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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5-13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얽매여 영원히 저주를 받은 인류 앞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명제는 오직 이 메시지에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가 없었다면 교회도 없었을 것이고,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메시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인류 앞에 있는 가장 긴급한 문제는 복음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온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복음의 메시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보다 귀중한 복음의 메시지를 매도하고, 일축해 버리며, 자신들의 현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구원의 메시지이고, 소망을 주는 메시지이며, 나아가 큰 기쁨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복된 메시지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핍박하고 모독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세력, 그들의 분별력을 빼앗아 이런 무서운 짓을 하게 만드는 악한 영적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세상이 처해 있는 상태를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것이 타락한 세상이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전쟁의 세상이요, 고통의 세상이요, 슬픔의 세상입니다. 죄와 악의 세상입니다. 또한 이 세상은 수고해야 하는 곳이고, 노동해야 하는 곳이며, 땀 흘려야 하는 곳입니다. 서로 싸우고 욕하고 모독하고 저주하고 죽이고 …. 우리는 바로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유일한 희망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음이 어떻게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놀랍고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8장은 ‘그 날에’, 그러니까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그날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주의자들에 의한 모진 박해의 광풍이 교회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모든 핍박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사탄과 그 배후의 조종을 받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듯이 교회를 강하게 박해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서 복음을 포기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황폐하게 되어 완전히 끝장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잔멸되거나 말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아 흩어진 성도들은 온 지역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힘 있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방 세계로 널리 전파되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본문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게 되는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들어가기 전 사마리아 사람들의 상황이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복음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사마리아 성은 어떤 곳입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서 본래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족속들입니다. 그렇지만 기원전 721년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그곳에 살던 일부 주민들을 추방하고 이방인들을 그 땅에 이주시켜 살게 하면서 생겨난 혼혈족이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희한한 혼혈민족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점에서 그들을 유대인이라고도 할 수 없고 이방인이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실제 조상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느 정도 유대인이기도 하면서 또한 이방인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경 가운데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뿐 나머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오경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메시아가 오실 것을 고대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방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들의 역사를 읽어보면, 엄청난 수의 이방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면서 한데 섞여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오면서 단순히 그들의 몸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살던 이방인들의 문화와 풍습과 사고와 종교적 신앙까지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놓고 어떤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요약해 놓은 말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교와 이방 세계 사이에 있는 일종의 여인숙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바르고 참된 가르침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방의 가르침이나 사상이나 시각이 심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동시에 이방의 우상들도 함께 섬겼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마리아인들의 상황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완벽하게 해당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오늘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다수가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풍습과 사상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활과 역사의 마지막 종말을 믿지 않는 교인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어느 정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혹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정규적으로 예배에도 잘 참석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에는 성경적이 아닌 다른 배경에서 비롯된 완전히 이질적인 신앙이 섞여 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지대에 있었던 것처럼 신앙과 불신앙의 중간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세상의 맘몬신도 섬깁니다. 빌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이 찾아가는 대상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소망을 주는 메시지는 오직 하나,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전했던 이 복음의 메시지뿐입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전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문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이후 극심한 박해를 받고 사방으로 흩어진 평범한 성도들이 두루 다니면서 소문을 낸 것이 바로 ‘복음의 (그)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백성들에게 전한 메시지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소망을 주는 메시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소망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죄와 악을 정복하셨고 마귀를 정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왕으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마귀와 그 모든 세력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귀와 세상의 방식을 따르며 그리스도와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했던 사람은 모두가 영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믿는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전했던 복음의 메시지가 바로 이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복음의 메시지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듣고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별한 일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다행인 것은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 그 대답이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자주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그냥 자리에 앉아서 듣고 생각하고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면 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거기에 그치는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합니다. 복음은 순종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에 대한 신약성경의 일반적인 표현방식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복음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앞에 회개의 요구는 신약성경에서 복음 전파에 첫 번째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로부터 세례 요한의 때까지 400여년 동안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 시기에는 하나님의 묵시가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했고, 모든 면에서 가장 곤고한 날들을 살아야만 했던 참으로 암울한 때였습니다. 그때 400여년만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메시지는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가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로마인의 손에서 건져낼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지는 바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아무 소용도 없고,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회개하고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라는 중대한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 전파하신 메시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요점도 바로 그들에게 회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무리들을 향해 외친 메시지도 역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파한 것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기독교와 교회의 중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나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사 회개하는 영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이 항상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회개를 해야 하는데, 본문에서 그 회개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들어야 합니다.
“듣고.” 이것은 그냥 들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암시하는 뜻은 그들이 기꺼이 듣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는 것은 편견으로 눈이 멀어 있는 탓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아예 듣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작심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으면서도 듣기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말은 듣고 소리는 듣습니다. 그렇지만 귀를 기울여 듣거나 귀담아 듣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들으면서도 마음은 닫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한 가지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자세로 듣고 있는지를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알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달랐습니다.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열려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자신이 듣고 싶은 메시지만 골라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복음의 메시지를 일축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무엇보다 먼저 복음의 메시지를 묵은 땅을 갈아엎듯이 정직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렇게 진심으로 귀를 기울였고, 한마음으로 따랐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사마리아인들처럼 듣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마리아인들과 아주 대조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만났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행 17:18)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말쟁이”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이런 것이 편견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도 편견으로 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눈이 멀고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말씀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은혜로운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도 들을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도 듣지 않으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열고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회개의 첫째 단계는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만 그치면 안 됩니다. 회개는 이 메시지를 기꺼이 듣는 것일 뿐 아니라 기꺼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단어 자체에 이런 뜻이 있습니다. ‘회개’는 ‘다시 생각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회개에 대한 훌륭한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 재고해 볼 것을 우리 모두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철학이나 인생관과 관련하여 복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기준이나 일련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준에 의거하여 자신이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을 정당화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살다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힙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던져야 할 긴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기꺼이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이 있습니까? 복음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재고해 볼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다가 오늘 하나님 전에 나와 선포되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고 메시지가 제기하는 질문들을 깊이 재고해 볼 마음이 있습니까? 반복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본 후에 “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숙고해 보십시오.
