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모든 게 한없이 부족하고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미래라고 할만한 건 멀고 멀어서 당장 1년 뒤, 2년 뒤의 일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을 확인하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겁 없이 앞으로만 뻗어나가는 시간에 취해 살아온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모든 게 더 나아지고 계속 좋아질 거라고 믿어온 건지도 몰랐다. 48쪽
그는 영업이라는 것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뭔가를 판매하려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고 그동안 쌓인 시간과 신뢰할 만한 관계라는 것을.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보여준 친절과 호의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81쪽
노조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와 준비한 말을 했다. 이야기는 종규의 죽음에서 시작되었고 회사에 대한 분노와 비인간적인 처우로 옮겨 갔다. 국가, 자본, 세계와 빈곤 같은 거대한 단어들에 다다랐을 때는 종규의 죽음 같은 건 증발하듯 사라지고 없었다.
종규의 죽음은 종규의 책임이 아니고 그를 거기까지 내몬 회사에 있다는 노조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종규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내 힘없고 나약한 피해자로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내내 끌려다니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린 희생자로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종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러니까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122쪽
감정이라고 할 만한 건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히 차오르고 일렁거리며 자신에게로 혹은 타인에게로 흐르던 마음의 움직임 같은 것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그만두었다.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나 가능성마저 폐기하고 나자 내내 마음속에 들끓던 감정들도 잦아들었다. 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