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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 편지 24신]조용필의 '허공'을 열창하던 막내에게 |
막내야, 지금은 새록새록 꿈나라에 들었을 깊은 밤이다.
어떻게 바쁜 일상 잘 꾸려가며 여전히 잘 지내고 있겠지.
엊그제 조용필 가수데뷔 40주년 기념 대형콘서트를 보았다.
2시간 반이나 이어진 컨서트 감흥感興에 겨워하며
계속 네가 떠올라 이 한 밤 자판을 두들긴다.
대가족이 무슨 좋은 일로 시골집에 모여 한밤을 지새운 것이 언제였던가.
닭다리를 뜯고 마이크 삼아 네가 열창하던 조용필의 ‘허공’ 말이다.
생각나니? 아마 사진도 있지.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아 그때 오빠들은 완죤히 뒤집어졌었다.
지난해 3월이던가, 무주 구천동 노래방서 네가 추던 현란한 벨리댄스는 또 어떻고?
어느새 나이가 46이나 되었지만, 오라버니들 앞에서 창피할 것은 무엇인가.
4남3녀 7남매 맨 꼴찌여서 늘 애기인 것만 같은데,
어느새 아들 둘을 둔 40대 중반인 것을.
‘막내’라는 호칭이면 끝나버리던 네가
누구누구 엄마가 된 지 스무 해가 되는 것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엄마로, 아내로, 큰며느리로
늘 영일이 없는 훌륭한 동생인 것을.
얼마 전에 시골에서 자는 너를 보면서 오빠로서 한동안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예쁘게 자라 잘 배우고 직장을 갖고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으며,
여전히 발랄하고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하여 더할 나위없이 고맙고 장한 데,
거기에다가 오빠와 언니들 앞에서
마음놓고 펼치는 ‘재롱’이 어찌 기쁘지 않을 거냐.
오빠가 이럴진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보는 너는 오죽 하겠냐.
나는 두 살 터울의 세 여동생가족 식구를 만날 생각만 하면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너무 기분이 좋다. 어디 기분 언짢을 일이 하나라도 있던가.
뭐라도 해주고 싶지만,
변변히 해줄 것 없다는 생각에 속이 상하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조용필 노래를 잘 부르는(너도 나를 닮아 엄청 박자치면서도 목청 하나는
화통을 삶아 먹은 것같이 커 감정을 ‘이빠이’ 넣은 채로 고래고래 잘 부르지)
너를 초청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잠실대운동장을 다 메운 게 4만5천석이라더라.
VIP석이 15만원, R석 13만원, S석 10만원, A석 7만, B,C석 5만, 4만원이니
모두 합치면 한번 공연에 얼마를 거둬들이는 거냐.
그래도 엄청 대형무대이니만큼 준비하는 데 몇 십 억 들어 남는 것은 별로 없다더라.
우리나라 최대의 가수왕이 2시간 반 동안 불러제키는 30여곡의 노래들,
아주 큰 마음 먹고 14만 4천원 주고 2장을 인터넷예매(그것도 한 달 전에)하여
새언니와 같이 간 공연장, 그 돈이 눈곱만큼 아깝지 않더라.
나이 쉰 아홉에도 시들지 않는 조용필의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그가 45주년, 50주년 컨서트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때는 꼭 너와 네 신랑 표를 사줄 것을 약속한다.
사람이 어찌 밥으로만 살겠느냐. 가끔은 일탈을 꿈꾸며 여행도 할 일이고,
영화나 연극, 공연 관람 등 문화활동도 해야 할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같은 일상에 묻혀 아무 것도 못하고,
자신이 여유를 찾지 못하면 봄이 왔다 가는지,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하고
심드렁하다 보면 몸보다 정신적으로 먼저 늙는다.
그건 안될 일이다.
이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만, 다음에는 꼭 표를 사줄 테다.
왜냐하면, 네가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오빠가 보기에는 조용필은 ‘우리들의 꿈’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 컨셉이자 키워드라는 말이다.
100여곡 노래에 들어 있는 일관된 주제가 꿈이다.
그날의 컨서트 주제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랩이라는 것도 이 정도만 되면 오빠도 어느 정도는 적응할 수 있겠더라.
꿈이 없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든?
그가 평양에서도, 전국 순회공연에서도 노래하고 싶은 것이 사랑과 꿈이다.
