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문안
우리 모두 참 특별한 사순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참 특별한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성당에서 성대한 대축일 전례에 함께 참석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서로 축하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지금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나누는 부활 인사는 더 진솔하고 울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현존이, 여러분 모두의 몸과 마음에 당신의 평화와 빛을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드러내시고 뿌리내리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여러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들에게, 부활의 빛과 힘이 마음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몸의 원기를 되찾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부활 인사 드릴 겸 지금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전염병 상황에 대해 제가 평소에 느껴오던 바를 좀 나누고자 합니다. 이 사태가 앞으로 우리 세상살이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지에 대해서는 나라 안팎으로 많은 현자들이 이미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도 챙겨서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여기서 나눌 말씀은, 한 수도자가 느낀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소회(所懷)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몇 회에 걸쳐 나누어서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이곳 생활 나눔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먼저 최근 저희 생활에 대한 말씀부터 나누겠습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미얀마에도 신종 코로나 전염병은 이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약 2~3주 전부터, 모든 학교와 식당이 문을 닫고 다른 도시로 왕래하는 차편도 끊어졌습니다. 저희 동네는 꽤 큰 시장이 바로 인근에 있어 거리에 사람들이 아주 많은 편인데, 한 일주일 전부터 눈에 띄게 사람이 줄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슈퍼마켓도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정부는 오늘부터 약 일주일간 이어질 예정이던 미얀마 고유의 성대한 물축제 ‘띤잔’ 행사를 취소하고, 모든 주민들에게 가급적 집 안에 머물기를 권고했습니다. 저희는 이 땅에 외국인이라, 더욱이 지금은 본의 아니게 ‘불법체류’ 상태라 더 조심스러워서, 사실상 집 안에서 모종의 ‘자가 격리’를 한 지 꽤 되었습니다. 불법체류 문제는 대사관의 협조도 있고 해서 다행히 잘 해결될 것 같지만, 전염병과 관련한 어려움은 이 땅에서도 꽤 오래 갈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어 학원도 당연히 문을 닫았고, 늘 한 두 시간씩 운동 삼아 챙겨 하던 산책도 못하게 되니 한 동안은 생활에 박자가 흐뜨러진 듯 했습니다. 하지만 안셀모 수사님이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선생님 강의를 온라인으로 집에서 듣게 되고, 집 안에서도 좁은 공간이나마 걷기도 하면서, 지금은 ‘슬기로운 격리생활’에^^ 접어든 단계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저와 안셀모 수사님 둘이 매일 거행하는 미사전례와 기도가 예나 이제나 우리 생활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텅 빈 성 베드로 광장
지난 3월 27일 금요일 저녁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성 베드로 광장에서 혼자 서서 전염병이 끝나기를 기도하시던 모습을 보셨는지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었지요. 교종께서는 절뚝거리는 노구를 끌고 우산도 없이 힘겹게 광장 가운데를 걸어서 중앙에 마련된 말씀의 전례 장소로 등장하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장면에서 형언하기 쉽지 않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종께서 등장하시는 이런 순간에 통상 성 베드로 광장은 인파로 미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날, (아마도 교회 역사에서 처음일 겁니다) 텅 빈 광장에, 그것도 비가 추적거리는 저녁 어스름 광장에, 홀로 선 교종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코로나 전염병 상황을 기점으로 교회는 ‘붐비는 광장’에서 ‘텅 빈 광장’으로 그 모습이 변모할 지도 모르겠단 직감이 제 마음 깊은 곳을 관통하며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 전체로나 개인으로나 ‘붐비는 광장’이었는지 모릅니다. 모인 사람들의 숫자에서 우리 위상과 중요성을 확인하고 뿌듯해 하며, 개인이나 공동체가 하는 일과 역할(그리고 그 성과와 성공)에서 자기 존재감과 정체감을 확인하는 데 과하게 몰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선포’ 혹은 ‘사도직’이란 이름을 걸고 하는 많은 일들은, 자기생존과 확장을 목적으로 삼는 시장판의 ‘마케팅’과 필요 이상으로 닮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걸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만 살면, 삶의 어떤 순간 그 일과 역할이 없어졌을 때, 마치 자기 자신이 없어진 듯한 위기감에 시달린 나머지 깊은 우울과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정말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예컨대 수도회의 역사를 보면, 어떤 특정한 일(사도직)을 자기 수도회의 정체성과 결부시켰던 수도회들은, 특정 시대와 환경이 그 일을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요청하지 않게 되자 그만 존재 이유를 잃고 사라져버린 경우가 많지요. 같은 맥락에서, 교회와 수도회 안팎을 막론하고 활발히 활동해 오던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2선으로 물러선다든지 은퇴하게 되었을 때도, 마치 자기 자신이 없어져버린 듯한 당혹감과 불안감으로 위기를 겪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발자국만 물러서서 잘 생각해 보면, 그건 내 역할이 없어진 것이지 나 자신이 없어진 게 아니란 사실을 잊어버린 데서 오는 고통일 따름입니다.
