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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부르시는 남은 자들
스바냐 3:8-13
지구상에서 유다 백성들만큼이나 하나님을 아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직접 선택하신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직접 말씀하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이 침략해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난 역사 속에 계셨던 그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현실의 삶에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하니까 자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피조물을 가지고 만든 수많은 우상들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쯤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했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상쯤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예루살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도성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상숭배와 강포가 넘치는 악행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범죄와 타락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모순적인 신앙생활은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한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우리들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속에서 섭리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과 시간에도 여전히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공간과 시간의 제한에도 구애를 받지 않으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무신론자들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그때 그 시대에 역사하셨던 분일 뿐 오늘의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갑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수많은 우상들처럼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여호와께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현실의 삶이 전혀 다른 모순된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와 세상은 이처럼 타락하거나 세속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우상과 같은 그런 의미가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 적이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부인하지 못하도록 자연과 계시 등 당신의 방법을 통해 충분히 자신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는 우주와 자연의 현상들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토록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던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스바냐 선지자는 3장 1절부터 7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믿음의 백성들을 바르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만들기 위해 네 가지의 수단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단들은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유다 민족을 향한 사랑의 도구가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수단들은 첫째로, 스바냐를 포함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그릇된 길로 갈 때마다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끄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언약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이끌어내셔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면 생명과 복을 주시며, 여호와께서 주신 그 땅에서 영구히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사망과 저주를 주시며, 여호와께서 주신 그 땅에서 내쫓아서 세상으로 흩어져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성실히 지키고 따를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성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살면서 저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한 가나안 문화에 취해 살면서 저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내팽개치고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에 빠졌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주야로 끊임없이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저들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공의와 정의로 사회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과 같은 약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하나님은 그들 주변의 여러 이방 민족들을 전쟁을 통해 끊어버리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동서남북으로 사방이 강력한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며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 싸워서 스스로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500년의 왕정 역사에서 때로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의 침략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바다의 모래와도 같은 이방 민족들의 대군들을 전멸시키셨습니다. 그때에도 그들이 그 전쟁에서 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셨고, 이기게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역대하 20장에 보면,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왔을 때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사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대군을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연합군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이 전쟁에서 유다 백성들이 한 행동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전쟁터에서 버려져 있는 재물과 의복과 보물을 거두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하 20장 33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지속될 때는 세상을 쫓아 살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스바냐 시대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처럼 어리석고 완악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과 사방팔방으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그처럼 친구 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편만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이나 금과 같은 재물과 세상의 권력이 자기들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왕 되신 하나님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망할 짓만 골라서 했습니다.
결국 유다는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을 잘 돌보아야 할 유다의 방백들이나 정부 관리들은 오히려 굶주린 사자들처럼 백성들을 삼켰습니다. 약자들을 변호하도록 되어 있는 유다의 재판장들은 뇌물을 받고 늑대와 같은 탐욕으로 자신들의 야욕을 채웠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가볍고 천박하며 허풍으로 가득한 수다쟁이들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해야 할 책무가 있는 유다의 제사장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세속화시켰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 그리하면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찌 보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같아서는 그냥 싹 쓸어버리고 다른 민족을 선택하시면 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못된 짓들을 골라서 하는데, 하나님은 그와 같은 저들을 살리기 위해 애원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세우시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점점 더 부지런히, 더욱더 못된 짓을 골라 가면서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으며, 피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스바냐서에 담겨진 내용입니다.
우리가 스바냐서를 읽어보면 전반부는 분위기가 매우 어둡습니다. 범죄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장의 후반부인 본문의 말씀부터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즉, 남은 자들, 그들은 역사의 그루터기요, 희망의 그루터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남은 자들을 붙드셔서 그들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일깨우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따라서 이 남은 자들 속에 들어가는 축복, 이것이 바로 스바냐서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본문에서 ‘너희는’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예루살렘과 불의한 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만약에 본문이 앞의 7절에 이어지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너희’는 타락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나아가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맞는다면 본문의 ‘기다리라’는 말씀은 심판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성도들로서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본문에서 ‘기다리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앙망하라’, ‘바라라’로도 번역되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기대감과 소망을 가지고 어떤 대상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은 소망과 인내 중에 자신의 신앙을 꿋꿋하게 지키며 여호와만을 바라보는 남은 자들의 훌륭한 덕목입니다.
