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삼인조운동의 특징
제1장 삼인조운동(PET훈련)의 시작
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인조운동은 PET훈련 또는 삼인조훈련을 전 세계적으로 실시하여 세계복음화를 빨리 이룩하자는 운동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전도폭발 훈련을 받은 평신도들이 “전도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지원을 요청하는 교회들을 찾아가 현지 교인들의 안내로 전도도 하고, 선교영화도 상영하고, 전도설교를 통해 전도에 대한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며 국내 전역을 다니며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 9월에 이성준 집사가 캄보디아 선교사로부터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 와서 전도훈련을 시켜달라는 연락을 받고 전도훈련을 약속했으며, 이성준 집사의 요청에 따라 저도 캄보디아 전도훈련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며, 자료를 준비하던 중, 우리가 한국에서 사용하던 “전도특공대” 라는 이름을 쓰면서 돌아다니면 특히 전쟁 중인 나라에서 오해를 받을 염려가 다분히 있어서 이름을 바꾸기로 하고, 그 이름을 “PET훈련”이라고 바꾸게 되었습니다.
1995년 당시 캄보디아는 북한과는 수교가 되어있었지만 한국은 수교국이 아니었으며 캄보디아 북서쪽의 국경지역에서는 1975년에 일어난 공산혁명의 잔당이 게릴라 화한 공산군과 정부군 사이에 교전 상태에 있었고, 국가 경제는 오랜 전쟁과 국민의 1/4을 학살한 크메르루즈 공산군의 학정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고 국민생활은 참혹했습니다. 정부는 유엔의 지원 등으로 치안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몇 달째 봉급을 주지 못했고 전기는 초저녁 2시간 정도만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과는 수교 관계가 없었으므로 캄보디아에 가려면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평신도가 선교 목적으로 캄보디아에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지 약 2주 만인 1995년 10월 2일 한국과 캄보디아 정부는 동시에 수교를 발표했고, 정부의 허가 없이도 캄보디아에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여행사에 항공권 예약을 했는데, 가장 빨리 출발하는 것이 10월 29일 출발하는 비행기였습니다. 베트남을 거처 10월 30일 캄보디아에 도착하니 공항 건물 지붕 위에 국왕과 왕비의 커다란 천연색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10월 31일이 국왕의 생일이라 그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걸어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당시에 캄보디아는 아직 내전 중이어서 군인들은 아무데서나 총을 쏴댔고, 심지어는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통행료를 내라고 해서 없다고 하면 총으로 쏴버린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국왕의 생일 전후 1주일간(총 2주일간)은 국법으로 지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아무도 총을 쏠 수 없게 되어 있었고, 국가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수도인 프놈펜에서도 평상시에는 하루에 2시간 정도 밖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국왕의 생일 전후 1주일간(총 2주일간)은 전기가 밤새도록 들어와서 밤늦게까지 훈련하는데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가장 빠른 시간에 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 년 중에 가장 안전하고 전기가 밤새 들어오는, 일년에 2주 밖에 없는 기간 안에 절묘하게 1주일간의 훈련시간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훈련에는 42명이 참석했으며, 4박 5일 동안에 전도훈련과 교회개척을 통해 주로 배경이 불교도인 캄보디아인 376명에게 복음을 제시하여 175명이 결신했으며, 2개의 가정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훈련에서 너무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한 나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가능한 한 많은 나라에 이 훈련을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고, 또 하나님께서 이 사역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여러 나라에서 이 PET훈련을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잘 헌신된 분이라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러분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이 책을 선교현장에서 활용하실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누구나 하실 수 있는 훈련이기 때문에 되도록 상황을 자세히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