그런 구분(역할과 자기 자신의 구분)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닐 테지만, 요즘 저는 바로 이 구분에 '영성'이란 말이 모두 달려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라틴말 속담에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Qualis vita, talis mors)”는 말이 있지요. '자기'를 자기가 하는 일이나 성과, 역할과만 동일시하면서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 죽음의 순간은 그저 비참하기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엔 여태 내가 나라고 생각해오던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정녕 누군지 조금도 모른 채 극심한 불안 속에 삶을 마칠 가능성이 큽니다. 믿는 이들도 그리 예외는 아닌 것 같아요.
텅 빈 광장의 순간은 껍데기는 다 날아가고 알맹이만 남아있는 순간과 닮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주교님은 비 오시던 그날 밤 텅 빈 베드로 광장은 그저 쓸쓸하고 공허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어떤 ‘영성’으로 충만해 있음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정말 그렇게 느꼈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그리하여 텅빈 광장에 홀로 서서 기도하시던 교종의 모습은 제게 베네딕도 규칙서의 한 구절을 상기시켰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4,47). 이런 구절은 그저 옛 사람들의 무지몽매한 염세적 인생관의 표현으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앞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죽음과 친하게 지내라고 권하는 이 구절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깊은 영적 욕망을 일으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죽음 이후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바로 지금 우리 안에 활발히 샘솟는 참된 생명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사는 듯이" 사는, 그런 삶의 생기와 매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끝’을 눈 앞에 두지 않고서는과연 무엇이 가장 중요하며 또 무엇이 정작은 그리까지 중요하지 않은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것 하나”(루카 10,42), 달리 말해 ‘본질’은 인생에서 가장 자명한 사실인 죽음 즉 ‘나의 끝(장)’을 눈앞에 환히 둘 때만 선연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때에만 우리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정녕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고백도 할 줄 알게 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직 하느님만 변치 않으시니.
하느님을 소유한 이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정녕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니.
우리는 매일 끝기도에서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아, 우리가 이 기도만 진심으로 할 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같은 끝기도에 나오는 시메온의 노래 첫 구절만 진심으로 노래할 줄 알게 된다면(“주님, 이제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텅 빈 광장에 서 있습니다. 나를 치장하던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운 맨 몸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도 아니요 남들이 보는 나도 아닌, 하느님께서 보시는 바로 그 나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순간, 이슬람의 어느 신비가가 말한 것처럼(루미), 나는 나 자신의 숨은 모습에 놀라 하느님께 “주님, 제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대답을 듣고 더욱 깊이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얘야, 바로 나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기다렸던 요나수사님 묵상글 올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령께서 조용히 감도는 수사님의 말씀은 언제나 제 마음속에 깨우침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계시는 수사님 건강유의하시길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께 영광!!!
묵상글 감사드립니다^^
아...저두요..참 기다렸던 요나수사님 묵상글..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요나수사님과 안셀모수사님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두손모아 기도드립니다.
요나수사님' 감사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한 가타리나수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
새기며 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녕 하느님 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나날을 꿈꿉니다.
아무것도 저를 슬프게 하지말며
아무것도 저를 혼란케 하지말며
이 모든 것은 지나갈지니...
좋은 묵상 감사드립니다.
두 분 수사님 코로나 상황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으실텐데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