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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회 사드반대 김천촛불집회(22.7.10/일)
https://youtu.be/U7uQaU0R59w
빅픽처
2022년 7월 11일 오후 7:00 3 읽음
868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
일요일 저녁 8시 김천역 광장에서 김천평화촛불집회가 열렸다.
오늘도 100여명의 촛불시민이 모였다. 무더운 7월 중순이지만 해가 져서 나름 견딜만 하다. 비가 올까 말까하는 날씨라 습도는 높다. 그들은 오후 6시가 되면 김천역 평화광장으로 나설 채비를 한다. 저녁 촛불을 들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획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 특히 발언과 공연을 행하는 이들은 좀 더 많은 시간을 준비에 투자한다.
0. 집회에 보이지 않는 숨은 일꾼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집회 무대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농사로 심신이 지칠만도 하지만, 삶의 기반과 지역을 지키기 위해 사드가 나가는 그해까지 이 집회 무대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
1. 868회 사회자 사무국장 장재호
1시간의 집회 시간이 구성지도록 전력을 다해야 하는 자리다. 당일 집회에서 가장 적정한 발언이 무엇일지 많은 고민이 있다. 지금은 발언자 섭외까지 1인 2역의 역할까지 부담하고 있다. 예전의 집회 인재들이 마음을 다지고 다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며 오늘의 집회도 끝까지 이끈다. 외유내강형의 리더십을 수년간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다.
2.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앞으로 김천역 평화광장에서 몇 번이나 더 불러질 노래일까?
이곳에 모인 촛불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영상으로 들어보자.
3. 사드배치반대 시민대책위 공동위원장 박태정
공동위원장으로서 제일 큰 고역이 하나 있다. 위원장이기에 집회시 맨 먼저 발언을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찾아오신 손님에 대한 의례일 수 있지만, 너무 자주 하면 이 또한 부담이 된다. 아마 수백번의 발언을 하였고, 오늘의 발언도 수백번의 하나로 남겨진다. 지금까지도 그 누구보다 열정과 신념의 발언을 통해 사드배치의 불의를 지적하며 공동위원장의 자리를 지켜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인데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패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전쟁은 사람이 많이 죽는다. 그래서 전쟁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중국 견제 잘 안되는 모양인지 패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미국이 욕심을 버리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나서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아쉽다. 미국이 1등 지상주의를 버렸으면 좋겠다. 집회 참석자들이 줄어든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자. 사드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반대투쟁을 하겠다.”
4. 김천 부곡동 시민 박병주
역사적 식견이 높아 고증을 토대로 집회시민에게 많은 배움을 주고 있다. 김천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높아 특히 지역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해 다양한 가르침을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도 역사적으로 조명이 덜 된 김천 출신 임경업이라는 인물을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되짚어 본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깨달음을 주는 발언이었다.
“얼마전 6.25가 지나갔다. 72년이나 흘렀다. 6.25.당시 김천에서는 무고한 1200여명이 학살되었다. 보도연맹 관련자, 김천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구성면 돌고개 근처에서 1천명 이상이 돌아가셨다. 당시 임종업이라는 김천 출신 사상가가 있었다.
1920년 일제에 항거한 세력은 조선공산당, 사회주의 계열,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류였다. 청소년 중심의 야학, 노동자에게 강의, 농민들에게는 소작제도 불합리를 외치며 현재의 노조파업 비슷한 일을 하였다. 상주에는 황태성 선생, 김천지역에는 임종업 선생, 선산지역에는 박상희(박정희 형) 선생이 주도하였다. 보도연맹 관련자로 감금되었고, 1950년대 학살되었다.
황태성 선생은 월북을 하였다가 김일성 특사로 한국에 내려왔으나 한국에서 불법월경죄 등으로 사형을 확정받아 집행되었고, 박상희(박정희 형)은 비슷한 활동을 했으나 신원이 복원되었다. 임종업 선생은 황태성 선생은 처남매부지간이다. 임종업 선생의 배우자는 황태성 선생의 여동생이었다. 슬하에 딸이 있었는데 월북하여 김일성대학을 다녔다. 임종업 선생과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임종업 선생의 사위인 권상현 선생(1934년생, 89세)이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도연맹 관련 기념을 하는 행사가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한차례도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때 보도연맹 관련자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해서 신청을 받았긴 했다. 관련자 유족이 많지 않아 신청자 유족은 100명도 안되었다. 그 유족들은 아직까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어 와서 힘든 시간을 겪었다.
