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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홍태희/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 짓게 하는 육화(강생, 성육신) 신앙은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통하여 수태되어 예수로 탄생하였더라도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신성을 갖추신 하느님이시라는 계시이자 신앙 고백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서 내려오는 동일한 종교적 뿌리를 갖는 유다교, 이슬람교와도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에 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초기부터 그리스도란 어떤 분인지에 관한 정체성 논의를 거듭하며 수많은 이단 논쟁을 거쳤다. 그리고 마침내 인성과 신성이 한 인격 안에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론을 존재론적 서술에 따라 교리로 정식화 하였다, 이후 시대의 상황에 따라 그 해석은 다양하였을 지라도, 교회의 진리로 언명된 기본 골격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함께 살았던 인물로서 죄를 빼고는 인간 본성을 온전히 그대로 갖고 있는 예수가 물질로 구성된 살을 취하셨다는 육화의 교리가 갖는 의미의 해석을, 생태계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인간이, 살을 취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 한 위격의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고 상호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전통적 교리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보시니 좋은 것’으로 창조된 다른 피조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배경으로만 머무는 것인가?
오늘날 생태신학은 그리스도의 육화가 죄 많은 인간의 구원에만 결정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에 발생한 단절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도 중요하다는 개념을 발견하려고 한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인간과 생쥐의 유전자는 97.5%, 침팬지와는 98.4%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인간이 대부분의 생물학적 피조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또한 물질적으로는 모든 피조물과 친족관계이셨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도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고통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인성을 가지신 구원자 하느님은, 그의 구원이 인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인 모든 피조 세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현대의 위기는 제제 없이 독주했던 인간의 활동이 야기한 것으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태 세계의 조화로운 질서의 위기이다. 무절제한 영양의 공급, 인공 화학물질에 의한 호르몬의 교란, 정신적 공황, 위험을 감지할 수도 없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전자파, 방사능, 출산을 거부하는 마음 상태 등등 현대의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병적 상태 또한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연과 공존하는 조화로움을 무시한 인간에게 되돌아온 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원자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은 인간의 치유 혹은 구원이란 고통 받는 모든 피조세계의 치유 혹은 구원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속으로서의 육화
켄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1094-1098)에서 육화에 관한 전통적인 대속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육화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속죄의 희생 제사를 통한 구원자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학에 있어서 대속이론의 단초는 법률가 출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경-220이후)가 로마 법률적 사상을 근거로 하여, 타인에게 저지른 침해에 대한 보상, 배상 혹은 보속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된다. 즉, 예수의 육화는 죄의 보상을 위한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대속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의 축복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하고, 불의와 죽음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선하고 의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은 피조물을 죽음의 상황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셨다. 잃어버린 조화와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침해자인 인간에 의해 그 이상의 순종이 제공되어야 하지만, 이미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무한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인간만이 이 보상을 제공해야 하고, 하느님만이 그것을 하실 수 있으므로, 결국 신인(神人)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면서 하느님이 온 피조물의 구원에 필수적이다.
신학의 현대적 이해에 집중한 칼 라너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의미를 대속을 위한 필연적 희생양으로 단순화한 대속이론에 관하여 육화의 신비를 배상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축소된 그리스도론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미 전체를 대속이론으로 단순화하기에는 육화의 신비가 절대적으로 크며, 전 생애를 통한 구원활동이 간과되고 있음과 동시에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근거가 납득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대속이론은 하느님이 마치 피의 대가를 요구하는 분으로 보이게 한다. 이것은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성경의 계시와 어울리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도 하느님의 행동을 통제하는 듯이 보인다. 한편 대속이론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사라지게 한다. 또한 치유, 퇴마, 식탁 교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마음 등 예수의 구원 사역을 간과한다. 어떤 측면에서 폭력이 신성시 되고 고통이 가치 있는 것으로 미화되어, 불의에 대한 복종의 윤리를 제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은 지배자와 주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잘못 이끌기도 하였으며, 자연에 대한 불의에 대해서도 도전하지 않고 계속되도록 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영예 회복에 집중한 대속이론은 창조물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무시하였다. 즉, 구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서 자연은 단지 배경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봉건 시대의 영주에 대한 배상 개념은 현대의 사고방식과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구원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던 구원론은 우주적 개념이 발전한 현대에 있어서 더 이상 유효하기 힘들어졌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육화와 세계의 구원에 관한 생각에 있어서, 그것이 인간 뿐 아니라 공동의 집에서 함께 생명을 향유하며 진화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관계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제기된다.
