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캘커타의 아슈람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
(우리는 전도폭발에 대해 부정적이에요!)
하루는 데이비드라는 인도 목사를 만나서 PET훈련에 대해 소개하던 중에, 자기가 사는 마니푸르(인도 동북부 4개 도[道] 중의 하나)에 와서 PET훈련을 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역하고 있던 마니푸르 복음학교에서 훈련을 실시하기로 하고, 전화로 데이비드 목사의 부인에게 준비를 시키고, 우리 둘(이성준 집사와 조대영 장로)은 인도 대사관에서 입국 비자를 받았습니다. 물론 방문지로 마니푸르를 적어 넣었지요. 그런데 인도의 동북부 4개도에 들어가려면 인도에 가서 또 다시 내무부에서 방문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데이비드 목사가 우리의 출국 40일 전에 미리 캘커타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뉴델리에 있는 내무부에 허가 신청을 해 두었습니다. 출국 날자가 되어 캘커타의 여행사에 연락해보니 곧 내무부 허가서가 나올 것이니 출발해도 좋다고 해서 96년 11월 15일(토요일) 출국하여 캘커타에 도착했습니다.
캘커타는 초행길이라 마중 나온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시내 호텔로 옮겨 아침을 먹고 그 날은 주일이었으므로 교회를 찾아 나섰습니다. 동서남북도 가늠하지 못하는 낯선 곳이기 때문에 호텔 전화번호만 가지고 길을 나서서 어떤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일예배가 끝났고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 옆에 “캘커타침례교선교연합회” 라는 건물이 있어 들어갔다가 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에게서 어떤 교회에서 캘커타교회연합회 목회자 정기 회의가 그날 저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교회를 찾아갔더니, 그 교회가 바로 1809년에 세워진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캐리 기념교회” 였습니다. 거기서 한국에서 파송한 인도인 한국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이 선교사는 캘커타 사랑의교회와 아슈람선교회를 이끌면서 아슈람 신학교의 교장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그는 지방에 출장 중이라 이날 회의에는 불참한다는 연락을 사전에 해 두었었기 때문에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전혀 뜻밖에 회의가 끝날 때쯤 회의장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갑다는 인사와 통성명을 하고 전화번호만 받고 헤어졌습니다. 그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한 인도인 노수길 목사였습니다.
월요일(11월 17일) 저녁에는 여행사 사장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마니푸르에 가는 비행기 표도 받았습니다. 내무부 허가서가 내일(화요일) 아침에 나오기로 되어 있으니 허가서를 뉴델리로부터 팩스로 받아서 사본을 가지고 비행장에 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내일이면 마니푸르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고향의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서 “너희 아버님 안녕하시냐?”고 물었더니 눈을 흘기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라고 말하며 달아나버렸습니다. 잠에서 깼는데, 그때 “마니푸르에는 못 가게 되었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강하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옆에서 잠자는 이 집사를 깨웠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이제 마니푸르에는 못 가게 되었으니 우리의 기도 제목을 바꿉시다. 어서 일어나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의아해하면서 어제 밤에도 확인했고 비행기 표까지 받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되물으면서 곤하게 자는 사람을 깨웠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꿈을 통해 감동을 주신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곧 기도하자고 재촉했습니다. 그런 일이면 내일 아침에 말해도 될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도 기도하자는 데는 버틸 수 없었던지 부스스 일어나 어두운 데서 둘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까지는 마니푸르에 시간 늦지 않고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순탄한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왔는데, 그곳에 못 간다고 하시니, 이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갈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마치고 불을 켜보니 새벽 2시였습니다.
화요일 아침 7시에 아침을 먹고, 9시경에 뉴델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내무부 허가서가 나왔는데, 다시 외무부 허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인도 대사관에서 행선지를 마니푸르로 해서 비자를 받았는데 외무부 허가를 왜 또 받아야하느냐고 항의 했으나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예 내무부 허가서에 “외무부 허가를 받으라.”는 붉은 색의 큰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사 사장도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마니푸르에 못 간다는 것을 나는 어제 밤에 이미 알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걱정이 안 되고 어렴풋이 하나님께서 필요하게 쓰실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델리에는 외무부 허가를 신청하라고 해 두고, 어제 만났던 노수길 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가 마니푸르에 못 가게 되었는데 훈련을 시킬만한 곳이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가 교장으로 있는 아슈람 신학교 학생들이 어제 방학을 해서 오늘 오후에는 점심 식사를 하는 대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터인데, 아직 학교에 남아 있으니 우리 신학생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만 늦었어도, 아니 세 시간만 늦었어도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다 고향을 향해 떠났을 것이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집에 가지 말라고 연락을 해 두고, 우리는 열차를 타고 캘커타 시내에서 37Km 떨어진 아슈람 신학교로 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학생들은 점심 식사 중이었고, 식당에 들어가니 우리의 식사를 가져와서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몇몇 학생들이 몰려와서 무슨 훈련이냐고 묻는 그들에게 “전도폭발 훈련”이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깔깔 웃으면서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도폭발 훈련을 다 받았고, 임상훈련까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폭발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자격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 훈련을 또 받으라고요? 우리는 그 전도폭발에 대해 매우 부정적입니다.”라고 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말 많고 영어도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신학생들에게 이미 다 배운 전도폭발을 또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밥맛이 뚝 떨어지면서 사실은 가슴까지 두근거렸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신학생들을 상대로 일주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집사는 식사를 그대로 하게하고, 저는 슬그머니 나와서 훈련을 하게 될 교실로 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