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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그 이름, 예수
사도행전 4:11-12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은 복음을 알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는 사실 너무나 절박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긴박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며 긴장 속에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는 오늘 이곳에서 살다가 내일이면 한줌의 흙으로 사라져 버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영원한 심판 앞에 직면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문제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입니다. 복음 외에 다른 방법이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복음 앞에 조롱하고 멸시하며, 적대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앙 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세상이 지금과 같은 불행과 극심한 곤란에 빠져 있는 이유는 순전히 구원의 복음을 거부한데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보고서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복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 세상에서 보다 안정된 환경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시간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시간들은 장차 들어가게 될 영원의 시간에 비교한다면 한낮 나그네요, 뜬구름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뜬구름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영원한 시간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잠시 후에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에는 장차 그들이 영원히 겪어야 할 고통과 저주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많은 곳에서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저들의 눈을 열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천국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향해 품었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묻는 저들을 향해 베드로는 당당하게 설명합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무슨 권위와 능력으로 이 사람을 고쳤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 답은 당신들이 거부한 나사렛 예수, 그분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까?”
베드로는 구원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하고, 박해하고 있는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저들의 영혼을 염려했습니다. 저들은 이 땅에서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 지엄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자신들까지 박해하고 있는 예루살렘 권력자들을 단순히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 앞에서 똑똑한 척하려고 이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재판에 회부된 상태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손에 자기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결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고, 그들이 이 진실을 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실은 오늘날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 42절에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베드로도 자신이 기록한 베드로전서 2장 7절에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편 118편 22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본문에서 핵심 단어는 ‘건축자들’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들인 서기관과 제사장,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앞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건축자들’이었고, 당시 최고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인용구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우리가 거할 성을 짓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명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성을 지을 수 있노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성을 짓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지금 시편 118편의 인용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저들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두 사이의 갈등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런 건축자들을 비웃으셨으며 앞으로도 비웃으시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에 이것이 그 당시에 적절한 말이었다면 오늘날에도 당연히 적절한 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말씀은 자칭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본문의 11절을 통해 불신앙의 좀 더 깊은 두 가지의 측면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불신앙의 두 가지 측면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은 그들이 과녁에서 벗어났으며,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장 자주 말씀하는 바는 결국 그들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본문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경건한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에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삶을 훌륭하게 정비해 놓고 자축했습니다. 그는 곳간이 넘칠 정도로 많은 곡식을 수확하자 더 큰 곳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오늘날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보십시오. 이 사람은 분명히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을 향해 “인생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많은 재산을 가졌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겨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어느 누가 이 사람을 향해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결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을 향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 부자의 어리석음은 피조물로서의 한계와 위치를 잊어버리고,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았을 뿐, 이것으로 이웃을 구제하거나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이 세상의 창고에만 자기의 재물을 쌓았을 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의 그 사람만이 아니라 물질문명의 홍수 가운데 휩싸여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어리석은 부자가 걸어갔던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지 않는 불신자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불신자는 어리석다고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증명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어리석음이 특별히 ‘자기기만’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람이 좀 신중하지 못하네.” 그러나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집을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릿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들은 자랑스럽게 스스로 건축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들이 저지른 짓은 머릿돌이신 예수를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베드로는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복된 얼굴을 보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분을 욕하고 조롱하고, 거부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도 없으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아집과 편견으로 눈이 멀어 영광의 주님과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그분의 제자들까지 위협하며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자칭 건축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거침없이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기만에 빠져 있음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름표를 달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건축자들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내세웠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무능한 건축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폭로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보여주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지적 자부심을 품는 죄를 범하였음을 밝힘으로써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자칭 건축자라고 했던 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혼란과 갈등을 해결하고 완벽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 일을 위한 계획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사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유능한 건축자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인간은 지각이 있는 존재여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오늘의 현대인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거부하는 원인의 뿌리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본문에서의 ‘건축자들’은 오늘의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 증명하고, 확인한 것만을 믿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현대인들은 건축자들로서 자신들의 지성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성과 판단으로 이해되지 않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다 거부합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이성과 경험과 판단 안에 쓸어 담아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루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건축자들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오해함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인류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이 그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자신들은 능력과 두뇌와 지식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고, 자신들에게 치료법이 있다는 이유로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무엇입니까? 이성만 적용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손에 문제만 맡겨 놓으면 됩니다. 인간은 멋진 존재이자 굉장한 지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죄가 어떤 악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설명해 주고, 보여주기만 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다량의 알코올이 얼마나 해로운지 통계적으로 입증해 주기만 하면 더 이상 과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박과 성적 타락의 결과만 보여주면 당장 그 짓을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극히 이성적기 때문에 호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을 설교하고 윤리를 주입하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사회적 이상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단 교육만 시켜놓으면 더 이상 지나친 죄는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교육만 시켜놓으면 서로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를 깨닫고 전쟁을 추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모든 인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사태를 진단할 능력과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들은 인간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음주 운전을 하고, 도박을 하고, 불륜을 저지를까요? 전쟁의 끔찍한 참화를 몰라서 인간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철저한 자기기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무능한 감식가가 아니라 돌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무능한 감식가입니다. 보십시오. 건축자라면 누구나 적합한 돌을 찾고 싶어 합니다. 특히 가장 큰 벽들을 지탱하고 결합시켜 주며 건물을 받치는 토대가 되는 큰 머릿돌을 찾고 싶어 할 것입니다. 머릿돌! 건축자라면 당연히 이런 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마추어는 이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건축자들은 돌에 관한 한 전문가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권력자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그들은 그 돌을 거부했습니다. 말하자면, 큰 돌이 제 발로 굴러 왔는데도 무시하고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 해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자기들의 눈앞에 계시는데도 비웃고 조롱하며 거부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보여주고 있는 비극이며, 오늘 우리의 시대가 보여주고 있는 비극입니다.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불신앙의 두 번째 측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허망함입니다.
