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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앞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
사도행전 4:23-31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도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교회 안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 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등록하여 직분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성경은 하나도 모르면서,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이유조차 이야기하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교리와 신앙고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교리와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리나 신앙고백이 곧 기독교는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오랜 역사 속에서 받아들여 왔던 정통 신앙이 말하는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리와 신학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철학자들 가운데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탁월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신학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 있고 머리로는 그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길을 잃고 버림받은 것같이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을 알고 있어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타락하고 비도덕적인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가치들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이러한 것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보다 적극적으로 선행을 베풀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삶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착하고 선하게 산다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도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극적인 체험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상이나 뜨거운 체험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지적으로만 해결되는 일도, 선량함으로만 해결되는 일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생한 산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체험적인 신앙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뜨겁게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이나 다른 종교들에서도 이런 체험을 제공해줍니다. 따라서 체험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어떤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참된 신앙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시험하는 지극히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인생의 막다른 골목과 같은 극심한 고난과 시련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인생이 평탄하게 잘 풀리고,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큰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앙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그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는 그 신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눈앞에 닥친 상황, 시련과 역경, 곤란과 죽음,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고통스러운 일들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앙이 진정한 것인지를 검증해 주는 시금석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즉 여러분의 수중에 돈이 있고, 만사가 잘 풀릴 때는 간이라도 빼줄 듯이 곰살궂게 굴다가도 막상 곤경에 처했을 때는 슬며시 도망쳐 버리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는 진짜 친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궁극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길이 막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자기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 어떻게 반응하며 행동하느냐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혹은 섬기는 교회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산헤드린 공회원 앞에 40여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제 발로 서 있게 만든 또 다른 사람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서 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군중들이 직접 눈으로 보았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그 기적을 일으켰던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재판에 세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설교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그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출신의 어부에다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비겁한 겁쟁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높은 학문과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이들에게 적당하게 위협하고 협박을 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의 입을 막아서 누구에게도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전의 형편없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두 사람은 이스라엘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거나 겁을 먹지 않고 담대하게 되받아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무식한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하고 협박했던 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처형해 버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기적을 보았던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말을 듣지 않는다고 사도들을 처벌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국 몇 마디 위협만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말을 하면 다시 체포될 뿐 아니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엄청난 협박과 경고를 듣고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그렇게 공회에서 풀려난 후에 무엇을 했습니까?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의 금지령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성도들과 다른 사도들이 있는 교회 공동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다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일 자체가 무슨 흥미나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이 일이 어쩌다 역사의 기록에 남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스스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 공동체에 돌아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국자들이 교회를 제거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했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본문 2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하루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협박과 위협으로 점철된 불법적인 재판 과정을 겪고 난 두 사도들이 자신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교회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권력자들로부터 이후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이제 곧 자신들에게 닥쳐올 시련과 고난과 극심한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낙심하거나 위축될 수도 있었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고난과 시련 앞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을 검증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극심한 고난이나 시련을 당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어떤 반응과 행동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다 죽여 없애버리겠다는 위협과 모든 것을 끝장내 버리겠다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스데반이 순교를 당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으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좌절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사역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기도는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에서 ‘한마음’의 헬라어는 ‘하나의 열정으로’, ‘일치된 마음으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기도를 드렸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뜨겁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낯선 세상, 바로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위기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전체를 그대로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비밀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지식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리의 신앙은 올바른 신앙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생생한 산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한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심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차분하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그분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보게 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살아 계신 한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며, 본문에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허공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어떤 막연한 신을 향해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금은과 나무와 돌로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게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했고, 자신들의 종교에서 큰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섬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서 피조물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죽은 것들이었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을 위해 온갖 것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죽은 신, 생명이 없는 신, 인간의 생각을 투사해서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우상들을 향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을 걸 수 있는 지극히 인격적이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모호한 무언가에 대놓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상황을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풀려나서 자신들에게 돌아온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 바로 ‘대주재여!’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대주재’는 헬라어로 ‘절대적인 능력과 주권을 지니신 주’라는 굉장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한한 힘과 권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난과 박해의 위협 앞에 직면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아뢰고 있는 분은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대주재이십니다. 따라서 이들이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른 것은 비록 눈에 보이는 세상이 로마제국, 혹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현상 너머에서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세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과 담대함으로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의 핵심적인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에 처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처럼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나 사도들도 이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었고, 세상을 뒤엎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과 개혁의 시기마다 명백하게 드러났던 이 역동적인 메시지만이 오늘의 세계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능력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을 바로 알아 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야말로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진 거짓된 종교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종교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숱하게 그릇된 길로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종교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우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라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위기를 당했을 때 이리저리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위기의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교회를 제거하려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했습니까?
