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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스바냐 3:14-20
우리는 지금까지 일곱 시간에 걸쳐서 스바냐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로서 스바냐 강해를 마치고, 다음 주일부터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의 시대에 우리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 것인지를 기대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극심하게 타락했던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한 죄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범죄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문제가 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도 하나님을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우상들 가운데 한 이름에 불과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이러한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유다를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이르도록 심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스바냐서의 주제는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악 가운데 있으며 믿음 없는 자들에 대하여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은 이 세상에 속한 악인에 대한 심판과 여호와께 속한 믿음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이 동시에 실현될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의 ‘여호와의 날’은 장차 우리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온 인류를 심판하시게 될 그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날,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모든 만국 백성들이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불신앙의 사람들은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멈추지 않는 영원한 지옥에서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임하게 될 ‘여호와의 날’에 우리는 완전한 심판과 완전한 구원을 동시에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남은 자들’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진 유다의 범죄와 타락에 대하여 여호와의 날에 임할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었고, 그것이 빠른 시기에 실현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시켜서 선민 이스라엘의 새 역사를 시작하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스바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따라감으로써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예언에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두셔서 그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기에서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가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남은 자’는 붙들려 가서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되어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타락하고 세속화된 세상에서도 악을 향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순수한 말씀의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돈이나 재물이 많은 부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힘 있는 권력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3장 12절에 의하면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입니다. 여기에서 ‘곤고하고 가난하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온유하고 겸손한 백성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고난과 환난 중에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믿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유다 백성들이 미리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들은 굳이 망할 필요도 없었고,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고, 종교혼합주의에 빠져 세속화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저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무신론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에 나타나는 ‘남은 자’ 신앙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바냐서의 ‘남은 자’는 더 나아가 이방 만민도 동참할 최종적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백성들의 멸망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며 기뻐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남은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붙들고 순수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셋째는, ‘여호와는 왕이시다’ 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해서 복도 내리지 않으시고, 화도 내리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상들과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여호와께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가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를 통치하고 계신다.”
사실 종교혼합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수많은 우상들 가운데 한 분쯤으로 여겼던 유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을 다스리시는 참 신이신가?”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바냐 선지자가 전하는 대답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이 역사를 통치하시는 왕이시다”는 사실을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심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다 백성들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들을 징계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둘째는,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심으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이방 민족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셋째는,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이 온 우주의 통치자요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스바냐서 전체에 걸친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바냐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그림은 참으로 장엄합니다.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악이 몰고 오는 파괴의 심판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선택하신 언약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과의 전쟁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교만을 제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거리에는 축제를 열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기쁨을 외쳐대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삶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춤을 추며, 웃음 속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따라 살았던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본문에서는 장차 회복될 예루살렘에서 남은 자들이 누리게 될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지금 유다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잔혹한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쌀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함락되어서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과도 같은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타고, 성벽은 처참하게 무너질 것입니다. 500년간 이어온 나라는 망하고, 살아남은 수많은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회 전체에 절망의 짙은 먹구름만 잔뜩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바냐 선지자는 이런 끔찍한 운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유다의 남은 자들을 향해 세 번이나 강조해서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되는 ‘시온의 딸’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딸’은 모두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즉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거듭 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는 ‘노래할지어다’, ‘기쁘게 부를지어다’,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라는 점층적인 표현으로 남은 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지속적이며 더욱 커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래할지어다’, ‘기쁘게 부를지어다’는 말은 기쁨에 겨워 부르짖듯이 큰 소리로 즐거이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하여 잔치를 열거나 격렬하게 기뻐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점층적인 표현은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실 남은 자들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은 자들은 육적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아직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이미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결국 본문은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남은 자들인 믿음의 성도들을 향하여 기뻐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토록 전심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토록 온 몸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15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본문은 남은 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네 형벌을 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형벌’은 불의하고 패역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의 형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벌을 더 이상 그들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렵게 하는 형벌을 제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형벌을 완전히 제거하십니다. 이것은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얽매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이전과 이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남은 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우리의 원수를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원수’는 심판의 형벌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던 이방의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들 이방 나라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부적인 위협마저 철저하게 제거하십니다. 