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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
사도행전 4:1-12
‘복음’은 말 그대로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창문도 없고 출구도 없고 통풍도 전혀 되지 않는 공간에 갇혀 숨도 거의 쉬지 못하는 상태에 갇혀 있는 인생들에게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죄 가운데 인생의 수렁과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내어 맑고 시원한 물에 깨끗이 씻겨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즉시로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향해 이런 말을 담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들은 스스로 알아서 구원의 길을 찾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으로 질식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의 길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은 다른 누구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인간이면서도 완벽하게 죄가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있습니다. 탕자를 위한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복음, 다시 살아나게 하는 복음, 다시 새로워지게 하는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숨 막힐 듯한 뜨겁고 건조한 열기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살려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며, 그들이 바라볼 영원한 산 소망을 주는 복음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이 위대한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믿는 순간 그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처럼 위대하고 복된 복음을 거부합니다. 단순히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 앞에 대적하기도 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삶도 무서워하고 죽음도 무서워하고, 죽음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세계도 무서워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음을 조롱하고 거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부터 인간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거나 그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때가 찼을 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불신앙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였던 경악할만한 행동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거부와 박해는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예수님께 했던 끔찍한 행동들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에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행동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했는데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살 수 있는 복된 메시지라는 생각도 사실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언제나 복음을 미워하며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잘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전쟁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지난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 곳곳에는 사람을 죽이고 파괴하는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참혹한 전쟁의 실상들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곤경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지닌 지도자들이 문명을 끝장내 버릴 수 있는 힘과 권력을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비극의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류의 여러 복잡한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면 나라와 나라들 사이의 전쟁은 그칠 것이며, 모든 분쟁과 미움과 싸움도 사라질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여호와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이 땅에는 전쟁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 앞에 전투적으로 반발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현대의 특징”이라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 성전 미문으로 올라갔다가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매일 친구와 친척들에게 업혀 와서 미문 앞 길바닥에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거지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길바닥에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도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을 본 이 사람은 여느 사람에게 하듯이 구걸을 했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베드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 사람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하더니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성경은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엄청나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원래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군중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군중들은 평소에 늘 보던 거지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고, 심히 놀란 표정으로 그 일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건의 속편을 보게 됩니다. 보십시오. 태어나서 40년 동안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어다니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누군가가 가공해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짜 뉴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건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의 주인공이 지금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이 사건으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방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맡은 자들은 기적도 보았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들이 두 사도에게 어떤 짓을 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또 사도들은 어떤 대답을 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마치 그 자리에 앉아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에는 사도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그들을 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해서 함부로 다루고 있는 관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통해 관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일은 왜 일어났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왜 이렇게 반응했습니까? 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복음을 거부할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깊이 집중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첨단 과학기술 문명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 중에는 기독교가 오늘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앙은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세기 예루살렘의 사람들도 똑같은 불신앙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도 믿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예수님도 믿지 않겠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역사는 복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역사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큰 세력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의 본문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당시 유대 최고 법정에 해당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사도들을 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사실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극심하게 분열된 채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더구나 사두개인과 장로와 서기관들의 반목은 특히 더 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먼저 ‘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반열로 나뉘어 있었고, 반열 별로 6개월에 한 번씩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일주일 동안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전 맡은 자’는 레위 족속 중에서도 특별히 성전 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역할을 맡은 무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로서,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두개인’은 일종의 제사장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는 정치인들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호가 호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책략과 음모에 능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실 정치인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종교적인 행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아무 관심도 없었으며, 본질적으로 냉담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몸의 부활을 거부했으며, 사람이 장차 받을 상급이나 형벌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천사를 비롯해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유물론자들로서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뿐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두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들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여기에서 ‘관리들’은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제사장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정보가 없는 요한과 알렉산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사두개인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바리새인들로서 구전 율법과 조상들의 가르침에 정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과 천사와 심판과 상급과 형벌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율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탄압하는 일에 뜻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도 똑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미워하는 사이였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는 악한 일에는 즉시 하나가 되어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 그대로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아담 이후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불신앙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무리들입니다.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고 사도들과 교회를 박해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불신앙 그 자체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연합시키는 방식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된 21세기의 현대인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1세기의 사람들이 반대했던 바로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복음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 강하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들을 향한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말에 담긴 경멸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본문에서 ‘너희가’는 ‘너희와 같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와 같은 자들이.” 이 말에 담긴 저들의 빈정거림과 경멸감이 느껴지십니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이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말인가? 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의 말을 들으러 왔다는 말인가? 너희가 대체 뭔데?” 그들의 말에는 경멸감과 빈정거림과 도발과 조롱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결코 평범하지 않은 놀라운 사건이 그들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평생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여기에 있는 두 사람이 주도한 것이 분명한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주 놀라운 설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3천명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들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에 대해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들어보십시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산헤드린 공회에 모였던 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켜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이다.” 사도들에 대해 갖고 있던 저들의 선입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미천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무식하고 평범하고 하찮은 촌놈이었습니다.
