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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에 복종하고 돌아오는 사람들
사도행전 6:7
우리는 지금까지의 사도행전을 통해 마귀가 교회를 멸절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세 가지의 방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마귀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통해 힘과 권력을 앞세워서 위협과 핍박을 가함으로써 사도들과 교회를 아예 해체시키려고 애썼습니다. 둘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 거짓과 위선으로 교회를 부패시켜서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셋째로, 당시 유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헬라파 과부들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성도들로 하여금 원망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했습니다.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했던 세 번째 공격은 가장 교묘한 전략이었습니다. 마귀는 외부의 박해나 내적 부패에 의한 공격이 실패하자 이제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함으로써 교회가 오류와 악에 노출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경험한 이후 사도들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제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에 순종하며 날마다 말씀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이루어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장으로 인한 감격과 흥분이 전체의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도전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제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헬라파 과부들은 자신들을 부양할 친척들도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날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는데, 문제는 어느 때부터인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 나누어주는 구제 대상에서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부가 교회에서 조차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투덜거림의 원망과 불평은 교회 안의 모든 긍정적인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 사도들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만약에 마귀의 의도에 따라 사도들이 교인들의 원망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이고 행정적인 일에 집중했다고 한다면, 교회는 초기에 소멸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충분히 깨어 있어서 ‘마귀의 계략’을 간파해 냈고, 그 모든 문제들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나누기 위해 모든 교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사도들이 사회사업을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들이 사회사업의 존엄성을 손상시켰다는 어떠한 암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결정은 전적으로 우선순위의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실제로 교회 역사 전체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과부들을 비롯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딪친 시험에 넘어져 버렸다면, 기독교 역사 전체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니, 기독교 역사라는 것 자체가 형성될 수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은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마귀의 시험에 맞서서 교회의 일차적인 임무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분명하게 확립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제와 자선사업은 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이고 늘 해 왔던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일차적인 임무는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사도들이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오직 기도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한 영혼을 바로 세우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만,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교회의 위기를 오히려 교회가 효율적으로 성장하도록 직무를 전문화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사역을 분명하게 밝힌 후 덧붙여서 교회에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교회는 사도들이 전하는 말의 요지를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인들이 이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의 요청에 따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세운 직접적인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가 일꾼들을 바르게 세웠을 때 나타난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새롭게 세워진 일꾼들로 인해 사도들은 더욱 힘 있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고, 구제 사역도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에서 우선순위를 확립한 결과로서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말씀에 전무하게 되자 가르침이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말씀 사역이 소홀해질 때는 결코 말씀이 널리 퍼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교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의 성장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어떤 풍파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말씀이 강해지고 깊고 넓어지자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교회는 양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왕성하다’, ‘많아지다’라는 동사는 미완료 시제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는 일과 교회의 성장이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성도들이 사도들로 하여금 오로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에 교회는 그칠 줄을 모르고 힘 있게 성장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세상이 복음 앞에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은 성전예배를 지키며 사람들에게서 제물을 받아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때 유대 제사장들은 아주 세속적이고 돈만 좇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본래 직분을 심대하게 훼손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가장 격렬하고 날카롭게 반대하는 무리들 중에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슨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그의 가르침에는 자신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권위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열광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으며, 바리새인을 비롯한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제사장들은 당시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가장 혐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당시 예루살렘에는 레위인이 18,000여명 정도 있었고, 이들 중에 대제사장들을 도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을 수행했던 제사장이 약 8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로서 동물을 통한 희생제사가 그들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써 그와 같은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를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사를 드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던 ‘제사장들’이 희생 제사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에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는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많은 제사장들이 기독교 신앙을 복종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피상적인 변화에 그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 그 어떤 변화보다 더 심오하고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거듭나라’, ‘위로부터 나라’, ‘성령으로 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정신과 사고, 존재 전체가 영향을 받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합니다. 이 일이 동물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던 제사장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자신들이 해 왔던 성전의 모든 의례와 의식을 포기했습니다. 그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전부, 그리고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생각과 행동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마귀도 얼마든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진리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둠의 존재입니다. 마귀는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우리를 얼마든지 속일 수도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 평안과 거짓 위로를 제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서 아주 거룩한 모습으로 찬송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선한 모습으로 최상의 헌신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사탄과 마귀는 우리에게 자신의 본래의 그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만약에 사탄과 마귀가 본래의 사악하고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온다면 모두가 기겁을 하고 거부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 마귀는 가장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마귀는 죄를 죄로서 우리에게 제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도덕적으로 가장합니다. 마귀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그런 짓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을 훼방하고 교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와 사탄은 그들의 본래 목적인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존재의 새로움을 증거해 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복종’, 곧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변화의 경험은 이 도에 순종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 도’는 ‘그 믿음’이라는 뜻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급속도로 떠올랐던 기독교의 신앙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됨에는 반드시 더 깊은 순종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잣대입니다. 