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예하는 것이 함축하는 바를 한 단계씩 숙고해 들어감에 따라,
그것이 깊이를 잴 수 없는 풍부에 이르는 열쇠요, 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마법의 지팡이요,
우리가 꿈도 꿀 수 없는 행복에 이르는 하늘 관문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근본적인 태도와 관계, 우리의 사고에 일어나는 혁명을 체험하지 않고는, 또 모든 것이 진실로 새롭게 되지 않고서는
이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후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소유하시고,
우리의 사고 체계가 주님에 의하여 다스려지도록 하신다.
주님은 기도의 정신을 주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게 하신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는 전능한 힘으로 우리를 붙잡으시고 우리가 그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신다.
다음으로 숙고해야 할 단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또한 살아난 것이다.
자아에 대한 우리의 죽음은 더 크고 충만한 생명, 더 풍성한 생명에 이르는 관문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옛 생명에 임종을 고하고 그것을 무덤에 넘길 때에만, 자신이 한없이 놀라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다.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일단 죽음으로 제거되기만 하면,
하나님은 대신 우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는 진정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엡 2:4-6).
이 기이한 진리, 영광스런 진리여! 그 은혜의 보배로움, 그 능력, 그 영광, 그 의미의 부요함이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생명이 신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어떤 신자들은 아직도 어느 정도 “육적 생명”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자들조차 즐기는 이 신적 생명이 없었더라면
(어떤 이들에겐 그것이 거의 느낄 수 없는 작은 겨울 시냇물 같고, 어떤 이들에겐 그것이 마치 세찬 물결, 곧 생수의 강과 같다.
그 정도의 차이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여부, 또한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의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에스겔 46장의 솟아나는 물에 관한 환상을 참조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피조물만이 죽을 수 있다.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영혼들만이 “자아”에 대하여 죽을 수 있다.
“자아”는 “자아”를 이겨낼 수가 없다. 우리가 “육적 생명”에 대하여 죽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 누리는 정도에 비례하여 “자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충만하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에 대하여 더욱 충분히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한없는 능력에 깊이 동참하지 않고도
말씀이 명하는 신적 사랑(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순전한 자연인에게는 지렁이가 새의 흉내를 내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육적 생명”이 잔존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신약 성경의 요구조건은 그 하나하나가 신자에게 즉각적으로 위압적인 딜레마를 가져다주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신자는 순전한 자연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을 반드시 중지해야 한다.
즉 “육적 생명”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새 생명이 있다면 산상보훈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당연하고 쉽고 이미 선천적인 것이 된 원리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뿐이다.
역으로 말하면 “육적 생명”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자에게는 산상보훈이 놀라운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생치 못한 자에게는 산상보훈은 전혀 알 수도 없고 실용성도 없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을 모방한다고 해서 내가 프랑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프랑스 사람이 되려면 나는 현재의 신분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나는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끌어 무덤에 들어가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대표로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나의 옛 생명을 종결지으시고,
그가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때, 그는 나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소유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한 자로서 초자연의 영향아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