물론 3년 동안 나사렛 예수를 따라 다녔으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지도자였던 나사렛 예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그도 또한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가말리엘 수하에서 배웠던 바울처럼 랍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규적인 랍비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성경은 관원들이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일종의 권위를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는 법입니다. 설교자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 말에 권위가 있음을 알고, 그 말의 사실성과 능력과 힘을 느낍니다. 본문에 나오는 관원들도 확실히 그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관원들은 변론 중에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가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고, 그 외에도 전혀 막힘이 없이 율법에 대해 박식한 사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무엇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어디에서 이처럼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까?” 그렇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3천명이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당시는 설교를 한 후에 “영접할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라고 초청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저 3천명이 실제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고, 모두에게 그 일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으며,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박해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3천 명이 회심하고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였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그런데 회심자들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심자들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120여 명이었던 성도가 이제 성인 남자들만 5천 명이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당국자들도 “도대체 무엇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말을 할 수 있게 했을까?”라고 한 번쯤은 물어 볼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보였던 반응은 “옥에 가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관원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목격하고, 예루살렘을 진동시킬 만큼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로 합류하는 현실에 대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적이 명백한 사실이었던 만큼 자신들도 외면하려고 해야 외면할 수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더구나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실 그들은 꼬투리만 잡을 수 있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장본인이 그들 앞에 꼿꼿이 서 있었습니다. 명백한 증거, 명백한 사실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은 사실을 직면하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오히려 사실을 철저하게 무시해 버립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불쾌하게 여긴 것은 바로 베드로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도 거부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위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참여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성전 맡은 자, 제사장, 장로들은 사회 최상층 지도자들로서 일반 대중들이 늘 올려다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칭 사도라는 두 사람의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선생으로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전반적인 지위와 권위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부활이 없다고 늘 말해 왔는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설교를 듣게 되었을 때 사두개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여기에서 격한 감정이 개입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러분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심리상태를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불신앙에 항상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불신앙은 아주 옹졸하며 아주 편협합니다. 불신앙은 영광스러운 기적 자체는 보지도 못한 채, 그 지적을 행한 주체의 권위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불신앙은 위대한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자격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놓쳐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과학이 우주를 완전하게 설명해 주며, 만물은 과학이 규정한 범위와 한계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복음이 침입해서 그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기적과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이야기합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심판과 영원한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조롱과 거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이 자신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느낀 감정이었고, 오늘의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던 복음이 실상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대한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와 그리스 철학에 배척당하고 로마와 유대인들에게도 배척당하던 한줌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한줌의 무리들을 변화시켜 로마제국을 뒤엎고 세계를 살리는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성도들로 인하여 이 땅은 복음의 깃발을 더 높이 휘날릴 것이며, 이 땅을 살리는 주도적인 세력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회부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과 군중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도 없으신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고발당할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권력자들과 군중들은 증거를 날조하고 고발거리를 꾸며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거짓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해서 갈보리라는 작은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방식으로 나무에 달려 극심한 괴로움과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 버렸다면 앉은뱅이는 여전히 미문 옆 길바닥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그런 설교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망의 줄을 끊어버리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없었다면 사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은 일어났고, 사도들은 성령과 능력으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온 인류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복음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진홍같이 붉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죄 가운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때가 되었을 때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증언했던 설교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거부했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대인들도 1세기 당시의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세상의 비극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로맨스에는 흥미를 느끼고, 소설이나 영화는 쉽게 믿으며,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판타지에는 흥분하면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은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인 마귀와 죄와 악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맨 나중 원수인 죽음까지 정복하시고 이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사람들이나 오늘의 사람들은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군중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착한 일 밖에 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혜택을 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고통과 곤란을 덜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동정심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목 박히셨습니다. 착한 일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히고 재판에 회부된 것도 태어날 때부터 걷지를 못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일 때문이었습니다. 착한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고 탁한 공기 속에서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신선한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어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용서와 양심의 평화, 마음의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새 생명, 새 능력,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이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앉은뱅이처럼 그렇게 주저앉아서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앉은뱅이처럼 벌떡 일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똑똑한 체하며 복음과 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을 외면하면 할수록 세상은 부도덕과 죄악과 부정직함으로 점점 더 치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처럼 세상 사람들이 두 손을 들어서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당연히 복음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순교를 당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저들을 살리고, 이 땅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착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통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