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차이
2016년 10월 23일 주일 설교에서 동네작은교회담임 김종일 목사님이 사랑의교회 강남 “마당기도회”에서 마가복음 1;9-15말씀을 기초로 “요단강, 광야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제목으로 “의미 깊은 함축성이 담긴 설교”를 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사역을 시작하셨던 곳이 바로 요단강변 광야 였음을 상기시키면서,“요단강”을 “마당“에 대비하여 마당에 서있는 성도들이 방(房)으로 돌아갈 것이냐 ”광야(曠野)“로 나갈 것이냐를 선택해야할 갈림길에 여러분들이 처해있다고 했다. 좀더 구체성을 보이기 위해 지나간 엘리야의 시대와 새로운 button touch로 이어진 엘리사의 시대로 넘어가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이곳에 모인 여러분이 처해있다고 했다. 나는 이 설교의 함축성이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교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드렸다. 그러나 분명하게 선(線)을 그려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설교인지라 듣는 성도 나름 각자 자기 좋을 대로 듣고 풀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장로님들은 어떻게 받아 드렸을까 하는 궁금한 생각이 났다. 마침 오찬 후 강남의 현역 및 은퇴, 협동장로들의 간담회에서 앞으로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과 갱신의 기본 목표등에 관한 질문이 소위 갱신주역을 담당하고 있는 당회원들에게 제기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우회적 답이라고 할까 또는 앞으로 갱신모임의 진로 대책의 모색을 찾도록 하기위한 실마리를 얻기위해, 내가 좀 주제넘긴 하지만 “오늘 설교말씀의 내용과 그 함축된 의미에 대해 장로님들이 각자 느끼고 있는 생각들을 나누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설교는 비판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여기에서 그런 이야기 나누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원천봉쇄성 의견을 낸 장로가 있는가하면 몇 분은 나름대로 이해한 대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분들도 있었다. 같은 내용을 듣고도 사람마다 그 말의 의미와 내용을 각자 자기 나름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인간들 간에 상존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의 통일을 기하기란 어렵다. 말을 던진 분의 핵심은 분명 단 하나인데, 그 말을 해석하고 받아드리는 사람은 서로 다르다 보니 갑론을박(甲論乙駁)의 싸움과 갈등이 존재한다. 좀 쌍스럽게 표현하자면, 인간의 소견통머리가 다 제각각이어서 같은 수준이 아니면 서로 오해하고 편을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런 상이한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간의 모임이 성숙한 단계로 발전하자면, 서로 의견의 다름을 수용하고 인내하며 대화를 통해 시각의 차이를 조정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같은 교회 안의 교우들 간에는 더욱 그러해야한다. ‘나는 목사 반대하는 피켓시위를 열심히 하는데, 저자(者)는 왜 나오지 않는가’, ‘나는 합동기도행사에 열심인데 당신은 무엇하느냐’ 등과 같은 상대방에 대해 감정 섞인 생각을 가지거나 공겪한다면, 그런 시위나 기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실까? 여러 사람이 같이 섞여서 지나다 보면 피차 상호 거슬리는 일이 많으며 피곤해진다. 그 근저에는 사랑이 메마르고 자기 의(義)만 내세우려는 세상 교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예를 들어보자면 하늘과 땅, 해와 달, 산과 바다, 동물과 식물, 손과 발, 왼쪽 눈과 오른 쪽 눈(目), 너와 나... 그야 말로 무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면 이 모든 다른 것들이 서로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며 크게보면 하나로 어우러져 존재하는 것이지 개체로 존재하거나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장자(莊子)는 사람간의 시각의 차이에 대해 다음같이 말했다. “그 다르다는 점으로 보자면 간과 쓸개의 사이가 아득히 멀지만, 그 같다는 점으로 보자면 만물이 다 하나이다(간과 쓸개는 하나로 붙어 있다) (,. .)
이 글을 쓰면서, 2014년 9월 14일 내가 마당집회에서 주일 설교(두가지 환상을 통해 보는 교훈과 소망:에레미야 1:11-19)중에 ‘마당 피켓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변을 언급했다가 열성 피켓팀으로부터 호되게 비난 받았던 기억이 오늘 장로모임에서 있었던 일과 중첩되어 머리에 떠올라서 참 힘든 길을 자초해온 자신을 돌아보며 이글을 기록으로 남긴다.
(* 위에 우리말로 인용한 莊子의 德充府 에 있는 말의 원문은 다음과 같음: 自其異者視之,肝膽楚越也. 自其同者視之,萬物皆一也).
첫댓글 인생은 과업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한가지 과업을 끝냈나하면 바로 그 순간 수행해야할 다른 과업을 만나게 되지요. 특히 신앙 생활에서 만나는 과업은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고난을 수반하는 외로움과 고독과 인내가 요구되는 과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들어 '비운다' '내려놓는다'는 어휘에 대하여 깊히 사색해 보지만- ----참 어렵네요. 시원한 답은 부르심을 받고 저 높은 곳으로 가는 날에나 알게 되지 않을까합니다. 장로님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평안을 기도 드립니다.
대화를 통해 시각차이를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에 적극 동의합니다.
비대위장로님들께서 밤늦도록 의견을 청취하시고 화합을 위해 애를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다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습니다.
리더들이 자기 의와 세상 교만으로 갱신이 표류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 없이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과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특히 공동체 내에서는 각자가 생각하기를 나는 문제를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를 풀려는 사람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서 문제가 없어서 논문 쓸 거리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사람들은 논문 쓸 거리가 많아서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 이것이 부러움에서 나온 말인지 후진국이라는 폄훼에서 나온 말인지 의아한 적이 있었다. 문제가
많아서 좋다고 해야할지 참으로 헷갈립니다.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샬롬
문제가 많으면 많다고 트집이요, 문제가 없으면 없다고 불평이니 항상 "문제"이지요. 카페에 글 올려놓고, 댓글달아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트집잡으려는 이도 있고, 무리가 기도한다고 떠벌리고 있을 때 침묵하고 있다고 시비붙는 이웃도 있나 봅디다. 참 기막힌 교인이요 세상이지요. 그런 유아적 소아병 행태에 속상하고 햇갈리시면 푹 잠이나 자시며 잊으시구려. 나는 주변(교회와 세상)에서 진행되는 현 세태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정신상태를 걱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