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사도행전 7:9-10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목숨이 걸린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스데반 자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설교를 끝낸 후에 성난 군중들에게 끌려나가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을 기했을 것입니다. 그는 숨 막힐듯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끄집어내어 복음을 진술해 나갔습니다.
스데반은 먼저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설교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보내시고, 약속하시고, 심판하시고, 구하시는 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먼저는 그의 아들 이삭에게, 그 다음에는 그의 손자 야곱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의 증손들인 열두 족장들에게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했던 복음의 메시지를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는 지금 구약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중요한 역사에서 이삭의 생애를 다루지 않았고, 야곱의 생애도 요셉의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무슨 이유로 이삭과 야곱을 생략한 채 곧바로 요셉의 이야기를 다루었을까요? 스데반이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알고는 있었는데 험악한 분위기에 짓눌려서 실수로 빠뜨렸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않고서는 스데반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지금 스데반은 자신의 순교를 예감하면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설교를 마치고 순교를 당할지라도 그가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행위를 책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군중들을 선동하여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도록 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태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던 요셉과 그들의 조상들을 예로 들어서 예수님을 배척한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죄악상을 질타한 것입니다. 즉, 요셉을 팔아 넘겼던 요셉의 형들과 똑같은 일을 그들은 자기의 시대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가 조상들의 죄와 비교할 수 없이 컸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이 부분을 지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아브라함에 이어서 곧바로 요셉의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와 상황은 수시로 변해도 인생을 이끌어 가는 원리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인간을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그 이름에 합당한 생명을 주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저주와 멸망만 있던 흑암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끊임없이 배척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은 왜 이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배척할까요?
궁극적인 대답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의 말씀에 기록된 요셉을 향한 형들에 관한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척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그 형들을 굶주림과 죽음에서 구원하는 은인이 됩니다. 이 대목에서 요셉은 누가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뿐 아니라 지금도 세상이 예수님께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구절을 요셉과 그의 형들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관계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와 처지를 알지 못하면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해 본 사람들만이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물론 정신적인 위안과 만족을 얻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동기라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찾아간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령, 신천지의 이만희를 찾아간들 뭐가 다르겠습니까? 아니면, 그가 무당을 찾아간들 뭐가 다를까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구주이신 예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실상을 철저히 깨닫고 예수님을 간절히 찾기 전에는 결코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며, 그 죄로 말미암는 비참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죄와 죄의 비참한 불행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모든 불행과 저주로부터 구원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끊임없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해 왔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배척해 온 것만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십시오. 가장 지적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흉악한 행위들을 보십시오. 세상이 왜 이렇게 파괴적이고, 불행하게 되었습니까? 세상에 왜 실패와 수치와 타락이 널려 있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혼돈과 파괴와 수많은 문제에 휘말려 있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원죄’였습니다.
인간들이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실상을 보고 싶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어떻게 배척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무시당하고 배척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베푸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은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고자 영원히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바 된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조차 거부하고 뿌리칩니다. 스데반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 오래된 그림 안에서 그것을 보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셉의 형들을 통해 오늘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음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그런 식으로 대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 가운데 나이로 치자면 아래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내리 사랑이라고,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을 유독 많이 사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고, 본질적으로 형들과 다른 어떤 점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창세기 37장 이하를 읽어보면, 요셉의 형들이 당시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에 빠져서 악한 행동을 일삼을 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근본적인 원인은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요셉이 처음에 꾼 꿈에는 곡식 단들이 나옵니다. 요셉과 형제들이 각각 곡식을 묶어 단을 하나씩 만들었는데, 요셉의 곡식 단은 꼿꼿이 서 있고 나머지 형제들의 단은 그의 단에게 절을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고, 형들은 그 이야기에 담긴 뜻을 파악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그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형들은 그 꿈 이야기에 담긴 뜻도 파악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장차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때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었던 형들은 ‘시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는 인간의 타락상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도 형 가인이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요셉의 말과 태도에 격분한 형들은 그를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형들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저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우리의 동생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감히 우리가 저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이 예수님의 표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졌던 비판이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무슨 이유로 배척을 받으신 것입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 친히 가르치고 선포하신 그 내용들 때문입니다. 만약에 나사렛 예수를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전하면 아무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그렇게 전하면 배척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위대한 종교지도자로 전한다고 해도 싫어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가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요 8:23),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런가 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문제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차분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처음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 허다한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를수록 시기와 미움만 커져갔습니다. 그들이 고소했던 내용의 본질은 예수님을 시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빌라도가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배척하게 된 원리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원리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둘째는, 정욕과 욕망에 휘둘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우리 각 사람의 본성은 정욕과 욕망과 열정에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인간의 실상을 디도서 3장 3절에서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입니다. 탐욕과 시기와 정욕과 욕구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배척한 것이 얼마나 악한 짓이었는가를 보십시오. 그들이 동생을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가를 보십시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는 어린 동생을 생면부지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그들은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얼마나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과 언약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으며, 자신들이 구별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생을 은 이십 개에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당했습니다. 그가 팔려간 집은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폭행 미수범이라는 모함을 받아서 지하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불쌍하게 된 것입니까? 아버지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마치 노예나 심지어 짐승이나 물건처럼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 갖은 고통과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누가 요셉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요셉의 형들입니다. 형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흉악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은 삼십 개에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조롱과 모욕을 예수님에게 다 퍼부었습니다. 그 거룩하신 이마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뺨을 때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고통에 넘겨주었고,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고 야유하며 외쳤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오늘날에도 세상은 똑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고통과 비참함과 수치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영광의 주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행동으로 저주와 조롱과 모욕을 퍼부으며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눈이 먼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을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자신이 정죄 아래에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광을 모릅니다.