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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사도행전 7:11-16
우리는 계속해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스데반은 이 설교를 마치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설교를 끝낸 후에 성난 군중들에게 끌려나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처음이자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는 이 한 번의 설교를 위해 천하보다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이 복음의 설교를 듣고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돌아올 수 있다면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전제로 드려도 좋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바울이라는 위대한 제자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할 때 바울이 된 사울도 그곳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처형을 마땅히 여기면서도 그의 당당한 순교의 장면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그때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과 함께 그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만큼 스데반의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깊은 진리를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먼저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전적인 순종입니다. 이 순종에는 인내가 따릅니다. 오래 오래 기다립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절대로 조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 지식의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따나라’고 하시니 떠났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하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우르의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이 먼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찾아오신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무익한 자일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시작입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이야기한 후에 이삭과 야곱을 건너뛰어 곧바로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요셉이 당했던 고난과 배척을 통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배척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은 이십 개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듯이, 예수님은 산헤드린 권력자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아서 은 삼십 개에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서 바로가 요셉을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동일하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게 하사 그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스데반은 요셉이 바로 예수님의 표상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는데 수행했던 역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어느 날 바로가 두 가지의 고약한 꿈을 꾸었지만 아무도 그 뜻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꿈 해석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리고는 바로에게 꿈을 해석해 주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올라 애굽을 다스리게 되었고,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최대한 비축해 둠으로써 다가올 흉년의 때를 철저하게 대비했습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는 거기서 계속 진행됩니다. 극심한 가뭄은 애굽만 아니라 야곱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도 여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은 식량 부족으로 생명을 위협 당하는 고통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가닥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결국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요셉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렸던 요셉이 39살에 아버지 야곱을 만났으니, 그 동안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노예로 팔아버렸던 동생이 거대한 제국의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형들을 알아보았던 요셉은 곡식을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감동적인 장면이 전개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도우면서도 한 동안 형들을 우롱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들 앞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었고, 연로한 야곱은 온 가족과 함께 재산을 정리해서 애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당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도 똑같이 품었던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묻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요셉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야기가 어떤 점에서 예수님의 표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의 통치자와 구원자로 세우시고 권세를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바로가 통치권의 상징인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워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아들에서 형들의 시기와 배척 때문에 노예로 팔려왔던 요셉은 애굽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절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요셉이 바로 예수님의 표상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를 배척하고 조롱했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5장 30절 이하에서 베드로가 산헤드린 법정에 서서 선언했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요셉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듯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왕과 구주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에서 보게 되는 복음 메시지의 시작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큰 그림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권세를 가지고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한 백성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타락하고 악한 이 세상에서 구별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둘째는, 우리의 앞날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삼십 세였습니다. 요셉의 지위와 나이라면 얼마든지 아버지와 형들이 있는 고향에 갈 수 있었습니다. 가서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나쁜 형들을 처단하든지 어떻게 하고, 아버지 야곱을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총리가 된 후 9년의 세월을 더 기다렸습니다. 그 9년 동안 요셉은 다가오는 가뭄을 대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만전을 기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도 극심한 가뭄으로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을 때,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애굽으로 이끌어서 그들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셉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충만하게 담겨져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 가뭄과 영원한 죽음에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높고 높은 보좌에만 계셨다면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것이 무엇이며, 죄를 직접 대면하여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 술에 취하고, 온갖 타락에 물들고, 더러운 악취가 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사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사셨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다 아셨습니다. 그 안에서 되어 가는 일들을 겪으셨습니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문제를 함께 겪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가장 잘 이해하실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가 어떻든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아실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완전한 대비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죄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며,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위해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용서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義)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의’는 ‘거룩함’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이 세상이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고전 1:21). 그것은 그들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하나님과 사귈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가 필요하지만,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의로워져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타락해서 악취가 나고 더러워진 우리는 결코 의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서 의인이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도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오직 주만 의지하고, 주께로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제가 특별히 주목해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본문 14절입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왜 굳이 ‘일흔다섯 사람’을 언급했을까요? 그냥 요셉의 초청을 받은 야곱이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라고 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스데반은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목숨이 걸린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와 같은 위중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요?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갈 때 모두 일흔다섯 사람이 내려갔다.” 