물질성을 취하신 하느님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요한 1,14)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는 요한복음 1장 14절은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 본성이 연합되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기보다, 창조주 하느님이 살(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육화(logos ensarkos)의 교리를 나타낸다. 요한이 제시한 말씀(Logos)이란 “세계에 관한 영원한 이성이며 명료성의 살아있는 원리”라는 그리스 철학 개념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유다인으로 사셨던 히브리 전통의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것은 말씀을 예언자 혹은 예언(prophecy) 및 세계를 창조하신 ‘지혜’로 이해하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의 호세아서 1,1 혹은 요엘서 1,1에서 보듯이, “주님의 말씀”(dābārYHWH)에서 그리스어 logos로 번역되는 dābār의 의미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 이상의 행동을 전달하는 역동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또한 logos는 지혜(히브리어 hokmah)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 즉 하느님의 목적에 따르는 인간과 자연 세계의 올바른 관계를 위하여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육신’ 혹은 ‘살’의 의미를 갖는 sarx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불안정한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sarx라는 용어의 의미는 다양하게 사용되며 때로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 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역사적 인물인 예수의 ‘몸과 살’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sarx는 ‘죄 입은 육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요한 3,6 참조)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로고스가 육화한 것은 이미 모든 인류를 위한 예수의 죽음(요한 19,30)을 예견하여 암시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유한한 물질로서의 ‘살’의 의미를 단순한 예수의 육체로부터 그와 연관된 모든 창조 세계의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영역을 포함하여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덧없는 것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교회에서 신학이 형성될 때, 당시 그리스 철학의 영지주의적 분위기는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를 위계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바오로 신학이 죄의 의미로 지칭한 육신은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이 취하신 ‘살’로서의 육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접근한 것이다. 그것은 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것’과 대비하여 하느님을 거역하는 상태를 ‘육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며, 그러므로 ‘육’ 자체가 죄이거나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살로 된 모든 것이 한계를 갖고 있고 언젠가는 없어질 운명이지만 육체는 아름답고, 즐겁고, 강하고, 유연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능력이 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물질세계를 창조하시면서 ‘보시니 좋았다’는 축복을 연거푸 내리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물질적인 것에 관한 개념은 축복받은 긍정적 시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깊은 육화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계 안에 존재한다. 인간 몸의 원소는 원래의 유기체를 포함하여 한 때 다른 피조물의 부분이었다. 인간은 자연과 상호 의존하는 부분이자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정신’으로서, 지구상에서 하나의 생물 역사로 체화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말씀이 살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1,14의 육화 증언을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하느님 로고스가 살이 되셨다는 것은 그저 신성이 특정한 인간인 예수의 ‘몸과 피’로 들어간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 우주의 아주 기본적인 물리적 물질과 결합한 것이다. 예수는 땅에서 육신으로 육화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깊은 우주의 행성인 지구에 육화한 하느님의 현존이다. 예수는 인류의 전형임과 동시에 인류가 연결되어 속해 있는 모든 피조물의 연약한 실제 살이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취한 살이란 인간 예수 뿐 아니라 인류 전체, 동물계, 식물계, 흙의 전체 영역을 포함한다. 생명이 불어넣어진 땅의 먼지인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하느님의 현존이 육화를 통해 지구의 한 부분이 되신 것으로, 곧 하느님은 육신, 흙, 지구가 되셨다.
세계와 필연적으로 연결된 인간 존재의 조건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육화란 온 우주의 지구-생물학적 조건, 사회적 조건을 포함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생태신학자들은 그것을 확장된 의미의 육화 곧 ‘깊은 육화’(deep incarnation)라고 부른다.
지극히 높으신 분(하느님의 영원한 권능과 생각)과 지극히 낮은 것(존재하다가 썩어지는 살)이 육화의 과정을 통하여 결합되었다. 육화는 하느님이 살로서 오신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창조주 하느님과 창조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합한다. 하느님은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참새(마태 10,29 참조)와 어느 날 생겨났다가 다음 날 사라지는 모든 풀과 함께 모든 연약한 피조물과 연결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어 살아있는 존재와 운명을 함께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 피조물의 생물조직 안으로 들어가신다. 하느님은 예수가 되시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이 되며, 여우와 참새, 풀과 흙이 된다.
이러한 성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 및 피조세계의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구원자 하느님의 아이콘이 된다. 인류는 우주 및 모든 생명체 전체와 진정으로 상호 의존되어 연결되어 있으므로, 깊은 육화의 관점은 생명의 그물망인 생물-물리적 세계 전체를 거룩하게 보도록 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과 다양한 생명에 대하여 애정을 갖는 ‘생명애’(biophilia)가 당연한 것이 되며, 세계 만물은 하나도 제외됨 없이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돌아보기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자연의 생태계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느님의 전체 창조세계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죽으실 만큼 내 죄가 큰가요?”라고 물어보는 젊은이에게 예수님 강생(육화)의 의
미를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