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오류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참된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 강조하고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이 사라진 것이 오늘날의 형편이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다.
관념과 지식만 남아있는 시대, 그것이 복음을 망치고 있다.
교회를 훼손하고 있다.
교회의 생명력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위해 죽으라고 요구하신다.
죽어야 부활한다고 하신다.
이웃을 위해 죽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신앙의식과 이웃을 향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은 지나치게 수동적, 소극적으로 변했다.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을 내려고 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복음에는 삶이 따라야 한다.
기독교 초기에는 믿음은 곧 삶이었다.
그것이 원래의 복음이다.
복음의 실천성이 결여된다면 결코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생명력이 없는 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가?
실천성과 삶의 방식이 바로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전도하면 반쪽짜리 전도가 될 수밖에 없다.
반쪽짜리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온전해보여도 반쪽짜리 복음 때문에 중간에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교회 안의 형제사랑이 먼저이다.
형제사랑을 통하여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이웃사랑도 고작 자기공로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예전도 전통도 다 필요하다.
본래의 의미를 알고 행한다면 조금도 버릴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세상 속에서의 복음적 삶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 속에서, 이웃 가운데에서 복음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이 결여된 복음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 머문다면 미래는 없다.
우리는 이웃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옆집, 뒷집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고 그 외의 우리의 모든 이웃들에게 관심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팬데믹 시대? 실천의 복음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지혜와 힘과 능력을 주신다.
'작교연'이라는 단체에서는 오히려 교회들이 힘을 합쳐서 마을의 방역소독을 앞장서서 행하고 있다.
그것이 살아있는 복음이다.
복음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