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며칠 전 운전 학원에서 운전을 배우는 수강생들 중에 한 남자 학생이 십자가 모양의 금목걸이를 하고 있어서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십자가 문양이 그냥
좋아서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삼일 정도 지난 후 이번에는 여자 수강생 중 하나가 십자가 모양의 금귀거리를 양쪽으로 하고
왔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혹시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교회에 안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십자가 귀걸이를 하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그냥 십자가 모양이 좋아서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왜 십자가를 몸에 달고 다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그 상징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도 만 자가 새겨진 절을 보면
거부감이 들고 흰 깃발과 붉은 깃발이 꼽혀져 있는 무당집도 거부감이 든다. 중동에 나가면 이슬람 사원들을 볼 수 있는데 하나 같이
초승달을 상징으로 쓴다. 우리나라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마을마다 초승달이 걸린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상징들을 볼 때 별로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상징은 태극 모양일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 태극 모양을 볼 때 우리와 같은 기분을 가질까?
일본 사람들의 상징은 붉은 점일 것이다. 우리는 하얀색 바탕에 붉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 좋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언젠가 대만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대만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처럼 머리 길고 소복입고 입에 피를 흘리고 있는 귀신이
아니라 깡충깡충 뛰어 다니는 시체를 의미하는 강시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강시 이야기만 하면 소름이 돋나보다. 그런데 아무리
강시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 감흥이 없는 것이다. 나라 별로 무서워하는 이미지가 다른 것이다. 그 이미지 역시
상징의 한 종류이다.
사람들이 상징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그 상징들을 보았을 때
의식이 활동해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꿈속에서 본 어떤 물건들, 어떤 사람, 어떤 동물, 어떤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들, 이해하지 못하는 형상들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들이 꿈속에서
나타나느냐는 말할 수 없다. 그저 우리의 무의식이 만들어 내고 느낄 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다 이해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도 우리의 무의식이 이 세상을 보고 있다. 무의식은 의식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한다. 의식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도 존재하는 것이다.
기호에 대한 느낌은 천만가지로 틀리다. 같은 글을 읽고도 어떤 사람은 이런 느낌을 받고 어떤 사람은 저런 느낌을 받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상징은 시대가 지나면 사라진다. 오늘 날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는 미국 애플사의 상징이다. 애플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그 사과 그림을 옛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아마도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애플사가 망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역시 훗날 사람들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그림을
아무 느낌 없이 쳐다 볼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확신은 이성에서 나온 확신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느낌을 받으면서도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나에게 불교의 만 자를 보면 왜 불쾌감을
느끼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보라고 하면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불교의 ‘만’이라는 글자는 영원한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혹은
굴러가는 바퀴를 상징하기도 했다.
기호는 의식의 세계와 연관이 있지만, 상징은 무의식의 세계와 연관이 있다. 의식은 무의식의 바다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배가 아니라 바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