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참예하는 위대한 원리를 한 단계씩 밟아 나아가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과 주님과의 이 기이한 동일성의 넓이, 길이, 높이, 그리고 깊이를 측량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다”(엡 5:30). 여기서 지체는 어떤 지체가 떨어져나갈 수 있는 조직을 의미하지 않는다.
흠정역에 보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말이 부연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엡 5:30).
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함축하는 바가 그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그러한 신분의 암시가 얼마나 많은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바라건대 빛들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 거룩한 전(殿)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와 그리스도가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기를 원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샘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깊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성령님의 직무는 마치 정원사가 다른 원목에 가지를 접붙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 접붙이는 과정을 길게 논술하고 있다.
바울은 거기에서 뿌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이스라엘이 나오고,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았다고 말한다.
가장 깊은 국면에서 참된 회심은 바로 이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게 올바르게 접붙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외식에 불과하고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바로 그 원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신적 지도자를 본받으려고만 하지 않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하여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벧후 1:4).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과 하나님의 후사임과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임을 증거한다(롬 8:17).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죄에 대한 깊은 반감을 일으키시며,
죄의 더러운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은 불타는 소원을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여주신 이도 같은 성령이시며, 우리를 그리스도께 매이게 하시고,
그의 신적 생명 속에 우리 생명을 뿌리박게 하신이도 성령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자라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물론 이 접붙이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자연적인 것에 대해 죽지 않으면 어떻게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살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자연에 역행하여 다른 품종의 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가지는 반드시 잘려져서 옛 생명에 대하여는 죽어야 한다.
그 가지는 새로운 원목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명을 그 원목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가지가 옛 생명과 가지 관계는 그처럼 완전하게 지속적으로 혹독하게 단절되어, 옛 생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가지는 원목과 융합시키게 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빨아들인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하는 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가 갖는 범위와 효과가 생생하게 밝혀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 신자의 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닌 더 깊은 의미를 향해 열리게 된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그 지겨운 옮무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서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다.
이제 성령께서 신자에게 하사하여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는 자기도 역시 구세주의 죽으심 가운데서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윤리적으로 죽음의 자리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인자(人子)의 십자가와 무덤 가운데 함께 참예한 대격변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 삶”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 신적 가능성을 가진 새 생명으로 들어가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인자의 죽으심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죄는 하나의 원리(갈보리의 잔인한 비극을 재촉했던 바로 그것)로서
계속해서 그의 안에서 작용하여,
어느 의미에서는 구세주를 죽인 바로 그 살인자들과 공범의 신분으로 자신을 옮겨 놓는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신자로서 “자신”의 사형선고에 서명을 하지 못한다면, 그의 신분은 전적으로 역겨운 것이 되며 모순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자기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죄에 대하여 잠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자의 존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기에 못 박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님도 우리의 승낙 없이는 십자가에 못 박힘에 우리를 참예케 할 수 없다.
우리의 승낙 없이는 갈보리라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지 못한다.
우리는 죽는 것을 승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하나님께서는 다음 한 가지 일에 분명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옛 생명을 수선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은 ”자신들을 더 낫게, 더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개념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가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옛 생명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를 보다 선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십자가 위해서 완성된 그의 전 구속 역사는 인간됨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만 그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아마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기도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으면 동행이란 한낱 희망에 불과한 것이다.
마비 박사(Dr. Mabie)는 그의 역작 “십자가”라는 저서에서 구세주의 죽음은 “불멸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 죽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감각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은 발산하는 힘 – 죄를 파괴하는 힘 – 을
모든 세대의 차가운 윤리학이나 도덕주의자들의 모든 가르침에 비교한다는 것은,
찬란한 태양빛을 별 하나의 반짝임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실로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 승리의 순간에 인자께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을 때 바위가 터지고 땅이 흔들렸다.
단순하게 생명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힘이 증가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운명의 부르짖음이 온 땅을 흔든 것이다.
마비 박사가 죽음과 부활의 중간 과정이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부활은 죽음 안에 있었고 죽음은 부활 속에 있다. 십자가의 “원동력” 아래로 들어간 신자의 옛 생명은 반드시 죽게 되고,
부활의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