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도 모릅니다. 마음의 눈도 멀고, 영혼의 눈도 멀었습니다. 세상이 이처럼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유는 거룩한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요, 진리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9절은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본문을 보십시오. “여러 조상,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그러나 감사하게도 형들은 그런 악한 짓을 했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이어지는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이 말씀이 뜻하는 충분한 의미와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 소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천천히 읽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요셉이 애굽에서 겪어야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얼마나 완벽하게 예시해 주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요셉이 예수님을 여러 면에서 표상이 되고 있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 위대한 복음의 진술이 담겨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높고 높은 곳에 계시는 초월적인 영광의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라는 구절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제시하는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기독교의 복음은 세상의 소망과 기대와는 정반대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인간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입니다. 이들이 시기심과 미움에 사로잡혀 동생을 애굽으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던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보십시오. 질투와 시기, 원한과 대립, 투쟁과 전쟁, 난리와 혼란으로 얼룩져 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말씀을 대합니다. 세상은 단단한 각질에 쌓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안으로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인 복음은 인간 역사의 물줄기를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뚫고 개입합니다. 아니, 더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침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와 세상의 사건들에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복음의 첫 번째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요셉이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배척을 당하고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이 평생을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그는 성폭행 미수범으로 모함을 받아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평생 나올 수 없는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아마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에 돌연 단절이 생기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다 끝났다”고 외치는 그 순간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책을 꺼내어 읽어보십시오. 위대한 위인들의 삶과 역사에 대해 써놓은 글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에는 그것과 사뭇 다른, 터를 흔들고 부수는 비상한 단절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주에서 가장 예기치 못할 갑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깨달아야 할 첫 번째 원리는, 복음은 세상의 소망과 기대와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 이것은 세상이 생각하고 알아 왔던 모든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데반이 전하고자하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배척을 받아서 애굽에 팔렸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보편적인 인간의 지성으로 생각을 하면 그의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의 인생이 이렇게 반전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류를 대해 오신 방법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현실에 개입해 오신 역사입니다. 구약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곁길로 갔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일관되게 개입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개입을 여러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모세와 같이 위대한 사람들을 일으키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개입을 극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은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 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에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두꺼운 각질을 뚫고 인간 사회의 흐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위대한 부흥운동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교회의 삶 속으로, 세상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오신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날, 하늘이 열리고 모든 사람이 왕 되신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의 이 첫 번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진행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두 번째 원리는,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의 못난 형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요셉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에게는 힘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지하 감옥에 던져진 몸으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룩해 낸 것이 이른바 ‘문명’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했습니까? 오늘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 사실을 단호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와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 자신이 이 사실을 말했습니다. 창세기 40장부터 계속 읽어보면, 요셉이 마침내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순간 형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경악하고 낙담했습니다. 지난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마침내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넘긴 동생이 이제 위대한 인물이 되어 그들 앞에 우뚝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형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는데, 창세기 45장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 일 전체를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가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영광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십니다. 지금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 앞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조상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통해 그들이 예수님께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 그것은 사도 바울에 따르면 ‘창세 전’에 계획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베드로가 군중들을 향해 외쳤던 복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실제로 벌인 것은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사람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상황에서 일을 행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같이 암송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이제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압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세 번째 원리는,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형들이 그토록 몹쓸 짓을 했는데도 요셉은 형들과 온 가족과 애굽 전체를 구원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의 구원도 우리의 어떠함을 넘어서서 임합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구원에 반대한 것뿐입니다.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것을 성경 안에서 읽고, 세속 역사책에서 읽어보십시오.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고 얼마나 분주히 노력해 왔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형들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만들고 어려움을 일으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영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영국 성공회의 사제였던 존 헨리 뉴먼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인간이 하나같이 죄를 짓고 수치에 떨어졌을 때, 둘째 아담이 죄와 싸워 우리를 건지려고 세상에 강림하셨나이다.”
“인간이 하나같이 죄를 짓고 수치에 떨어졌을 때.” 이것이 우리가 처한 인류의 실상입니다. 세상과 인간이 이처럼 수치스러웠습니다. 해산할 날이 가까워 배가 잔뜩 부른 가난한 여인이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 들어갔을 때 여관의 방 하나를 얻지 못했습니다. 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방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몸을 보고도 아무도 방을 비워주지 않았습니다. 첫 아기를 낳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죄와 수치로 덮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명과 선행을 자랑하고, 업적과 깨달음을 자랑하고, 믿음을 자랑하고, 그 밖의 어떤 것을 자랑한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선언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철저히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살 소망이 없어진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형들과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손을 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에 계획하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여전히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어렵게 헤쳐 나가던 교회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멸시하고 조소하고 모독합니다. 어쩌면 원수 마귀의 권세가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섣불리 중대한 착오를 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전능하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교회와 함께 계십니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에도 교회가 존폐의 기로에 선 듯한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칼과 죽음으로 위협하고, 때로는 철학과 사상으로 위협했습니다. 어떤 때는 타락한 문명이 위협했습니다. 그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는 교회가 끝장났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일으키셔서 강력한 부흥과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바꾸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그런 부흥과 각성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장차 악인들이 지금보다 더 악해지고, 인간성은 심대하게 파괴될 것이며, 전쟁에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할 것입니다. 온 세계가 전에는 결코 없었던 극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날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에서 교회와 믿음의 성도들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때에 홀연히 하늘에서 징조가 나타나 영광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천사들을 거느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듯이 모든 원수를 멸하시고, 의와 평화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을 붙잡고, 이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믿음의 여정을 중단 없이 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