우리에게는 과거를 모르고는 현재가 있을 수 없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과거를 복귀하고 반성하며 기억을 해내야 한다. 현재의 사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 시간되시는 분은 7월 14일 11시 경 구성면 돌고개로 와라. 보도연맹 희생자 추모행사를 열 계획이다. 사드반대하는 것도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우리 후손에게 전쟁없는 평화를 안겨주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만이 현재를 바로 살 수 있고 좋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임경업 선생 생애-
1907년 9월 8일 지금의 김천군 김천읍 황금정 7번지[현 김천시 황금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임종업은 김천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23년 4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9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난 동맹 휴교 사건 때문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1925년 6월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시기 그는 사회과학연구회 및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임종업은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전개된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 1927년 6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둔 임종업은 중국으로 건너가 무창(武昌)의 중산대학(中山大學) 예과에 입학. 이후 상해에서 생활하다가 1928년 6월경 귀국 후 고향으로 돌아온 임종업은 잠시 『조선일보』 김천지국을 경영. 신간회 김천지회에서도 활동. 신간회 김천지회는 1927년 6월 경상북도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사회 단체. 신간회 김천지회에서 임종업은 1929년 5월 서무부 총간(總幹), 같은 해 7월 30일의 임시 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임명. 1929년 1월 김천청년동맹 가입 활동.
임종업은 1930년 1월 부산 조선방직주식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신간회 부산지회와 부산합동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김시엽(金時燁) 등과 함께 파업 지원 활동을 전개. 임종업은 ‘우리들은 일어섰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고 그 식민지 착취 정책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격문 200여 장을 작성하여 부산 및 조선 각지의 사상 단체에 배포하였다가 부산경찰서에 검거. 그리하여 1930년 3월 1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제11조와 「보안법」 제54조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31년 1월 19일 출옥.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온 임종업은 1931년 12월 21일 김창식(金昌湜), 박희수(朴喜洙) 등과 함께 현재의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인 김천그룹 조직.
김천경찰서에서 1932년 2월부터 소년들에게 마르크시즘 강좌를 한다는 이유로 지역 활동가들을 검거. 당시 서울에 피신해 있던 임종업은 1932년 4월 김천경찰서에 검거. 1933년 2월 임종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창식, 나정운, 백낙도와 함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동지 규합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어 징역 2년을 선고. 임종업은 복역 중 결핵성 척추염으로 인해 1934년 6월 23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 출옥 후 임종업은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 1933년 4월경 조직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는 약 300여 명의 회원이 독서회와 야학회 등을 운영. 1935년 4월까지 황태성 등과 함께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서 활동.
조직원 이병일이 김천경찰서에 검거되면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의 전모가 드러나 결국 수십 명의 조직원이 김천경찰서에 잡혀 들어갔고, 수개월의 취조 기간을 거친 후 임종업을 포함해 총 25명이 최종 공판에 회부. 1938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은 임종업에게 “조선의 독립 및 조선 내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도모할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한 점과 그 목적 수행을 위해 활동한 점, 그리고 국체 변혁의 목적을 가지고 그를 실행하고자 행동한 점”에 대해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징역 2년을 선고. 이후 임종업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9년 3월 15일 출옥.
해방 이후 임종업은 예비 검속으로 인해 또다시 수형 생활. 1949년 보도연맹 간사장을 지내다가, 1950년 7월 14일 6·25전쟁 중 경찰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
-사회자 중간 발언-
“윤성렬 정부는 사드기지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사차량을 사드기지로 들이고 있다. 일반환경영향평가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성주주민대책위원회에서는 기만적인 일반환경영향평가를 반대한다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정상적인 절차는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드 모두 빼내고 정상적으로 일반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한 후에 결과에 의해서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 사드를 배치하고 나서 일반환경영향평가를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 주민들이 병으로 돌아가고 있다. 국회의 비준도 받았어야 했다. 현재 사드공사차량이 지나가고 있는 것은 불법임에 틀림없다. 촛불시민 등 많은 시민들이 불법사드 철거에 동참해 주시길 바란다.
주민생명 위협하는 불법사드 철거하라! ”
6. 예수살기 장로 강형구
“오늘 발언 요청을 수락했었다. 발언 내용으로 무엇을 할지는 하느님이 알려주겠지 기도했다. 소성리 주민과 인연을 맺게 해준 분을 만나러 갈 계획이러서 소성리에서 2주간 자리를 비울 예정이다.”
“이 세상의 전쟁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해왔다. 그 근저에는 우리들에게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인식한다. 생존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살아남은 것처럼 인식한다. 물리적으로 강한 것을 추구하는데만 젖어있다.