흔히 말하는 딴따라(광대)가 아니고,
그는 그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걷고 있는 이 땅의 타고난 예인(藝人)이다.
말이 4만 5천명이지, 한번 상상해보라.
오빠는 그게 신기해 공연이 다 끝났어도 일부러 사람구경하러 멈칫멈칫했다.
언젠가 해운대 공개공연장에는 경찰 통계만으로 46만명이 모였다고 하니,
거창하다하다 해도 이런 장관이 어디 있겠니?
그는 말하더라. 정말로 팬들에게 고맙다고,
노래를 부르며 산 40년동안 그에게도 사랑이 있었고 슬픔이 있었다고.
그러나 팬들의 사랑이 번번이 자기를 일으켜 세웠다고.
너도 알지? 첫 부인과 이혼하고, 둘째부인은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슬픔을 딛고 끊임없이 변신을 꿈꾸며 노래를 짓고 부른다.
‘초대형 야외컨서트’시대를 맨처음 연, 21세기에도 결코 감각이 뒤지지 않는
엔터테이너의 길을 이끌어가고 있는 ‘작은 거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오빠가 좋아하는 ‘일편단심 민들레’만 부르지 않아 약간 서운했지만,
30여곡을 부르니 따라 부르지 못하는 노래도 제법 있더라.
너랑 같이 보고 즐겼으면 정말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오빠 친구 중 한 명은 남자동생만 셋이 있는데,
아우 사랑이 어찌 지극하던지, 때론 부럽기도 하고 때론 부끄럽기도 하다.
실제 전화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대사(臺詞)가 장난이 아니더라.
“니가 내 동생이 되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나도 그 친구 말을 흉내내어 세 여동생에게 늘 말하고 싶은 것아 이것이다.
“너희들이 내 동생이 되어준 것이 고맙다.
막내 오빠로서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
그렇지만 사랑한다“고.
네 생각만 하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지는 사랑하는 나의 막내누이야.
어쩌면 너는 그렇게 어릴 적부터 ‘천사표’였니?.
두 언니 위세에 눌려 숨을 못쉬면서도 급식빵 한 조각이라도 남겨뒀다가,
아니 아예 너는 맛도 보지 않고 있다가, 언니들에게 내밀던 너,
그런 너를 ‘원치 않았는데 낳은 아이’라는 뜻으로(물론 애칭의 의미도 있다)
어릴 때 ‘벌 것’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식구들이 놀려대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어머니 아버지,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제대로 교육대 나와
충남지역에 초임 발령을 받고, 결혼적령기에 어쩌면 그렇게 또
충청도 양반신랑을 만나 잘 살고 있는지 기특하기만 한데 ‘벌 것’이라니?
월급에서 자동이체로 친정부모에게 매달 얼마씩 넣는다는 말을 듣고,
명색이 오라버니로서 입과 귀가 부끄럽더구나.
지금도 너는 그렇더라. 큰며느리로서 시댁 식구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새언니와 나는 ‘감탄, 감동 그 자체’일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너처럼 욕심이 없기는 쉽지 않다.
새언니도 오죽하면 어떨 때 “천사 아가씨가 보고 싶다“고 할까.
물론 두 언니도 그런 효녀들이 없지.
너희 셋은 하늘이 낸 효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 자매가 형편도 비슷비슷하게 사니 보기에도 좋고,
우애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말이다. 뭐 하나 부러운 게 있을소냐.
그러니 나는 당연히 여동생 세 명을 금쪽같이 사랑한다고 말하겠다.
일년만에 장문의 편지를 쓴다.
하지만 내가 어찌 1년에 한 통만 쓰겠냐.
마음속으론 한 달에 몇 통씩 편지를 쓰는 오라버니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다오.
이제 밤이 깊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줄인다.
무엇보다 올해 네 큰놈이나 원하는 대학에 쑤욱 들어가 시름을 덜면 좋겠다.
1인 몇 역을 하다보면 피곤할 터이니,
언제나 졸지 않게 운전 조심하고 건강해라.
꼬까오빠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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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쓴 게 2008년이니 벌써 11년 전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도, 어떤 일 한 개도 없었던듯,
여전하고 여실하니, 그것이 기쁠 뿐이다.
두 아들의 앞길이 하루빨리 꽃길이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