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생태신학
홍태희/Ph.D. 서강대 신학연구소
미소지니
2016년 5월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행 동기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여성들에게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한 것이었다. 이처럼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이 볼 수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길가다 여성에게 돌을 던지며 폭행한 취객도 있고, 어떤 섬마을에선 주민들이 여교사를 성폭행한 사건도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심하며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김치녀, 된장녀 등 특별히 여성을 대상으로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현대의 젊은이들은 민감하다. 돌을 소재로 조소 작업을 하는 딸에게 “여자애가 좀 조신한 걸 하지.”라고 걱정하는 아빠의 말도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지적을 받는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생각하기 쉬운 ‘미소지니’라는 용어는 혐오를 의미하는 미소스(misos)와 여성을 의미하는 귀네(gune)로 이루어진 그리스어 ‘미소기니아’에서 유래하는 말로서 요즘 시대 젊은이들에게 특별히 민감한 용어가 되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이라는 단어가 프랑스 사회주의 철학자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1772-1837)에 의해 근대주의와 함께 처음 사용되었다면, 미소지니라는 개념은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가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주적이며 지배와 정복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이미지와 대비하여,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어머니,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며 상처 받기 쉬운 처녀성의 상징인 누이, 성적 도구화와 쾌락의 노예로서의 여성,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성녀가 아니면 요부로만 나누는 순결 담론, 사회불안 해소를 위해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마녀 사냥 등은 현대에 있어서 혐오와 차별을 동반한 미소지니의 여러 양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i Can Speak
2017년 개봉한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의 영화는 우리 민족이 경험한 일본군 성노예 여성의 문제를 다루었다. 여성과 자연, 남성과 문화의 속성이 동일하고 수동적 억압의 대상으로서 여성과 자연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점은 여성주의가 생태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던 이용수 할머니와 김군자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여성의 몸, 주체성, 자기 결정,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저항, 남성(전쟁) 이데올로기 비판 등을 통해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주제의 측면에서 영화를 감상해 보기를 추천한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 인신매매, 성노예, 남편 – 능동적 선택인가 강제적인 것인가?
주체성의 변화 및 획득의 계기와 나타나는 방식-‘나’(i, I)에 대한 강조, 말하기.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엄마 왜 그랬어?” -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상징.
공감을 통한 관계성의 형성과 공동체로서의 인식: 여성의 내재적 가치-관계적 자아(하느님-인간-자연)
여성과 자연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가졌던 히브리 민족의 역사이기도 한 성경의 기록에서 여성은 전체적으로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2-3천 년 전의 시대에 비해 성과 성역할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현대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여성에 관한 해방적 관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대신 여러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자연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 여성에 관한 새로운 해방과 구원의 관점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수잔 그리핀은 『여성과 자연: 그녀 안의 부르짖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직면하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유한함과 마주하는 대신에 여성과 자연을 억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유한한 속성의 지구를 인정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여성과 연결된 자연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듣고 감동을 느끼는 것이 여성과 자연의 해방과 구원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가톨릭 신학자인 로즈마리 류터는 각 지역의 창조설화와 관련된 여신(女神)이라는 개념보다, 역사적 맥락을 갖는 토마스 베리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와 공감하는 ‘상호 연결된 구조를 갖는 지구’(Gaia)라는 그녀 나름의 생각을 펼쳤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이아는 자연 세계에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우주적 하느님을 의미하는 성사적 전통을 잘 표현할 수 있다. 부활은 지상에서의 미래 삶에 있어서도 우리 육체의 물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측면으로 이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인류가 “의식의 깊은 변화”를 경험한 후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생태여성주의 신학
여성은 역사적으로 자연과 연관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압박 또한 가부장제에 내재된 이원주의적 생각에 의해 여성에게 억압을 가하였다. 평등하지 않은 생활환경은 세계적으로 여성에게 더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성주의자들은 환경문제에 관한 활동에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하여 왔다. 여성주의 운동은 정치적 참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제1세대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시기와, 문화적 불평등과 성적 규범 및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확대를 추진하였던 급진적 페미니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고 있는 제3세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여기서 생태여성주의는 여성주의의 “제삼의 물결”로 표현된다.
