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실재들
사도행전 5:1-11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 공동체로 복귀하는 모습을 아주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먼저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것을 명령하셨다는 사실로 사도행전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남겨두신 공동체에 모두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명령을 지키며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베드로와 요한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공회에서 심문을 받은 후 협박과 위협 속에서 풀려나게 되자 곧바로 교회 공동체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공동체로 복귀하는 모습은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모든 신앙생활의 구심점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곳으로 생명과 능력, 그리고 힘이 솟아나는 곳입니다.
한편,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들의 모든 삶과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그 폭도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변했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철저하고도 깊은 내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모이거나, 단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즐겁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열망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2장 42절 이하에서와 4장 32절 이하에서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힘써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가서 믿는 제자들의 수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평화스러움 속에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위협과 핍박을 헤치면서 힘 있게 자라 가는 모습입니다.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거친 걸림돌에도 오히려 교회 공동체를 더욱 단합시키고 성장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부터 37절은 한마음 한 뜻이 된 교회 공동체에 일어났던 기적과 같은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4장 34절에 보면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았다’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이것이 일시적으로 모두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한 번에 몽땅 팔았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헌신한 사람들이 ‘때로’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사도들에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성도들의 기본자세는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언제나 나누어 쓰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4장 36절과 37절에 보면 이러한 나눔에 모범을 보였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족 바나바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인데, 사도들과 성도들이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헬라식 이름인데,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바나바는 자신의 본래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바나바의 교회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됩니다. 실상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었고, 교회의 집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도들과 교인들로부터 ‘바나바’라는 좋은 별명을 얻었습니다. 초대 교회사에서 이처럼 평신도에게 신앙과 삶을 나타내는 별명을 지어준 경우는 바나바 외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멋진 성도요, 행복한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5장에 들어서면서 돌연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사건과 마주치게 됩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교회였습니다.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강요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쁘게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최소한 5장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예루살렘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어느 단체도 드러내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슬쩍 묻어서 그냥 지나가고 싶은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누가는 이 사실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이 사건을 반드시 기록해야만 했던 역사적 교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은혜롭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영적 실재들을 보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인 단체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정치, 문화, 과학, 예술 단체 등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취향에 따라 단체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그런 식의 단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어쩌다가 우연히 같은 종교를 갖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하나의 단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자신의 뜻이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하나의 단체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써 그 이상의 것이 있고,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을 무시한 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교회에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교회가 모일 때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임합니다. 교회에는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놀랍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40년 동안 걷지를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기도했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다른 단체와 구별하는 유일무이한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교회는 인간적인 단체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룩한 영적 실재가 있습니다. 거룩한 힘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이 실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사실을 진정으로 붙든다면 여러분의 경험과 삶 전체가 바뀔 것입니다. 바뀌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실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잊어버린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풍요로운 물질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과학의 발전에 따라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과 측정할 수 있는 것에 완전히 매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것,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발견한 것, 자기가 인정한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현재 이 세상 속에 있는 것만 실재로 여기고, 나머지는 모두 상상의 것으로 취급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머리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공상’이라고 조롱하며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이지 않는 실재가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본문에서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현 세대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환난과 시련은 그야말로 수치이며, 죽음은 패망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대가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은 실재합니다. 보이는 세계는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야말로 진짜 세계이며 위대한 실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혼동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없을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기록하고 잇는 것도 바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보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막 시작하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게 만드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영적 불순물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교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할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영적 실재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마귀와 사탄의 세력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전체가 말해 주고 있는 메시지는 인격적인 한 존재인 마귀와 사탄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사탄은 영적인 영역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하나님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사탄도 믿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 가운데도 마귀와 사탄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마귀 등의 교리는 신화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현대와 같이 발달된 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마귀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성을 가르쳐주는 것 못지않게 마귀와 사탄의 실재와 인격성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이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왜 세상에 혼란과 고통이 있습니까? 왜 정욕과 탐욕과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창세기 3장 뒷부분인 마귀를 다루는 부분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피조물보다 간교했던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 시험했고, 그들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하게 대비되는 점을 한 가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창조가 일어났던 에덴동산에 마귀가 들어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창조로 생겨난 교회에도 마귀가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태초에도 남자와 여자가 휘말렸는데, 초대교회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휘말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마귀가 일으키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마귀가 저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혼미하게 한다’는 말은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눈을 멀게 해서 그리스도와 그 영광의 복음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사탄과 마귀가 사람들의 눈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이 아닙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된 베드로는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미혹해서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보이지 않는 영역의 실재성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권세와 힘에 둘려 싸여 있으며,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바로 이 힘이 오늘날 세상에서 악을 조직하여 세상을 이토록 악마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힘에 조종당하는 피해자요 노예요 밥일 뿐입니다. 마귀와 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서 지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다스리고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이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슬프게도 교회가 이렇게 된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탄은 교회의 일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속에 들어가 악마적인 일을 행함으로써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사탄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실상은 이 세력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탄,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천국과 지옥의 거대한 영적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와 사탄이 언제나 나쁜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좋은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때로 가장 좋은 일의 가장 큰 원수가 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보다 도덕적인 사람들이 더 복음을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는 속이는 세리와 죄인들이 더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 전투는 오늘 말씀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령과 사탄 모두 이 세상에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분과 저에게도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사탄 모두 우리를 차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타락한 존재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증오하면서 자기가 받을 최종적인 형벌의 자리에 온 우주를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복음을 거부하게 하는 주체는 그 사람의 똑똑한 두뇌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서 믿지 못하게 만드는 사탄과 마귀입니다.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도 여러분의 이성과 지성이 아니라 마귀와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그렇게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보다 세상의 허영이나 행복이나 부와 명예를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내용을 보십시오. 모두가 이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물질을 가지고 예수님을 미혹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아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과 정욕을 지니고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영적 세계의 실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역사의 마지막 날,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에 지금까지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하며 망쳐 놓았던 마귀와 사탄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사탄과 마귀는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에 끌고 가기 위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서 사탄과 마귀의 사냥놀음에 걸려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서 누가가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또 다른 실재가 무엇입니까?
