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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
사도행전 5:12-16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란 실제로 어떤 곳이며,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성장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기독교의 메시지는 어떻게 퍼져나갔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됨의 본래 모습을 찾아야만 능력을 갖게 되고, 능력을 가져야만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고 세상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본래의 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찾고 실천해 나가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토록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편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땅에서 아무리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문제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교회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권세와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힘과 마귀의 악한 힘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도록 한 것도 마귀였습니다. 그 마귀는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버젓이 들어와서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하여 분열과 다툼과 파괴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마귀는 세 개의 무기, 곧 ‘박해’와 ‘도덕적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으로 사도행전 초반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휘두르는 무기들 가운데 가장 쉬우면서도 위험한 것이 ‘도덕적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일 것입니다. 지나온 교회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오히려 믿음은 더 뜨겁고 강해져서 주를 위해 순교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적당한 도덕적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면서도 세상 속에서 적당하게 죄를 짓도록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라고 합니다. 기도도 하면서 죄도 탐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이단들을 통해 그릇된 가르침으로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영악한 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강압적인 힘으로 위협해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한 영혼이라도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하게 박해를 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죽게 되면, 오히려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귀의 본래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적당한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적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합니다. 마귀의 이러한 전략은 오랜 교회사에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교회 안에서 극심한 혼돈과 분열을 일으키게 했고, 신앙에서 떠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깊이 연구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보십시오. 아니, 우리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어린아이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는 어른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더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 안에 무엇이 있기에 하지 말라고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할 때 거의 예외 없이 불순종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불순종하게 하며, 그릇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킵니다. 성경은 죄를 ‘마비’라고 자주 말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실례로 ‘나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병’은 사람들의 신경을 마비시켜서 감각이 없게 만듭니다. 자신의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모르는 것이 나병입니다. 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양심과 영혼을 다 마비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죄는 무기력을 낳습니다. 죄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즉 선을 행하려는 마음은 나에게 있지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 본질의 문제는 바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세워지면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지만,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패하고 왜곡된 인간의 마음은 자기 스스로를 속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아가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얼마나 많은 다짐들을 합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다짐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금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그런 짓을 수없이 많이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짐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간교한 사탄과 마귀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차리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척 가장하는 위선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끄러움이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빛을 사랑하고 어둠을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예수님을 중단 없이 따라가려는 마음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영원히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고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십시오. 단지 민감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순종하지 않는 감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때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신의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구브로에서 태어난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사도들과 교인들은 감동을 받아서 그에게 ‘위로자’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좋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나바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나바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습니다. 예로부터 부부는 닮는다고 말을 하지만,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부창부수’라고 두 사람은 똑같았습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가장 영적이며, 수고와 헌신을 많이 한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된 헌신을 계획했습니다.
5장 2절에 “그 아내도 알더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나니아가 계획한 거짓된 헌신을 아내 삽비라도 같은 의도를 가지고 묵인하고 동의했다는 말입니다. 이들 부부는 성도들이 재물을 드리니까 체면상 자기도 드리기는 해야 하겠는데, 전부를 드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재산 가운데 극히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또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전부인양 사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들 부부가 그렇게 거짓된 행동을 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망했고, 아마 더 큰 의미에서도 망했을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삶과 죽음에서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욕심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갔고, 그들은 마귀의 유혹에 충실했으며,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이 교회에서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는 자신의 욕심과 욕망과 탐욕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앞에 있는 현실에 대한 실리주의와 인간의 나약성을 앞세워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변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한 믿음보다는 우리의 얄팍한 기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실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거짓말과 속임수, 탐욕과 이기적인 행위에 익숙한 자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들, 그리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들, 그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후예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행위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크게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의 거짓된 헌신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로 이제 막 성장하던 예루살렘 교회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과 위선으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타락한 공동체로 남느냐, 아니면 순결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들 부부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엄하고 가혹하며 강경하게 심판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드러내며, 시기와 질투, 그리고 위선으로 주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그릇된 행위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겸손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 끼친 영향을 보게 됩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예루살렘 교회는 그저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착하다는 칭송만 받아서는 부족합니다. 세상의 다른 단체에서도 그런 칭송은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착하다는 것만으로 교회됨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도 나타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다른 단체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교회를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교회는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해치는 어떠한 거짓과 악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단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 부부의 사건은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중요한 사명을 다시 새롭게 하는 의미가 깊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편한 사건이 결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 이후에 복음의 능력이 더욱 크게 역사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가 죽은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분명히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교인들 가운데는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저들 부부를 그렇게 죽이셔야만 했나? 물론 저들 부부가 행한 짓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을 그렇게 죽여야 할 만큼 크게 잘못한 짓이었는가?”
