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과 행치않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가 행함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상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행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행함과 행치않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함을 강조하면 믿음이 없이도 겉으로 행함을 보일 수 있습니다. 억지 행함이 됨으로써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자기자랑이나 공로를 내세우는 행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 이 두 가지 유형이 얼마든지 양산될 수가 있고 또 현실적으로 그런 성도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행함을 바른 믿음으로 인정받으려면 신앙의식이 따라와야 합니다. 신앙의식수준이 따라오지 못하는데 행함을 강조하면 의무적인 행함이나 사람에게 보이는 행함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신앙의식수준이 올라오면 행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의식이란 감정과도 통합니다. 외부의 자극이 왔을 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을 지나치게 칭찬하거나 행치않음을 지나치게 나무라게 되면 모두가 율법주의로 흘러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사람을 의식하는 행위가 되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행함의 원리나 근거를 가르치고 바른 행함을 제시해야 합니다. 행치않음의 결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신앙의식수준을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가 행함을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행함이 나타날 때 그것이 참된 기독교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하지 못한 햄함이나 신앙인으로서 전혀 행치않음의 근본원인은 신앙의식이 높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의식을 올리는 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목회자들이든 성도들이든 자기 신앙의식 이상으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거나 손가락질을 당하는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은 자신으로서는 그것이 최상의 모습입니다. 신앙의식이 모자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식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이 아니라 신앙의식을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식을 높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의식을 높이는 훈련을 지속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통독이나 제자훈련이나 전도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본질적인 신앙의식을 성경적으로 알려주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더 복음과 가까우니까요.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진짜 정체성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성화될 수 있겠는가? 이웃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웃사랑은 어떤 마음과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아무튼 복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꾸준히 제시해야 합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자훈련도 교회생활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얼마나 모이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른 신앙의식 없이 많이 모인 것 때문에 교회가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참된 정체성과 세상에 대한 복음적인 태도를 가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을 꾸준히 배출해내려면 바른 태도를 가진 지도자들이 바른 목적을 가지고 일관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능력이 너무나도 모자라지만 방향만은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10년, 20년, 30년 후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교회를 바꾸어나가는 그런 날을 꿈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