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히 어떤 악인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락의 후세인을 위해서는 기도할 수 있어요.
그런 막연한 악인은 내가 직접 피해를 입은 자가 아니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악인 중에도 “네 원수”라고 하십니다. 또 너를 핍박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내가 직접 피해를 봤어요. 그리고 엄청난 원한이 내 가슴속에 쌓여 있어요.
그런 대상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랑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요구하십니까?
이 모두가 자기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처럼 되어야 한다.
너 자신은 너를 하찮게 생각할지모르지만 나는 너를 엄청나게 생각한다.
너는 내 자녀가 아니냐? 너는 나를 닮아야 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한다면 너도 사랑해야 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말씀에 부담을 느낀 것 같습니다.
구약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척 부담스러웠는지 그들은 이 말씀을 살짝 바꿨습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예수님께서 여기에 인용하고 계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보면,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말 하나를 빼먹고 가르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네 몸과 같이”를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대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고쳤습니다.
즉 네 원수를 미워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받아들이기 쉽도록 말씀을 각색해 놓았습니까?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이지요?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각색하고 더하고 빼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근본 취지와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야지 가감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