다. 흉노가 강성하던 시절 선우(單于)는 용성(蘢城:Longcheng)에 있고, 태자인 좌현왕(左賢王)은 상곡에, 우현왕(右賢王)은 상군에 거처했다고 한다. 용성은 몽골의 허슈 채:덤(Хєшєє Цайдам)근방에 위치했다. <지도1:西周시대 郕, 지도2:秦나라때 上谷>
[승인무학전]에서는 성충(成忠)이라는 인물이 성씨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성충이 백제의 좌평(佐平)까지 올랐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성충은 백제의 중앙귀족 8대성에 들어가지 않는 데도 좌평에 올랐다. 아마도 왕족과 혼인을 한 성씨가 있었음을 추측해 본다.
오늘날 백제 8대성 중 진씨(眞氏)가 남아있는데, 진씨 역시 본래 중국의 하북성 상곡에서 기출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 서산진씨(西山眞氏)가 단본이라고 한다. [승인무학전]에서는 또 성저(成貯)라는 인물도 성씨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창녕성씨 시조 諱인보(仁輔)의 아버지는 신라 대관 저(貯)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뒤에 생존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끝으로 족보가 숭상되었던 시기가 조선시대에 와서이고 그전의 세계는 고증하기가 까다롭다는 것이 사실이다 보니 성충, 성저에서 어떻게 창녕성씨가 연계되는 지는 밝혀질 가능성이 적다. 그저 상곡인 성경이후로 한반도에 성씨가 있게 되었고, 창녕성씨는 그 중에서 명맥을 유지한 유일한 성씨(成氏)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만주족(滿州族), 몽고족(蒙古族), 조선족(朝鮮族)에게도 成氏가 있으며, 중국에는 길림성씨(吉林成氏)를 비롯해 다수의 성씨본이 존재하지만 한국에는 창녕성씨(昌寧成氏)가 단일본이다. 終
출처: 창녕성씨 용호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성종태 ---------------------------
[중국역사 문헌에 등장한 成씨 인물]
-<춘추전국이야기>/<열국지> --성득신(초나라 총사령관, 성복대전에서 참패하여 자살), 성대심, 성가(成嘉)(성득신 두 아들 ), 성호(성득신 손자)/ 성백결(사씨의 사위) -성차(成差, 진나라 장수)- 성하(成河, 秦나라 사신) -<사기세가(史記世家)> -성능군(成陵君, 위나라를 정벌한 적장(翟章)의 봉호)/ 成安君은 연나라 장수로 공손조와 함께 혜왕을 살해하였다.(燕나라:B.C. 222년 멸망)
-<여씨춘추>-성공고(成公賈) -<사기본기> -성교(成蟜)~ 진나라 진시황의 이복동생으로 추정/成 ~ 진시황 낭야순시에 수행한 인물(진시황 사망 B.C. 210년) -<사기열전(史記列傳)> -성개방(成開方, 제나라 왕의 시의(侍醫) 수(遂)는 병이들자 ~“신은 일찍이 제나라 479년 허난성 안양현 무도리(武都里)에서 성개방(成開方)이라는 자를 진찰한 적이 있다.”/ 성사(成巳, 다른 문헌에서는‘성기’라고 표기, 위만조선의 대신) /성형(成荊, 또는 成慶 전쟁의 용사)
-<혹리열전(酷吏列傳)> -성신[(成信, 관중에는 양공과 성신(成信) 등이 있었다.)] -<춘추논쟁> -성풍(成風, 문공의 조부인 장공(莊公)의 첩) -<삼국지100년도감> 성의(成宜, 조조에게 일제히 반기를 든 장군, 조조155~ 220년) <필자의견>현재 중국 成씨와 우리나라 成씨와의 연관성을 문헌상 고증하기 어렵다.
출처: 창녕成씨 유래의 문헌적 고찰 (성범모 발표문)
-------------------- < 해 설>
-1.成씨는 姓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은 없어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하던 姓이었던 듯하다. 成씨는 문헌상 중국의 유명姓.모방姓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수건교수는‘창녕成씨 유래를 독자적 稱성이나 族團수장의 고유명이 한자로 雅化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창녕에서 누대로 중앙 출사없이 살아오다가 고려중엽 한성화 과정에서 창녕성씨로 創姓 또는 稱姓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麗末이래 사족(士族)의 선대 향리 관련 자료의 연변과정을 보면 先대의 세계(世系)를 소급하다가 향리직함(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기관(記官) 등)이 나올 때 이를 버리고 그 후손 중에 관인(官人)을 택해 시조로 하는 경우가 있었다.
-3.姓씨의 시조라 함은 이 땅에 맨 처음 나타난 분이 아니다. 족보(또는 계보)에 맨 처음으로 기록된 분이 그 시조다. 각 姓씨들이 한반도에 오랜기간 동안 살았어도, 후손을 이어 왔어도 족보 등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후손들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런의미에서 볼때 시조 중윤공 성인보는 中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4.고려건국 초기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成씨도 累代로 창녕지역((밀성군(密城郡의 屬縣)) 족장(향촌)세력으로서 한성화 과정에서 ‘토성吏族(戶長層)을 시조로 한 姓貫’으로서 창녕을 本貫으로 하게 된 것이다.
成씨(토성)는 940년경 영일현(지금 영일)에 있었다. 창녕成씨 이전에도 成씨가 있었고, 통일신라 시대 九州의 武州(광주)에 成씨가 있었다. 그 당시 成씨는 단일 姓이 아니라 본관수가 많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고려시대 成氏는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 3도의 13개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5.始祖中尹公의 출생연대나 創始연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始祖公의 玄孫이 되는 이헌공(怡軒公)인 휘여완(諱 汝完)의 출생연도가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기준해서 역산해 보면 1189년(고려 明宗 19년)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創姓연대는 公의 장년성숙기인 40세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시조의 得姓은 賜姓이라든지 귀화姓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創姓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사회상으로는 벼슬이 높다든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姓을 만들었던 때였으므로 中尹公도 鄕職으로 戶長의 지위에 있었고 또한 세력있는 지방통치자의 姓을 만드는 上層에 속했을 것이고 자손들의 관계진출도 생각하여 스스로 姓을 創設했을 것이다.-
-6.成씨는 고려초기부터 존재했다고 했다. 관인 21명을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9주의 무주(광주)의 기록으로 보아 문헌상 최초 등장은 560년경(진흥와 19년, 540~576)이다. 成氏는 중앙정부에 출사하지 못하고 향촌유지로 이어져 온 것 같다. 창녕성씨 중시조 성여완(1309-1397) 이전에 고려사에 등장한 成씨(창녕成씨가 아닐 수도 있다.) 인물은 成允, 成厚, 成甫, 成國, 成一(성일)등 4명이다.
-7.창녕成씨 족보에 등재된 시조공 부터 4세 까지, 9분은‘고려사’‘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등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품계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본다.
-8.한편‘중국 주문왕의 일곱째 아들’이라는 내용에 대해 오늘에 와서 후손들이 그 명성을 훼손시켜서는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헌상 고증이 어려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기도 조금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시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향후 정확한 考證이 될 때까지는 始祖東來設을 ‘설화문학’ 차원에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처: 창녕成씨 유래의 문헌적 고찰 (성범모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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