동학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이천시천 - 하늘이 하늘을 먹여살린다”
자연에서 어린 짐승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깨달았다. 아무리 강한 짐승도 어렸을 때는 연약한 새끼였을 뿐이었다. 강한 모성애로 인해 힘없는 개체가 어른 개체로 성장했을 것이다. 단순히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자로 이겨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였다. 세상 부모 없이도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생존경쟁에서 이겨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성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누군가를 짖밟도록 하고, 약육강식 세상만을 강요하는 세력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평화롭고 공존하는 세상을 찾아야 한다.
약육강식 세상에 빠진 사람들을 우리가 구제해야 한다. 미국이란 존재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과연 우리나라의 수호천사인가? 아직도 이땅에는 미국을 천사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미국의 실체를 정확히 알려야 한다. 미국이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미국은 자신 국가의 이익만을 위해 평화파괴 세력들을 지금까지 이용해왔다. 일본의 아베가 군국주의 부활을 가장 앞장서온 인물이다. 이 인물과 그 조사을 어느 나라가 비호하고 조력을 해왔는가? 세계 제일주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평화적대 세력을 키워 오고 조력해 왔다.
우리는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평화 적대 세력의 실체를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다. 우리의 주변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통일을 원치 않는 주변 강대국들이 과연 우리의 친구들인가를 계속 반문하고 질문하자.
우리들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평화적 신념을 계속 전파시키고 행동하자.
7. 원불교 교무 장로 강현욱
“아베 전 총리를 기억해 보자.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선두주자였다. 한국과의 역사왜곡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최근 대법원 판결상 일본제철에게 일제강제징용자에 대한 배상결정 대해 가장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이 바로 아베 전 총리다. 아베 전 총리는 한국에 경제보복을 단행하였다. 수입제제가 아닌 수출제제를 강행했다. 대상은 반도체였다. 그 당시 일본의 반도체 수출제제시 보수정치 세력과 보수 경제학자, 보수언론 등에서 어떠한 행태를 보였는가? 이들은 한국반도체 기반을 살리기 위해 일본과 관계 해소를 위해 일본에 굴복해야한다는 일색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 결과는 반도체 산업이 탈일본 계기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성과만이 아니었다. 이때 노재판 운동이 벌어졌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일본 맥수 매출이 1위에서 27위로 떨어졌고, 유니클로 매장이 급하락했고, 닛산자동차가 철수했다. 일본은 결국 제제조치를 풀지 않았다. 한국은 한일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 국민과 정부가 합심하여 대응하였다.
그런데, 한일지소미아 종료를 철회하는 것을 연장한다. 지소미아 종료를 철회하였다. 조건은 일본이 반도체수출제제를 철회하고, 여행제한조치를 철회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이 입장변화를 한 것은 미국의 압박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일관계정보보호협정에 대해 미국은 상원의원 결정을 내리는 등 내정간섭 수준의 행동을 했다.
문재인 정부의 아쉬운 대목이었다. 사드배치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현재 윤석렬 정부의 대일본 정책은 아주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강제징용배상에 대해 강제징용민간협의회를 꾸려 300명만을 골라서 보상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피해자끼리 갈라치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합의 처리 방식이다. 박정희 시절 한일배상청구권을 처리했던 방식과 비슷하다. 역사를 왜곡하는 보상 방식은 피해자에게 제2차 가해를 하는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행위이다.
한일위안부보상 협정의 주요 원인은 한미일 군사동맹 실현이었다. 한미일 군사동맹에서 제일 걸림돌은 한일간 역사적 문제였다. 한일위안부 합의 끝나고 바로 지소미아 합의였다. 그 다음이 바로 사드배치였다. 한미일 군사 동맹의 핵심이 미국의 MD체제이다.
역사적인 문제를 제대로 기억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 보수세력이 취하고 있는 역사 문제 인식은 너무도 유사하다. 윤석렬 정부의 한일외교, 한미외교 정책방식이 예측된다. 식민지 사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정책이 나올 것이다. NATO 행사에서 윤석렬 정부는 외교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의 굴욕적인 외교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우리 국민들이 두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한일위안부합의도 무력화되었다. 우리 국민들은 변화했다. 우리 국민들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왔다.
‘염원은 이루어진다. 행동과 같이한다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기도의 원리이다.
윤석렬 정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두운 시절로 회귀하려할 것이다.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을 계기로 이를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2022년은 다르다.
촛불이 하나라도 켜져있는 한 어둠이 될 수 없다. 촛불 하나만 켜져 있으면 된다.
여기 김천집회에 많은 촛불이 켜져 있다. 절대 어둠은 불가능 할 것이다.
8. 율동천사 라희 “가자 통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