‘허망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이가 없고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허망함’은 ‘어리석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세상에 불신앙 보다 허망한 것은 없습니다. 불신앙은 항상 말뿐입니다. 베드로가 시편 118편을 인용하면서 폭로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권력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말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해 놓은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건축자가 하는 일은 건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날림 건축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날림 건축자들은 언제나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건축자를 검증하는 잣대는 그가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세운 건물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의 예루살렘 권력자들처럼 복음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건축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문제의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복음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인간이 인류 역사에서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구조적인 발전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문명이 오랜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만들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에 의한 문명이 세워놓은 건축물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것은 끊임없는 전쟁과 파괴와 약탈이었습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역사였습니다. 건축자들이 해놓은 일은 세계도처에 도살장을 만든 것이 전부입니다. 그 결과 지금 온 세상은 썩어가고 있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앉아서 조용히 쉴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항상 계획을 세우고 끊임없이 새로운 바벨탑을 쌓아올렸지만 정작 이루어내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온 천지에 말뿐입니다. 아무것도 세우지 못하는 불신자들의 말들은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단단히 못 박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베드로는 나중에 그가 쓴 서신서에서도 또 한 번 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심문하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향해 베드로는 담대하게 설명합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당신들이 무덤에 장사한 그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그를 아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건축자들은 그를 거부하며 교활하게 음모를 꾸며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망의 줄을 끊으시고 승리자로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그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태어나면서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그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본문 12절에서 결정적인 복음을 선포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늘날 세상은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큰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분명한 단언이자 기독교 메시지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이 한 구절에 기독교를 판별해 줄 궁극적인 시금석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운다고 해도 이 시금석에 맞지 않는 것은 가짜입니다. 본문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인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고 아주 명쾌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이 구절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너무 편협되고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기독교만 옳고, 기독교에만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비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저들은 세상 모든 종교들에는 다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각각의 종교들은 구원을 향해 추구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며, 결국에는 모든 종교들이 구원이라는 하나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구원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구원이 아닙니다. 저들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오늘 본문의 이 한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구절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전 세기에 걸친 사람들을 구원했고, 지금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첫째 가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체가 완전히 마비되었던 사람,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이 사람에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고쳤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를 고쳤습니다. 성경에서 “…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의 권세로”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물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지금 여기에서 “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첫 번째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스스로 혼자서 구원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친히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방법을 가르쳐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자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것이 첫 번째 명제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런데 말씀을 드렸듯이 세상 사람들,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 말씀을 반대합니다. 저들은 기독교만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복음 전체가 걸려 있는 핵심 되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온 인류에서 유일한 구주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주장 가운데 가장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만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나는 세상의 떡”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참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이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똑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을 써서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하면서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든 앞으로 태어날 사람이든 다른 인간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럿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 뛰어난 사람 중에 으뜸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독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여럿 중에 하나인 양 말합니다. 그들은 위인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세, 공자, 석가모니, 무함마드 등 위대한 인물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태도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다른 이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2인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으냐 못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타락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이 있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지엄하신 심판 앞에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하고 무서운 저주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타락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오염되고 무가치한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 변호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존경할만한 스승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죄인된 인간이었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었던 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자격을 다 갖추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정복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는 맨 나중 원수인 죽음까지 정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세상에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다 이루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자칭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건축자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십시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서 계신 분은 단 한 분밖에 없는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를 거부하면 최소한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다가 결국에는 일말의 희망도 없이 공포에 휩싸여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 무서운 지옥에서 자기의 똑똑함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했던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고, 여러분의 무력함과 희망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다 이루셨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건강한 예배자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그래서 죄의 자리에서,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천국을 향해 남은 삶을 완주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