생태여성주의는 해방신학과 유사한 방법론을 갖고 풍부한 이론적 개념이 실천을 추동함과 동시에 그 실천이 다시 이론화에 영향을 준다는 측면에서 프락시스(praxis)를 강조한다. 교회의 전통적 교의와 해방신학 그리고 생태주의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생태여성신학은 그 안에서 표출되는 정치적 입장 또한 보수적인 관점에서부터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개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지역 혹은 국가 공동체의 활동가, 환경주의자, 여성주의자 등의 만남의 장소이자 다양한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몸
그레이스 얀첸의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몸』과 샐리 맥페이그의 『하느님의 몸』(Body of God)은 생태여성주의 신학뿐만 아니라 교의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얀첸은 인간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신에 체화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또한 세계에 체화되어 있으며, 신의 초월성은 인간의 초월성과 유비적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세계를 전통적으로 분리하여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의 의지와 의도는 우주 그 자체를 통하여 계시되고 있으며, 유한한 물질성으로 체화한 하느님은 기쁨과 슬픔을 비롯한 감동을 나누며 심지어 자기 제한적이기까지 하다. 이것은 하느님의 본성으로서의 케노시스라는 전통적인 신학 개념으로 설명된다.
얀첸은 이 개념을 전능한 지배자 혹은 심판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공감하고 생명을 살리며 관계성을 중요시 하는 여성적 신성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으로 발전시켰다. 그녀는 서양 문화에서 발견되는 이원론적 경향의 바탕에는 육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따라서 그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으며, 이것은 여성과 자연 뿐 아니라 성적 취향, 감정 및 기타 인종들을 통제하려는 태도로 이끈다고 생각하였다. “땅을 다스린다는 생각 대신에 땅에 대한 경건함과 감수성을 먼저 가질 필요가 있다. 즉 지배란 하느님의 속성과는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신성과 완전히 모순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하느님을 세상과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찬양하였다. 한편으로 범신론적 생각을 거부하며 하느님과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은 ‘모태 안에 삼켜진 존재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
맥페이그는 얀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에 체화된 신 모델을 주장한다. 그녀는 우리가 지구를 기계처럼 보는 대신에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면서 주의를 기울여서 지구의 생생한 주체성을 의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지구과학과 진화론의 물질적 측면을 받아들이면서도 지구에 어떤 주체성을 부여함으로써 물질성과 함께 정신성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지구를 은유적 표현인 ‘하느님의 몸’으로 이해하였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나를 이루는 몸을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피조물의 창조자를 맞이하도록 초대 받았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 세계의 근거이자 배경이며, 그러므로 창조 세계는 초월적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몸으로서 물리적 세계는 또한 신적이 것이 된다. 맥페이그는 하느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며 범신론적으로 접근한 얀첸과 달리 초월적 하느님과 세계를 구별하여 보는 범재신론의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교의적 측면과 상충되지 않는다.
교회에 대한 생태여성주의의 비판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은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많은 신학자들이 그가 젠더 문제에 관하여 침묵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이상적 모습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계속하여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여성이 환경적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교종이 지구를 보전하기 위하여 통합적 접근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여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비판받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생태신학의 담론은 교회가 전통적 해석에 근거하여 가르치는 교리로서의 그리스도론과 부활 그리고 종말론이 더 이상 진정한 근거를 갖는 신학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이승과 떨어져 있는 사후 세계 및 사후의 생명에 관한 생각은 생태여성주의가 비판하는 이원주의를 강화할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부활에 관한 살아있는 이해를 상실한다면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기반을 잃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의 물질성 안에 살아계시며 성부의 의지와 완전한 일치를 향해 초월해 가는 우주적 그리스도(오메가 포인트)에 관한 전망 및 새로운 파스카로서 생태대로의 문명 전환 등, 희망과 땅의 회복에 관한 생태 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늘의 맥락에 뿌리내리도록하기 위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돌아보기
자연을 돌보는 생태적 측면에서 여성성의 특별한 역할은 어떤 것일까?
지구를 하느님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신앙과 관계가 있을까?
오늘날 신체는 의료 행위와 기술을 통해 조작되고 개입되기도 한다. 소비주의는 여성에게 이상적인 신체 모습을 갖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사이버 공간은 신체의 이미지를 가상 세계로 대체한다. 이러한 문화적 경향은 물질적 신체의 중요성을 모호하게 하거나 서로 구별되어 존재하는 실제의 ‘나’에 대한 혼란을 가져온다. 특히 비대면 시대에 영상으로 대체하는 미사에 안주하는 경향도 짙어지고 있다. 일부 교파는 인터넷 교회나 메타버스 예배를 추진한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