이것은 역사책에서 대하게 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생에 관한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루는 역사가 그저 평범한 역사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구속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일흔다섯 사람’이라는 숫자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본문에서 ‘일흔다섯’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복음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선택과 유기라는 중요한 예정의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세상의 죄와 세상의 고통 문제를 다루실 때, 그리고 구원의 일로 우리를 다루실 때 견지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택’과 ‘유기’입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선택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예정하셨다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는 지극히 중요한 주제이지만, 세상에서는 낯선 역사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예정의 교리’를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셨다면 사람들을 너무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하심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이 멸망의 상태에 빠져 버림받은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하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버림받은 ‘유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흐름에서 읽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의 족보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선택과 유기의 과정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은 버림을 받았고, 이삭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이삭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로마서 9장 13절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행위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선택을 받았고, 에서도 범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일흔다섯 사람’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세부 내용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역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가고 계심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그들의 수는 고작 ‘일흔다섯’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생각하시는 방식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수가 많아야 하고, 규모도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우리가 속한 세대는 수의 논리에 휘둘려 있습니다. 뭐든지 크게 벌여야 하고, 숫자도 많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따라야 할 방식이며,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원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원리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처음 시작은 항상 적다는 인상을 줍니다. 본문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과 일흔다섯 명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전부터 이렇게 일하셨습니다.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물로 멸망을 당할 때 구원받은 사람은 고작 여덟 명이었습니다. 전쟁에서는 군사가 한 사람이라도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 대군과 싸울 때에 하나님은 3만 2천명이 아니라 고작 300명을 선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이 언급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거대한 역사를 생각해 보아도 그 출발은 단 한 사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모든 역사가 바로 이 한 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애굽으로 내려간 하나님의 백성이 고작 일흔다섯 명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세속의 역사와 비교할 때, 그리고 이것을 세상이 판단하는 민족의 중요도나 규모와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참으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흔다섯 사람이라는 이 적은 무리가 하나님의 민족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숫자는 ‘가문’일 수는 있어도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물론 세상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이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작고 미미한 데서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격려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처음에 열두 사람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이 작은 무리의 손에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면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겁을 먹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교회의 앞날을 그들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은 뒤집어졌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열두 사람을 데리고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셋째로, 남은 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오순절의 대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은 120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 충만함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숫자는 적었지만, 그들로 인해 세상이 뒤집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을 때 교회는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났고, 이단들이 갈수록 세력을 더해 갔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라는 신앙을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원은 헛된 것이며,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나 스승이 될 수는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들 가운데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다신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로마 황제와 황실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도 아리우스주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교회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랐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완전히 왜곡되고 무너질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 몰렸습니다. 이대로 대세가 굳어지면 기독교는 다신론을 따르는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아타나시우스라는 한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위해 세상과 전체 교회에 홀로 대항해 싸웠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로마 황제와 황실이 그를 반대하고 배척했으며, 그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들을 피해 깊은 사막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추방과 17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 시대에는 교회가 사실상 한 사람으로 줄어든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두 발로 굳게 섰으나 홀로 섰습니다. 그렇지만 아타나시우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는 더욱 굳건하게 세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이름 앞에 이런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아타나시우스!”
그 후 하나님은 암흑 같은 중세시대에도 소수의 남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교황이 복음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고 있는 동안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적은 사람들에 의해 참된 복음이 보존되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가정에서, 혹은 산의 동굴에 모여 복음의 진리를 지켰습니다. 그들에게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이 없었습니다. 대성당은 고사하고 번듯한 건물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복음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에 주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르틴 루터라는 신앙의 거인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온 교회와 교황의 권위와 조직에 도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참된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교회의 역사를 보게 되면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어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일흔다섯 사람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숫자에 마음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적은 무리로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불과 일흔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성경을 읽고 확인해 보십시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붙잡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원리를 깨닫고, 결코 세상을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소수의 남은 자의 처지로 줄어든 반면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바깥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형편일지라도 교회는 세상을 크게 여겨서 눈치를 보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것을 통해 일하시며, 미련한 자들을 통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흔다섯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영적 영역에 있는 교회에서는 수와 규모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일하신다고 보십니까? 왜 이런 적은 수로 일하실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싸움에서 이긴다면 우리는 자기 힘으로 이겼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외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과 권세를 나타내시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8:1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을 꿇고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할 때까지 우리를 낮추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열방 가운데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진행될는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지만, 결코 아닙니다. 계시록에는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정점을 향해 갈수록 교회는 끝장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고 미미한 방식으로 시작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줌밖에 안 되는 미미한 남은 자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역사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확인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그 남은 자의 무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와 규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품어야 할 의문은, 과연 여러분이 그 남은 자의 무리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이고, 세상에서 경멸을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이 적은 남은 자의 무리에 속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수의 남은 자로 두 발로 우뚝 서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