둘째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아나니아야 …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의 물건을 팔아서 공동 재원에 내놓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물건을 팔아서 내놓았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느껴지는 거룩한 부르심에 순종해서 자기 물건을 팔아 교회에 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들의 재산을 팔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그것을 팔기 전이나 판 후나 자신들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소유를 판 후에도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 부부가 일부를 떼어놓았다고 해서 잘못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 부부의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들 부부의 행동을 한 마디로 ‘거짓’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소유를 판 다음에 고의적으로 교회를 속였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었고, 위선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본문을 보십시오. 이 일을 어디에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네 머리’입니까? 아닙니다. ‘네 마음’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교회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문제의 실재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지적인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과 정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인간의 머리보다 깊고 강하고 심원한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요소들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일으켜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지배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천사장이었던 사탄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음이 높아진 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질투입니다. 사탄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갈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이 인간과 관련하여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했고, 골리앗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왕국을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한 번 보십시오. 성경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한 이후 그것을 감추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지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까? 지식이 부족해서였습니까?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적응하는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그 이유를 깨달은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서 고뇌하는 가운데 부르짖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처럼 통찰력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도 그렇게 무서운 짓을 범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며, 다윗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문제를 일으킨 것은 머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이요, 영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세상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에는 단순히 느낌과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도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중심부가 있습니다. 그 중심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며, 그 중심부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지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체계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라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음주운전을 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음주운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는 자기 지식을 짓밟고 거스르면서까지 뻔히 아는 잘못을 저지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왜곡된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역시 똑같습니다.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인간은 지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아는 사람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들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교수라고 해서 모든 미덕의 귀감이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머리가 좋은 사람도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는 짓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정욕과 욕망이 그의 지성만큼이나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인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아주 무서운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부패한 것, 악하고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의 마음이 그와 같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믿지 못할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의 거짓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놀라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즉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런 짓을 하게 만들었는가? 당신은 자신이 이런 수준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가? 어떻게 이런 악이 내 속에 있을까를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마음은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속임수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아주 착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이런 치명적인 착각이 범죄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이들은 교회와 세상에서 최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계획이야말로 훌륭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기부했다는 공로도 인정받고, 우리 몫도 챙겨서 기분 좋게 누리며 사는 거야. 그러면 교회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지.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는 거라고! 희생한 보람은 보람대로 누리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갈채도 받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들도 챙기는 거지.”
우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도 가고 싶고,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싶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양다리를 한껏 벌려 두 길에 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똑똑해서 양쪽을 다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과 밖에 동시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고 있을 뿐 아니라 남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이처럼 거짓으로 칭찬해 주고, 거짓으로 겉모습을 꾸미는 태도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런 비극과 어리석은 마음의 절정은 하나님까지 속일 수 있다고 확신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죄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법이 우리를 이끌어가지 못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구약성경에서 여리고성이 멸망한 후에 돈과 옷을 훔쳤던 아간의 사건과 짝을 이룬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즉 아간의 죄와 아나니아의 죄는 구약과 신약 교회가 각각 시작되는 시점에서 저질러진 것으로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속임과 거짓된 행위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에 찬물을 끼얹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침없는 전진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아간의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본문에서도 아나니아의 사건 이후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의 원문에서는 ‘아나니아’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평범한 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열한 절에 걸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성결’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약교회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가장 성결하고 순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과 위선은 교회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뒤따랐고, 누가는 이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삽비라’라는 이름은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의 뜻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할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이렇게 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교회가 더욱 발전하며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교회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불순물들을 제거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말고, 항상 깨어서 순결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