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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인류에게 주신 오직 하나뿐인 희망
사도행전 1:1-3
오늘부터 우리는 사도행전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사에 나타났던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아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을 썼던 누가입니다. 누가는 주후 50년경에 드로아에서 바울을 만나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요 개인 주치의로서 바울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따라갔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데마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나갔지만 누가만은 끝까지 바울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2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누가복음 소개문에 보면, 누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 출신의 직업 의사였다. 그는 또한 사도들의 제자였으며, 후에는 바울을 수행하여 그가 순교하기까지 같이 다녔다. 그는 아내도 자녀도 없이 일심으로 주님만을 섬겼으며, 84세의 나이로 베오디아에서 성령에 충만하여 잠들었다.”
‘누가’는 ‘빛을 준다’는 뜻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복음의 빛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누가복음의 내용을 모두 목격한 예수님의 직계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 즉 기독교 2세대에 속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용 대부분을 목격자들에게서 듣고 수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그가 듣고 알고 있었고 자세히 살펴서 책으로 기록하려는 내용을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들과 자신을 묶어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바로 그 공동체, 즉 교회에 속해 있었던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는 같은 인물인 ‘데오빌로’라는 사람입니다. ‘데오빌로’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지성과 학식을 갖추었으며 기독교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혹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받았던 데오빌로가 그 시대의 데오빌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 혹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데오빌로가 어떤 인물이었든지 간에 그는 바로 오늘의 우리 모두입니다.
한편,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저자인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된 책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주제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연결할 때 더 쉽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장 1절에 기록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일들입니다. 즉 그들 가운데 일어난 ‘예수님의 생애와 활동, 가르침에 얽힌 모든 내용’을 우리는 ‘누가가 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심으로부터 승천하심에 관한 기사”를 간략하게 기록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 그들 가운데 일어난 일들을 적어놓은 것이 바로 복음의 결과인 사도행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시작하면서 누가복음의 끝에 간략하게 기록된 예수님의 승천하심에 대한 사건을 확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교회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에 이어 사도들과 제자들의 기다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약 30년간에 걸친 초대교회의 역사를 차곡차곡 기록하여 놓은 책입니다.
드디어 오순절이 되어 성령의 임재와 복음 증거활동의 신호가 울리면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에 대한 기록으로 사도행전은 끝이 납니다.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기록의 전부가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일들에서 시작하여 로마의 복음사역에서 끝이 납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와 수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누가는 “복음이 어느 지역으로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복음이 새로운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복음의 결과와 영향력이 점점 넓어지고 강해지는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초대교회 최초 30년에 대한 역사인 사도행전을 미완성의 형태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은 복음이 급속하고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땅 끝이 아닌 ‘로마’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약의 시대가 복음 증거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교회가 수행해야 할 지상 과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의미에서 ‘땅 끝의’ 모든 인종과 모든 민족들에게까지 전파되는 것을 다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써나가야 할 교회 역사로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며, 이 역사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그때에’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말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지상 최대 최고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결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작은 공동체와 함께 시작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해주지 아니하시고, 아무 말씀도 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이와 똑같은 상황 속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게 될 그 무엇을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아가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행동하는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셔서 무엇을 시키려고 하시는가?”
잊지 마십시오. 사도행전의 이야기에는 침묵이 철저히 거부됩니다. 사도행전은 극심한 환난과 핍박으로 인해 정든 고향과 집에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결코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침묵하며 가만히 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든지 찾아가서 말하고 전파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앙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은 결코 잠잠하지 아니하며, 세상을 향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불러서 제자로 삼고 그 제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점점 확장되고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참된 기독교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에 온 인류에게 주어진 오직 하나뿐인 유일한 희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코로나 사태를 비롯한 수많은 갈등과 대립과 심각한 인간성 파괴에 직면한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참된 기독교, 교회의 본질은 오직 복음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됩니다. 오직 복음만 있으면 됩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한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듭난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 살고, 그 가정으로 인해 이웃과 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복음을 떠나 수많은 다른 것들을 시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했는데, 한국교회는 복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도입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선포가 사라진 오늘의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참된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는 수많은 종교인들을 양산해 왔습니다.