이제 심판을 끝마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남은 자들을 위협할 요소가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탄과 그의 하수인인 마귀들의 세력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탄과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원수들을 일곱 길로 쫓아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심으로 기뻐하며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왕’이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에게 유일한 왕이셨습니다. ‘왕’은 그의 백성들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줍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전쟁과 살인과 폭력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이 함께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가운데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제사장 나라를 세워서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나라의 본’을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나라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의 왕이 되셔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심으로 세상 민족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상 왕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의 심판을 받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남은 자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왕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친히 다스리시고 모든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전하는 이 기쁜 메시지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성취가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왕 되신 주님과 함께 영원무궁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심을 전심으로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니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왕이 되셔서 모든 원수들을 대적하여 그 백성들을 지켜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자들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화’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일반적인 시련이나 환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화’는 멸망을 의미합니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차 우리는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물리치고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보호로 말미암아 결코 화를 당하지 않을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아울러 악한 세상이 주는 시련과 핍박, 고난을 다 이기고 결국 승리자로 우뚝 설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선지자는 시온의 딸, 곧 남은 자들에게 노래하며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5절은 한 마디로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주님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 그들이 남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참된 기쁨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좋으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못합니다. 찬양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찬양의 메시지가 진정 나의 것으로 고백하고 부르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은 구원함을 받은 자, 죄사함을 받은 놀라운 기쁨이 있는 자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남은 자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너의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 나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궁극적인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의 마음에 공포와 불안을 쫓아내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이처럼 크고 확실한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온 몸으로 고백하며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당시 유다의 역사는 한 줄기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두움만이 있었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채 저주와 거짓과 살인과 폭력이 넘쳤습니다. 정부 관료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심하게 부패했습니다. 그들은 망할 짓만 골라 했습니다.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징조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지금 유다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확실한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과 나라의 존망에 대한 문제로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과 금을 비롯한 재물을 모으고, 애굽과 앗수르와 같은 이방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자신을 의탁하려고 했습니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말도 지금 유다 백성들의 처지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손을 늘어뜨린다’는 것은 절망이나 낙심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히브리적 단어입니다. 이것은 ‘네 손을 견고히 하라’, ‘손과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유다 백성들은 현실 앞에서 의기소침하고 위축되어져 있습니다. 어깨가 축 쳐진 채 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본문 17절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 세상 속에서 기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너의 가운데,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내주는 칭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의 하나님도 아닌 오직 남은 자들, 택한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하나님은 ‘너의 가운데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내주하시며 동거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운데’ 라는 단어는 ‘중심’, ‘심장’, ‘~가운데’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중심에 계시며, 당신의 백성들의 고동치는 심장, 내면 깊숙한 곳에 좌정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은 자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여호와께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스바냐 선지자는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신다. 너의 고동치는 심장 깊숙한 곳에 좌정하고 계신다.” 그렇습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외쳤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의 고동치는 심장 깊숙한 곳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여기에서 ‘전능자’는 히브리어로 ‘용사’, ‘전사’를 언급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전능하신 용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분으로 생각했던 우상과 같은 분이 아니라 전능하신 용사로 그의 백성들을 모든 전투에서 구원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나아가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은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해서 같은 개념을 삼중적으로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완전히 용서를 받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었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만 생각하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엇인데, 나를 보면 하나님이 이처럼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이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맨날 먹고, 사고,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이상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그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랑으로 나를,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나아가 그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사랑 안에서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만 보면 좋아 죽겠어.”
솔직히 우리 자신들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참으로 허물과 죄악 투성이입니다.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고,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시는 하나님! 이보다 더 위대한 위로와 격려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위로와 격려 속에서 삶을 산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위로하심과 격려 속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전능자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십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친히 고백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며, 말씀 안에서 거듭나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위로와 격려를 우리의 삶에 베풀어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18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 보면 “I will”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I will.” 이 말은 “내가 하겠다”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1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내가 너희를 모을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당시 바벨론을 비롯한 이방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신분의 제약 등으로 절기 때마다 그 절기를 지켜야 하는 장소였던 예루살렘 성전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기로 인하여 항상 근심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남은 자’들은 어떤 형편과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목말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져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날을 목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예배에 목말라하는 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모으실 뿐 아니라 나아가 그곳에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여호와의 구원이 선포되고 성취되는 그날에 남은 자들은 그들의 거룩한 산 시온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음껏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절기를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더 이상 저주와 조롱과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시며, 온전한 선민 공동체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약속을 신약 시대에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살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를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천국으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주와 함께 왕 노릇하며, 새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너희를 높이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여기에서 ‘그때’는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친히 예루살렘을 괴롭게 했던 모든 대적들을 벌하실 것이며, 남은 자들을 통해 선민의 역사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사실 남은 자들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대적들로 인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지금 당장 자신들을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의문을 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대적들이 “너희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비웃음과 조소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셔서 강한 권능으로 대적들을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너희를 조롱할지 모르지만, 세상은 너희들을 향해서 침을 뱉을지 모르지만, 나는 너희를 하늘의 별과 같이 높여 줄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할 것이다.”
스바냐가 전해 주는 중요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에 의한 축제 앞에서 온 세상은 숨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백성들 한 가운데 계시며,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데 버려져 절망 가운데서 보게 될 것입니다. 가장 끔찍한 심판의 언어로 시작한 스바냐는 이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기쁨 속에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 즉 ‘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전한 예언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이루어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게 될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은 자들인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멋진 축제가 될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보다 더 고결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어려움 앞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더욱 힘차게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남은 자들, 그들은 지극히 적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역사를 변화시켜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억지로 타협하면서 그들에게 섞이는 것보다 오히려 남은 자의 무리에 속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나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