순종이 없는 신앙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허다한 제사장들이 이 도에 복종했다고 강조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복종’, 혹은 ‘순종’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믿는다’는 단어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순종한다’는 단어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러니까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우리 모두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멸망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전하여 준 이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순종한 결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와 사망을 이기는 복음 앞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종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단순히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평생 자신의 전통과 습관에 따라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나름대로 복음을 들어왔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들었던 복음이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여러분이 들었던 복음이 여러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단순히 듣고 끝낼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만으로 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세상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어떤 세미나나 강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복음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주장하고 떠들어대는 복음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복음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은 그렇게 단순히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복음을 머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도 머리의 지성이 가장 먼저 반응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듣고 그 정신이 깨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처럼 복음을 단지 지적으로 인정하는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잘못입니다. 그런 자세는 결코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순종’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마음으로만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인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감상주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전 인격을 사로잡고, 전 인격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왜 순종의 문제가 그토록 중요합니까? 왜 성경은 그토록 지속적으로 순종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사용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성경이 ‘순종’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 또한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여 준 바 이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순종이 참으로 중요한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신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요구하셨던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스스로 의를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죄 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단순한 어떤 흠이나 결점으로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잘못된 부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자신들은 한 번도 남의 것을 빼앗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간음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살인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성전에 바쳤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은 율법을 어긴 적이 없으니까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군중들 앞에서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가장 혐오해 왔던 창녀와 세리들보다 더 못한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그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심에서 들려오는 깨달음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죄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이 순종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비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나님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할 때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에는 복음을 믿고 주께로 돌아서는 일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일은 바로 그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에게 순종하십시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제사장들은 이 가르침에, 이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이제 저는 보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과거의 경험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선행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습관화된 신앙생활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교인이라는 사실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잣대는 바로 이것, 순종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종하는 것입니까?
순종의 첫 단계는 이 메시지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가르침과 의의 필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합니다. 자기 욕망과 본능과 충동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보십시오. 육신의 욕망과 정욕을 따라 음란하고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대체 왜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종의 원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구속하고 내리누르는 존재입니다. 독재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저항합니다. 물론 어떤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잠시 흔들리기도 합니다. 심각한 병에라도 걸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병이 나으면 그런 결심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고, 자기 속에서 선하고 올바른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리에 휘말리기가 싫어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 저항합니다. 교회 예배 중에 무언가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거나 호소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얼른 그런 충동을 눌러 버립니다. 그렇지만 기억하십시오. 순종의 첫 단계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양심의 깊은 곳에서 선한 음성이 들려올 때 귀를 열고 들으십시오.
순종의 두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우리가 단지 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소극적인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적극적인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라틴어 의미는 ‘다시 생각하다’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만의 계획과 삶의 철학이 있는 만큼 그것에 따라 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순종의 첫 번째 적극적인 단계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순종의 두 번째 적극적인 단계는 확신과 깨우심을 주시는 성령께서 나를 설득하여 마음을 바꾸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메타오니아’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생각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생각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바꿀 준비까지 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기꺼이 잘못했다고 고백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고백할 정도로 마음이 넓어지고 정직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이 도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세 번째 단계가 중요합니다.
순종의 세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과 경험을 돌이켜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점점 늙고 쇠약해지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몸은 곧 무덤에 묻힐 것이고, 영혼은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요? 저와 여러분은 그 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그 모습과는 다르며, 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미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설교자들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에서 불쌍한 세리는 자기의 죄와 실패,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당신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저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그 자리에까지 가 보셨습니까?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무력함과 실패를 깨달아야 하며,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모든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복음에 순종하려면 이런 회개를 해야 합니다.
순종의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러므로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의 응답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의 이 제사장들이 복종했던 메시지, 그 말씀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모두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허물을 그에게 다 지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믿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도 회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회개가 참되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저 머리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증거를 보여주는 방식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과 거짓 종교와 정욕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방향을 바꾸어 홀로 살아 계신 참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믿는바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입으로 그를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는 뜻이며, 자신이 왜 그리스도인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이 도에 복종함과 동시에 세상을 떠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처럼 순종한 모든 사람, 같은 주를 믿으며 같은 주를 사랑하고, 같은 주를 찬송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을 배우며, 남은 평생토록 예수님을 찬송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의 허다한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기꺼이 이 도에 복종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회개했습니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까? 이 도, 이 복음이 여러분의 인격 전체를 사로잡고 있습니까?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회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여러분이 누구를 믿는지를 아는 것이며, 무엇을 믿는지를 아는 것이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온 힘을 다해 증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근본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신 것은 이처럼 복음에 복종하며 의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