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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코 잠잠할 수 없는 이유?
사도행전 4:13-22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나머지 부분도 분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에 의심이 가면 나머지 부분도 전부 의심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이며,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복잡한 것들을 덧붙여서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교회의 시작도 간단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들의 전통과 관점과 철학을 갖다 붙이는 바람에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며, 위기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맨 처음 사도들이 설교했던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명제입니다. 유다는 유다서에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믿음의 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그때마다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단번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이 전해야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일차적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기의 시대는 항상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만 코로나로 인해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마저 세속화되어서 세상이 공허하고 혼돈의 상태에 빠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소수의 그리스도들은 작은 모임을 통해 어지러운 난국을 이겨내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추구했던 방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그들은 교회가 회복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심대한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역사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취했던 그 방식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너무 똑똑해서 그런지 코로나 이후 시대의 교회는 새롭게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이 없는 세속 중심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끔찍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개혁의 근거는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그리고 초대 교회와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본문 17절에 완벽하게 요약되어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 와서 서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을 먹고 고분고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다음날 공회 앞에 세웠을 때 저들이 겁을 먹고 자신들의 말에 순전히 순종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아주 위협적으로 말을 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런데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솔로몬 행각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오순절에 군중들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도 들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에 불러다가 위압적으로 압력을 가하면 겁을 먹고 기세가 꺾여서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당당한 모습에 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본래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자신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권위를 가지고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습에 놀랐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 앞에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서는 어떤 트집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재판정으로부터 내 보낸 후에 자기들끼리 이렇게 결의를 합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아주 엄하게 명령을 합니다. 그것이 본문 18절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본문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은 베드로가 행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것은 기적을 일으키게 한 예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더 이상 군중들 사이에 확산되는 것을 극구 막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결코 권력자들의 그와 같은 위협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권위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전적으로 예수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 말고는 전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이야기했고, 그가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은 설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기독교가 세상을 향해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참 메시지가 전해질 때 세상은 당황합니다. 세상은 항상 참 메시지를 미워했으며, 그 메시지가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갖은 애를 써왔습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 홍수로 심판을 당하기 전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임명을 받은 노아를 세상이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롯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구약의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에는 항상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고, 참 선지자들은 드물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늘 칭송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죄악의 실태를 묵인하고 참된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 것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허망한 메시지이지만 세상은 그것을 좋아합니다. 거짓 메시지는 사람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재난에 대한 염려를 유보해 주기 때문에 항상 환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 선지자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지하 감옥에 던져졌고, 미움과 박해를 받았으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예레미야를 세상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십시오. 세상은 그를 진흙 구덩이에 가두고, 나중에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세상이 사도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보십시오. 로마 경기장과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사자의 밥으로 던져진 순교자들의 이야기,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취급해 왔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교회의 위기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교회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환영하면서 순전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이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기 본래의 참된 언어로 말할 때 세상은 언제나 십자가가 ‘거치는 것’임을 감지하고 거부합니다. 따라서 스스로 기독교라고 내세우는 메시지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진짜 기독교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듣든 듣지 않든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를 소유하고 변화시키며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옛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야심에 차서 서로 질투했고,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기를 바랐습니다. 때문에 사소한 일을 놓고 서로 다투며 싸웠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얼마나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는지를 보십시오. 실제로 성경은 제자들의 비겁함과 두려움과 소심함을 한 문장에 축약해 놓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은 붙잡혀서 심문을 받을까봐 두렵고, 사형을 선고 받을까봐 무서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얼마나 비열하고 형편없는 겁쟁이들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습니다. 이들은 서슬 퍼런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앞에서 논쟁도 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실제로 성경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조차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담대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삶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과 목숨을 걸고 신앙을 고백했던 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그들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명령과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의 삶 전체를 결정지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신앙이 단순히 삶의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그 신앙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철학이나 다른 가르침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변만 맴돌도록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사이에 충돌을 불러온 핵심적인 사안과 분쟁의 원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설교하고 가르칠 것인가라는 한 가지 질문에 있었습니다. 권력자들은 서로 의논한 끝에 예수에 대한 설교를 전면 금지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최고 법정이 내린 판결이요 명령입니다. 여기에 불복종할 경우에 최고 사형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잠잠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반드시 말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들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위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첫째로,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려면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진리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권력자들이 더 이상 설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 그 메시지는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스스로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위대하고 뛰어난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아마 남은 평생을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며, 말이며, 행동을 줄기차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 경우를 생각한다면 베드로와 요한의 말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얼굴을 뵈었고, 그분의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의 얼굴을 직접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도 알고 실물로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씀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었고, 확실성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소경과 앉은뱅이와 귀먹은 자와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보지 않으려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습니다. 