무엇보다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라는 말씀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그들 위에’ 쏟으려고” 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글개역개정판에서는 ‘그들 위에’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7절의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던 ‘그들’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너희’는 당연히 ‘그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 즉 여호와의 구원을 앙망하는 신실한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기다리라’는 것은 ‘심판을 기다리라’는 부정적인 어조의 말씀이 아닌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너희’는 2장 3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 곧 유다의 남은 자들로 대표되는 세상 만민 중에서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만세대의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다리라’는 말씀은 만세대의 경건한 성도들, 죄악된 세상에서도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남은 자들을 향하여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의미의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남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스바냐 선지자가 전하는 남은 자들의 자격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과연 남은 자 속에 낄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초청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앙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어두운 시대에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일까요?
첫째는, 여호와를 부르는 자입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본문에서 ‘그때’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입니다. ‘그때’는 부지런히 행위를 더럽게 하였던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의 심판 중에도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았던 남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날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날이 오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부른다’는 말은 입술로만 건성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즉 깨끗함을 얻고 죄사함을 얻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날마다 최고의 예배가 드려졌었습니다. 절차나 찬양이나 제물이나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에서 드리는 그들의 입술은 부정하고 더러웠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그 우상을 향하여 부르짖던 입술을 가지고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온갖 부정한 말과 교만하고 음란한 말, 거짓된 말을 일삼았습니다. 그 입술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있고 감사가 있는 예배,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 있는 예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예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섬기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된 입술을 가지고 여호와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깨끗한 입술과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남은 자’라는 개념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로마서 10장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바로 ‘남은 자’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어두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남은 자들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다수의 사람들이 주님 없이 살아도,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배척하여도 남은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말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행위가 입술만의 고백이며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외침이어서는 결코 남은 자들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여기에서 ‘곤고하고 가난하다’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온유와 겸손’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온유하고 겸손한 백성을 너희 가운데 남겨 두리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앞의 11절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과는 전적으로 대조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곤경에 처한 자들, 가난하여 먹고 살기 힘든 자들을 나타낸 것이라기보다 자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남겨두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 소수의 남은 자들은 생명의 좁은 길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에 섰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고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들을 취했습니다. 그렇지만 남은 자들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 그 길이 아니라 힘들고 외로울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마음이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그날에 넓은 길로 갔던 교만한 자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에 남겨두셔서 예루살렘의 영광과 축복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예루살렘이 회복되었을 때 그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어두운 시대에 남은 자가 되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생명의 좁은 길을 걸어가 장차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거듭난 자입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여기에서 ‘그날’은 9절에서의 ‘그때’와 같은 때로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날에’ 남은 자들은 여호와께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행위’는 그들에게 심판을 가져오게 했던 불의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불의한 행위들, 여호와께 범죄했던 그 모든 행위들이 결코 그들에게 심판이나 고난, 그리고 수치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해 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만은 거룩한 성읍에서 사라질 것이며, 포악하고 수치를 모르는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결국 ‘교만한 자’는 절대로 남은 자들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로 남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교만한 자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끝까지 신뢰를 두고 있는 자들입니다. 교만이 꺾이지 않는 한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단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교만을 넘어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교만이 꺾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만은 바로 넘어짐의 앞잡이요,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장소로 제시되는 ‘나의 성산’은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임하는 곳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결코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산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신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성산인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인 남은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안에 심겨진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거듭난 사람들만이 남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함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산에 거하는 남은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게 될’ 것입니다. 즉 불의가 없는 하나님처럼 남은 자들도 역시 불의가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남은 자는 타락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남은 자들의 신뢰는 자신들의 삶에 있어 거룩한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으면서 평화와 안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예배는 결국 하나님에게 순응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서 과거의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거룩하게 거듭나야만 합니다.
삶의 변화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재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그 터전과 동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속된다면 분명히 거룩한 삶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처벌하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망을 두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상을 심판하셔야 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을 향해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은 중생한 후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내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고 거룩한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남은 자들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그들로 인해 세상이 이 정도라도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화된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에는 불신앙의 파도가 넘실대고 있습니다. 인간성은 더욱 흉악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도 남은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남은 자를 찾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남은 자들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의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의 특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될 남은 자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남은 자들인 믿음의 성도들인 우리는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너무나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참된 평화와 안식을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살아갈 사람으로서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씀하는 남은 자들의 삶의 모습은 이 땅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즉,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자가 되어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향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어야 합니다. 그 삶이 바로 성화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상 속에서 남은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남은 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은 부정이 없는 성읍이 될 것이며,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온전해질 때 온 세상이 온전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목적도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이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에 남은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지 아니할 남은 자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삶의 반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지막 기대는 남은 자들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도 남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남은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천국과 같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터전으로 가꾸어지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세워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