이것이 소위 얄팍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민수기 16장에 기록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에 고라와 다단을 비롯한 250명의 족장들이 집단적으로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하며 반역을 일으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땅이 갈라지게 하시고 고라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게 하십니다. 그리고 250명의 족장들을 불로 살라 버리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이 있고 이튿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역자 고라의 일당과 250명의 족장들이 죽게 된 원인이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나선 것입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심판하시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심판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 하루만에 반역으로 죽은 고라 일당을 두둔하면서 그들의 전철을 밟은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 고라의 일당을 가리켜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재앙을 보고서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고라와 그 일당의 행위가 자신들이 보기에는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적당하게 벌을 주고,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서 다시 기회를 주어야 했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모세 시대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대체적으로 사람들에게는 고라의 일당들을 두둔하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향들은 오늘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가령, 교인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심각한 죄를 범한 성도가 있어서 교회가 치리를 하면 그 사건을 가지고 불평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사랑이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성경에는 용서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교회가 매정하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등 여러 불평들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한두 사람에 의해서 시작했던 불평들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되어서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합니다.
아마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중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놓고 사도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에서는 그와 같은 불편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 이후에 분열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분열되지 않고, 흐트러질 수 있는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함께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도 유대 땅에서 태어났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유대 땅이 아닌 헬라 지역에서 태어났던 헬라파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한결같이 ‘마음을 같이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예루살렘 권력자들에 의한 핍박이 시작된 것을 알고도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편한 사건 후에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굳게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불평이 전혀 없었을까요? 그들에게는 서운한 것이 없었을까요? 그들은 날마다 성령 충만한 삶만 살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한 감격과 주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의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이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 예배를 드리는 일, 그리고 봉사하는 일 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이전에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연합하는 생활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우리 주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바로 마음을 같이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늘의 평강과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온 교회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서로가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편한 사건에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표적과 놀라운 기사가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이런 일들에 대해 교회와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아나니아의 죽음에 대해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13절에서도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런 표적과 놀라운 기사를 직접 내 눈으로 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의 의미를 내가 이해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눈으로 꼭 보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 일들에 대해 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일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의 흥미롭고 서로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즉 이 메시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나뉘어졌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더해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동일하게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대한 참되고 바람직한 반응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반응은 어떤 것입니까? 때로 불편하지만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먼저는, 항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도 두려움에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해 주셨기에 구주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구주’라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성경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올 진노’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오순절에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길을 잃은 자로서 율법의 정죄 아래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둠의 자녀로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입으로만 구주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요소가 빠진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형벌이 있는 두려움이 아니라 장차 올 진노를 피하게 해주는 두려움, 그래서 구주께 달려가게 만드는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공포에 질려서 모든 것을 마비시켜 버리는 그런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와 교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는 가운데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러나 단지 두려움을 느끼는데서만 멈추지는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야할 곳을 지시해 줍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표적과 놀라운 기적들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편한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러나 듣고 마는 것은 두려움만 느끼고 마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난 사건들은 진리를 대면하고 믿게 만드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두 번째 편지인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교회는 인간이 만든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이념이나 목적을 가지고 만든 세상의 여러 단체와 같은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 교회는 절대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놀라운 기적들과 사건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끄는 경건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고꾸라져 죽는 모습을 보고 공포나 겁에 마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고 사도들에게서 그 답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 그렇습니다. 이 일이 가져온 첫 번째 건강한 반응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 계속 방치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메시지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구원을 줄 영광스러운 소식을 만나게 될 것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이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누가는 그 변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누가는 믿는 자들이 교회에 많이 합류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은 교회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 ‘주께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이 단순히 교인의 증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의 대상인 주님께 두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그들의 마음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라는 구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기에서 ‘상종하다’는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사귀기보다는 멀찌감치 거리 두기를 더 좋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무리와 감히 상종하지 않았던 ‘그 나머지’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이 다 불신자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그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호기심과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현혹되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역사에는 항상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참된 신자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군중이 모이는 곳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이상하고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듭니다. 그들은 참된 신자와 같은 인상을 풍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아닙니다. 자신이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피상적인 매력과 단순한 호기심에 끌려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엎드려져 죽는 사건과 같은 것을 목격하면 “우리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공동기금도 마련되어 있었고, 모두가 서로의 물건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여기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임에는 다른 단체와는 다른 좋은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표현대로 시류에 편승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엎드러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음에는 우리가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빛과 어둠이 드러나듯이 참과 거짓이 드러나고, 참된 신자와 사이비 신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런 감정 없이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던 이 사람들은 ‘주께로 나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나 건물의 진동에 겁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줄을 알고 있었으며,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유대 권력자들을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사랑에서 나오는 경건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외함과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마비되는 대신 하나님 앞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제 이 일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통해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이런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여러분도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도 이 메시지를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기쁨을 주며, 이 복된 메시지를 기꺼이 믿게 하시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부디 이런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