둘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습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본문은 다윗이 반역자들에게 쫓겨 다니면서 지었던 시편 2편 1절과 2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시편 2편은 다윗에게 적용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다는데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시편 2편을 위대한 구원자가 오심을 가리키는 메시아적 시편으로 여겨 왔습니다. 본문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를 보면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아무 의심과 주저함 없이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무섭게 불어닥칠 고난과 박해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정체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다윗은 ‘어찌하여’라는 흥미로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의문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공포와 놀라움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열방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분노하다’는 말은 ‘소요를 일으키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조용하지 않은 세상, 소란하기 그지없는 세상, 마구 끓어오르는 세상, 계속해서 폭발하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분노는 마치 바다가 포효하며 분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 대한 묘사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상태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묘사해 주는 표현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러한 극심한 요동과 곤경과 혼란을 보고 있으며,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광경들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방향감각을 잃은 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들의 분노를 보십시오. 매스컴을 통해 들려지는 소리들을 들어보십시오. 수치는 사라지고 죄만 날뛰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걸음 나아가 세상이 이처럼 소란스럽게 경영하는 모든 것이 ‘허사’라고 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요란하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허사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실로 무의미로 충만한 것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의미한 세상’, ‘헛되고 헛된 세상’,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을 향해 묻고 있듯이, 다윗도 자기 세상을 향해 묻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본문을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족속들이 허망하고 공허한 전략을 세우는가?” 그러니까 분노하고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정체인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여기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 즉 총독 빌라도와 헤롯 왕,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본래 원수와 같은 관계로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은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보십시오. 세상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무시하고 반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합세하여’ 대적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합세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문제는 단순히 게으르거나 나태한데 있지 않습니다. 인류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정해진 목적을 놓고, 합세하여 조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헤롯 왕과 본디오 빌라도와 산헤드린 권력자들이 친구가 되어 한 패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세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에게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주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모였습니다. 이러한 악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일에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이런 세력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눈이 아주 먼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단순히 세상의 실상만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인간들이었지만 그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킨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의 의미를 알고 계셨고,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기도하는 중에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혹독한 시련과 핍박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떠올리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그가 단지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을 때에 오히려 신앙고백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주를 향한 사랑과 믿음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시련과 고난이 닥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시련과 고난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인내로 넉넉하게 이겨내야 합니다. 삶에서의 시련과 고난이 우리의 믿음을 나약하게 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되고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들을 맺는 고귀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극심한 고난과 핍박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했습니까?
셋째로, 그들은 위협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본문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엄청난 협박과 경고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권력자들은 이제 막 출발한 어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줄 수 있는 충분한 힘과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과 같은 일을 제자들에게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베드로와 요한처럼 당국자들로부터 그와 같은 협박과 경고를 받은 후에 풀려났다고 한다면, 저는 담대함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였습니다. 참으로 기도의 내용이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벌써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고 나왔습니다. 지금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면 또 끌려 들어가서 매를 맞을 것입니다. 어쩌면 목숨까지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대책회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 우리가 당하는 핍박을 돌아보시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소멸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사건 자체에 변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주어진 그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하던 장소를 진동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때 겁을 먹고 움츠리지 말도록 요청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 속에 보여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극심한 핍박으로 교회 공동체를 와해시키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 됨의 표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처럼 영광으로 나아가는 멋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