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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가?
사도행전 4:32-37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통해 기독교는 무엇이며,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기독교는 단순한 철학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도덕적 행위나 윤리관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망과 저주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허락하신 유일한 진리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하시는 활동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에게 아무리 사소한 체험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신 체험이 전혀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반드시 어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무가치하고 건조한 지적 신념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체험은 단순한 체험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체험을 줄 수만 있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체험이든 상관없이 체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에게 체험을 제공하는 매개체들은 기독교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사이비 집단들이나 다른 종교들에서도 그들 나름의 체험을 제공해 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단사이비 집단들이 그런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체험의 타당성을 검증해 보려면 그 체험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도 체험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순히 체험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체험을 주신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40년 동안 한 번도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실제적 사건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교회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실망과 낙심에 빠져 슬퍼하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가 크게 낙심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이 그들의 인생 전부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엄청난 부활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극심한 위협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모든 일들에 확실한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그 증거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뿐 아니라 그의 부활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위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위대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원수들의 온갖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았고, 장사되는 것을 보았으며,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과 권력자들에 의한 핍박이 교회 공동체를 와해시키려고 위협할 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자기의 권세 안에 두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권세자들에 의한 핍박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능하신 손밖으로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핍박과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협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을 소멸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계속 전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3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하게 전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심령을 흔들고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으로 교회가 날마다 자라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요약해 놓은 교회의 역사입니다. 누가는 앞서 사도행전 2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할 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에 3천명이, 몇일 후에는 2천명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신약 시대의 최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들과 비교하면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교회였습니다. 반듯한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그런 위기의 처지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피하고 싶은 교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상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이 꿈꾸며 부러워하는 멋진 교회였습니다. 누가는 42절에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의 모진 바람이 휘몰아쳐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집에 모여 떡을 먹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제하는 가운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한 마디로 건물보다 교인이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진짜 교회의 모습입니다.
특히 누가는 2장 47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놓고 본다면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가 사회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이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로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권력자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금지령까지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권력자들의 위협과 협박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이 단지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 증언뿐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사랑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후 성령 충만한 공동체의 특징들을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이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 두 번째로 그와 같은 공동체의 특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 42절 이하에서와 본문의 경우에 강조점은 같습니다. 즉 2장 4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 32절에서도 믿는 무리가 다 밀접하게 사랑으로 결합된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귀는 일’에 힘쓰면서(2:42), ‘함께 지냈고’(2:44),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4:32). 한 마디로 예루살렘 교회는 극심한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바깥으로는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안으로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힘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를 되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의 교회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오늘의 세속화된 교회가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교회를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청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모두가 사랑으로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였습니다.
본문 3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핍박과 환난이 시작된 것을 알면서도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마음과 한 뜻’은 그 뜻과 혼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두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전에 그들은 서로 으뜸이 되려고 했습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는 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며 시기했습니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공동체 안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이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나라가 각기 다르고, 천성 또한 세상의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그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생각만 하면서 살았고, 자기만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지하고 눈먼 바보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만 옳고 남들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보니 모든 사람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 없이 모두가 바보들입니다. 절망의 흙먼지 속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이해력과 관용과 사랑과 서로 도우려는 열망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기쁘게 자기를 내주었고,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는 진정한 평화와 친교가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삶에 적용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다시 태어났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새 본성과 새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는 앉은뱅이와 같은 가난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참으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 덕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나거나 의로워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자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똑같은 운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몸이 되어 한 구주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가 이전에 생각했던 삶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는 인생의 삶을 단순히 먹고 마시며 돈을 벌고 돈을 쓰는 터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물건은 돈으로 살 수 있어도 행복이나 영원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하나의 여행이자 순례에 불과하며, 우리는 나그네요 순례자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곳이 잠시 지나가는 악한 세상이요, 만물이 변할 수밖에 없는 세상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매일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은 전부 지나가고 있으며, 장차 우리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시는 날 타락한 세상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곧 사라질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은 진짜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고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고향만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 13:14, 현대어성경).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장소로 여깁니다. 그런데 내 재산을 과시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아등바등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땅의 삶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이요, 한 영원한 집을 똑같이 얻도록 지음 받은 사람들이요, 한 영원한 기업을 똑같이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보면서 시기와 질투, 경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힘입니다.
둘째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본문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리는 본문에서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모여 있는 광경을 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핍박과 위협 앞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모여서 서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들 가운데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건물이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정죄하면서 입을 다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자들의 위협에 기가 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계속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건물을 진동시키셨습니다. 이것은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실에 대한 보고입니다. 성경은 건물이 어떻게 진동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크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즉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천지 창조의 주체자로서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전능하신 분, 온 우주를 살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만물의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그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얼마나 크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충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그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지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서 그 앞에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언어적 표현을 다 동원해도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가슴에 와 닿도록 알리고 싶어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하면서, 이어지는 20절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실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 무덤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귀와 지옥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요, 영생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맨 나중 원수’인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멸망해 버리셨습니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이것은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무리가 ‘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계속 말씀을 전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말살시키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지엄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임하셨다는 사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는 강력한 힘이요 위로였습니다. 교회가 오랜 역사에서 핍박과 환난의 세찬 폭풍우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에 우리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본문 3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이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 결과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하던 곳이 진동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킨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쪽에는 그 능력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혜’라는 단어는 ‘호의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이미 인간은 그 자리에서 소멸되어야 마땅했습니다. 인간이나 세상은 그 자리에서 몰살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오래 참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죄악으로 넘치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한 민족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열방 가운데 드러내시고,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을 주시려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셔서 제사장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복과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며 율법에 순종하면 하늘과 땅의 풍성한 복을 받을 것이며, 열방을 향해 그 복을 전해주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신들을 찾아다녔고, 하나님께 모욕이 되는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나쁜 짓은 골라가면서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외면한 배은망덕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징벌을 받아 마땅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백성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원수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들은 극심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채 하나님께 돌아와 살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는 매번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고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기회를 주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인간의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단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만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지렁이보다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단에서 전할 메시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진정으로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베들레헴 여관의 허름한 마구간으로 가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방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에게 반역한 세상, 그를 조롱한 세상,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세상, 자신이 그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그저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려고, 무례한 조롱과 수치와 모욕과 온갖 고통스러운 일들을 견뎌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디도서 2장 11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하나님의 은혜!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부요하신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고 구속하셔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난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죄로 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저주 가운데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항의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래 죄악 중에 태어났고, 죄악 중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이 놀라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서의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은혜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감사하게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강력하게 그들 가운데 임했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사를 읽고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강철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에 신자들은 자신의 것을 풍성하게 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유하기에 급급할 뿐 아니라 무정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만 흡족해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세상의 다른 단체와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어느 단체와 비슷하거나 같다면 우리는 교회에 나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스스로 교회 공동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 공동체 속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세상에서의 환난과 핍박이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고 위협하는 사람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이제 잠시 잠깐 후면 그들은 지옥에서 마지막 재난의 끔찍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진동이 아니라 지옥에서 영원히 멈추지 않는 무섭고 두려운 진동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잠잠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된 가운데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는 즐거움과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위협 속에서도 놀라운 기쁨과 찬양과 서로를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영으로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협과 환난 가운데서도 평생 가장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하는 이 능력은 은혜의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는 능력, 지키시는 능력, 마침내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주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있는 날도, 은혜를 받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멈추게 될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 있는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늘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