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교회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는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고,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의 시신을 무덤에 누인 후 돌을 굴려 입구를 막고 인봉한 후에 파수꾼을 세워놓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목격자였기 때문에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40일 동안 각기 다른 때 다른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감람산에서 120여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과 협박을 했지만 결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에서 돌아와 열흘 동안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다락방 전체가 영광과 능력과 경이와 놀라움으로 충만해졌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속에 새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현장을 보았고, 들었고,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바로 예수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철학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났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보고 들은 바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생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설혹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하게 감당하려는 결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기 때문에, 그가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분명한 사실 때문에 일관되게 나사렛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에 대해 결코 변명하거나 모호한 태도가 없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설령 이 메시지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불이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코로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회사 동료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애써 자신의 신앙을 감추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의 코로나가 참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즉 코로나가 오히려 헌신과 섬김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코로나가 이유와 핑계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 땅에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복음 앞에서 보고 들은 일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장차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들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복음의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일으킨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8절에서 그 기쁨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기쁨은 오순절에 일어난 모든 일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그들은 기쁨과 감사의 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제 불신앙은 사라졌습니다. 우울함도 사라졌습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과 의심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는 우물물이 솟아나듯이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넘쳐 났습니다.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전에 비겁함과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가득 찼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적을 행할 능력, 기도할 능력, 말할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황홀하고 기뻤던지 이 일이 자신들에게 주는 의미를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일어나 우리를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배우지 못한 갈릴리 어부 출신의 무식한 사람들이 훌륭한 연설을 하더니, 나면서부터 40년 동안 걷지를 못했던 사람을 고치며 능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이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힘이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여러분의 삶에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의 중심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해서 결국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주체입니다. 기독교는 기존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추가시키는 것도 아니고, 주일에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필요할 때만 취했다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베드로와 요한을 변화시켰듯이 사람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읽어보면, 그리고 우리 주위를 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이런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완전히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사도들이 결코 잠잠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일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들은 주님의 마음을 좀 더 닮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디로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헬라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무지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창녀와 함께 앉으셨고,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처럼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일언지하에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자신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자유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들의 실상을 보게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며, 그 죄로 말미암은 비참함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한 마디로 복음은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순절의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기 전에는 이 사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그들은 심각한 필요를 안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인간의 비참함과 불행, 온갖 죄의 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죄 아래에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보았으며, 그들의 영원한 존재가 빠져 있는 위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죄와 사탄의 먹이에 불과한 인생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무지를 보았습니다. 그 실상을 보게 되는 순간 사도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와 같은 이유만으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에게 맞서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람이 의지하는 어떤 것도 자신들을 돕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도 다 해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기대를 걸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 사람들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들을 구원할 유일한 구주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자신들처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원했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죄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능히 끌어올리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신앙의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참된 메시지를 보고, 이 메시지에 붙들려 다스림을 받게 된 사람은 그 자신이 먼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아가 그 메시지 때문이라면 기꺼이 권력자들에게 맞서 죽음까지 감수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처럼 예루살렘 권력자들에게 맞섰고,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해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논쟁을 벌였던 상대는 그들과 대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과 몇 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바로 그 권력에 맞서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권력자들에게 대항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나 이 위협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고, 베드로도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을 가장 큰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처럼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에게 대항했습니까? 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도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믿음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설령 온 세상이 조롱하고 비웃고 놀린다고 해도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도들의 말 그대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죄송하지만 그는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생각과 칭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뜻을 우선시한다면 그는 종교인일 뿐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단순히 생존하는 일이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은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없는 세상을 주어보십시오. 그저 공허하게 여길 것입니다. 싸구려 장식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참된 기독교는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심판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잠잠하면 길에 있는 돌들이 소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외면하면 주님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