이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업들을 개발하고 시행했습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는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이지만 오히려 소득격차는 더 심해지고, 세대와 계층, 지역과 이념간의 갈등은 해방 이래로 가장 심각합니다. 정치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섰지만 자기들 배만 채웠을 뿐입니다. 백성들의 정서는 더욱 사막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정치가나 사상가들에게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소위 세상 종교들에게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유일한 희망은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만이 한 영혼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그 복음을 붙잡고,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 가장 큰 비극은 복음이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극심한 혼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뭐지? 교회가 뭐지?” 하면서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를 해결하고 개혁하는 것이 교회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두고 고상하고 낙관적인 인생관이며 일종의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를 주로 도덕과 행위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윤리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곧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되고 있으나마나 한 관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혼란이 단지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점점 더 두렵게 하는 것은 교회 바깥의 혼란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혼란을 제기하고 있는 주된 사람들은 바로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소금이 자기 맛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오늘의 교회도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흥미 있는 철학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엎어버리고자 하는 혁명가로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죽음과 저주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과 복된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리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그 이야기들은 삶의 새로운 방식과 교회 안에서의 제자의 도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세계로 가는 길을 알게 되면 생명의 길은 쉽게 알아집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날의 교회를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지, 또 어떻게 실패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 단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당신들의 복음이 진실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물어올 때, 부족하지만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떳떳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내 삶이 바로 복음의 결과이고, 기독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며,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돌아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교회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을 주도하고 있었던 권세가들이 평범하고 단순하며, 무식하고 무지하다고 여겼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래는 남자 열두 명뿐이었는데, 약간의 사람들이 가세를 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지위도, 돈도, 명예도, 선전수단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무지하고 무식하며, 별 볼일 없었던 소수의 그 사람들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누가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불과 200년 사이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3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기독교는 이미 너무나 강한 세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에 기독교를 공인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로마제국 전체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을까요? 이들이 로마제국을 뒤집어 놓은 것은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과거 소련의 레닌처럼 혁명을 부르짖었기 때문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교회는 세계사 전체에서 가장 생생한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사를 빼놓고는 세계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오늘의 교회는 어떠해야 하며,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가 의미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육적인 것과 마귀와 사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기독교의 놀라운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설명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려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 전체의 요약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출발점이자 가장 근본적인 것은 기독교는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지금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데오빌로여, 나는 이미 당신이 궁금해 하는 예수에 관해 글을 써 보냈습니다. 이제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의 이 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독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에 적용되어야 할 철학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한 인물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는 순수한 역사가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실들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초대교회에서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오늘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주제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만나서 나누게 되는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적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건강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가르침에서 시작한다면 굳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됩니다. 석가모니나 공자의 가르침으로도 얼마든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작가의 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전한 메시지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것.”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불교나 도교나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이 중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종교의 핵심은 아닙니다.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달타가 없어도 불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이지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주님의 제자들이 항상 “예수와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정치적․사회적 상황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가르쳤던 전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예수라는 분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의 장벽이나 혈통의 장벽을 모두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들’입니다. 없는 일들을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이렇게 증거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그러니까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다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의 의미와 중요성에도 동일한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와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 뿐 아니라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의 가르침, 이 둘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가난하게 태어나 목수 일을 하던 한 젊은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는 서른 살에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약 3년 후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 온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분에게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철학이나 정치적 이념에 불과하다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철학파와 가르침과 이론들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이것을 믿고 저 사람은 저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대면하고 있는 것은 사실들(facts)입니다. 그 사실들은 예수라는 인물, 그분이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입니다.
본문의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여기에 ‘시작하다’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모든 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누가는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 데오빌로에게 말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스물네 장에 걸쳐서 전개됩니다. 여기서 누가는 모든 것을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누가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 아십니까? 예수님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인물의 중요성을 깨닫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기 시작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누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독교가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가르치셨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장사지낸바 되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세상을 뒤엎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뒤엎고 있는 놀라운 교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것에 대한 아주 확실한 증거들을 많이 제시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데오빌로여, 당신께서는 이 사실들을 믿으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빼고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알고 싶다면 성경을 펼치십시오.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나아가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을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기에 저와 여러분을 위한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인류의 유일한 희망일까요?
누가는 누가복음 마지막 장인 24장 4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고, 무엇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본문에서는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할 것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의 대미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와 그것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회개 운동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 운동의 특징은 단순히 죄를 지적함으로써 참회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최종 목적은 인간이 ‘모든 죄와 어둠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다른 이름이 아닌 ‘그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에 있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주신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악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본성적으로 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그분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며, 하나님에게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을 갈아엎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개선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말한 기독교에 대한 전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본문 1절의 핵심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끝내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메시지는 단순히 예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정치가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요 창조주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일과 그 구속을 아들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일들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초대교회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권세가 구체화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어느 날 오후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자리를 펴고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줌으로써 그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적․도덕적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며, 그 권세를 주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주신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마지막 절에 따르면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복음만이 한 영혼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이 땅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시 복음 앞에 서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아 세상 속에서 참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