셋째로,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듣고 다시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지도 숙고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회개’라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식으로 한 번 생각해 보고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완벽한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아버지가 포도원으로 보낸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거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보더니 “싫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자기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회개하고, 자신이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던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복음에 반발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발은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은 자들은 세상의 대표자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반발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 자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다시 생각할 뿐 아니라 마음을 바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회개의 마지막 요소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은 후에, 다시 생각한 후에, 마음을 바꾼 후에 복음이 명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다시 말해서 회개는 단순히 지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과 행위와 관련된 것입니다. 변혁과 관련된 것입니다. 가던 길에서 돌이켜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회개의 중요한 실례 한 가지가 신약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바울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인 예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까요?
사람을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여기 사마리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마음으로 빌립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그 답은 자신들에게 증거가 주어지자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은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빌립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모든 일들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으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해서 선택된 증인들에게 나타나셨는지를 증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던 일과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에 대해서도 증거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전하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파된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증거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들이 이처럼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본문 8절은 이 물음에 분명한 답을 주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결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참으로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저의 이 말은 지극히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직 기독교만 참된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과 기독교가 가르치는 주장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건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바울과 실라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부당하게 정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유죄 판결을 받고 심한 매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고발을 당한 것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요, 귀신 들린 여자아이를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을 잡은 자들이 ‘많이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수들의 등을 후려치는 가죽 채찍으로 바울과 실라를 쳤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등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을 것이고, 채찍 자국도 깊이 패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행 16:23-24).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모욕을 당했을 뿐 아니라 치욕스럽고 잔인한 중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햇볕이 들지 않은 깊숙한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단순한 감옥의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고, 귀신들린 여자아이가 불쌍해서 고쳐주었던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들은 음주나 강도나 살인이나 그밖에 수많은 범죄로 잡혀온 전형적인 세상의 죄수들이었습니다. 그 죄수들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밤중에, 자정에 갑자기 두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도 기뻐하면서 말입니다. 깊은 감옥에 갇힌 채 두 발은 차꼬에 매여 있습니다. 차꼬는 죄수들이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양 발목에 채우는 형틀입니다. 두 사람은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서 양 다리가 벌려져 묶인 채, 마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처럼 취급당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육신은 잔인한 매질과 채찍질이 남긴 통증으로 뒤틀리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 두 사람처럼 할 수 있습니까? 만사가 잘 풀리고 있을 때에는 기쁘고 행복한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문제는 한밤중에 이들과 같은 처지에 있을 때에도 그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행복해 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에도 기쁨에 넘칠 수 있습니까? 간수가 회심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16장 3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보십시오. 방금 전까지도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임의로 고른 예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드리지만 신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언하건데,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사마리아인들을 보십시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믿기 전까지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9절 이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은 시몬이라는 마술사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 ‘시몬’은 ‘시몬 마구스’라는 인물로 이후에 거짓으로 회심한 후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창시한 사람입니다. 시몬은 각종 철학과 마술로 사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 외에 다른 조건들은 전부 그대로였습니다.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품삯도 그대로였고, 먹는 음식도 그대로였고, 기후도 그대로였습니다. 오직 사람들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뀌자 환경은 그대로인데도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여러분과 저에게도 똑같은 일을 해 줍니다. 복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이론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하게 아십니다.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아시며, 그 방법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주는 기쁨의 가장 큰 특징은 외부 환경에 결코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는 세상의 시도는 항상 둘 중에 하나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즉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든지, 아니면 우리를 마취시켜서 환경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복음은 우리 속에 기쁨을 줍니다. 이 기쁨은 우리 속에서 솟아 나와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외부에서 가공해 내는 기쁨이 아닙니다. 잊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복음은 환경과 조건을 바꾸는 대신에 여러분 자신을 바꿈으로 기쁨을 줍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에게 했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기쁨을 얻고 행복해진 것도 빌립이 전했던 복음의 메시지를 믿은 결과였습니다.
빌립은 “지금 여러분은 비참한 상태에 있지만 제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심리요법을 써서 사람들을 흥분되고 행복한 상태로 몰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복음의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이 예수가 누구이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사실을 믿었을 때 자신들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을 진심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찾아와 “행복해라. 기운을 내라. 마음을 다 잡아라. 모두 함께 행복해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단과 사이비 집단에서나 하는 짓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닌 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에 관한 메시지를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주를 바라보고 믿고, 복음의 그 말씀에 복종할 때 주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 기쁨을 설명하라고 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 빌립이 전해 준 메시지를 믿었을 뿐입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큰 즐거움이 임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 즐거움이 있습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놀라운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 예수를 믿으면 발은 차꼬에 매이고 몸은 고통에 시달리는 한밤중에도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도, 죽을 때에도, 영원토록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