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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라!
사도행전 5:17-32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권력자들에 의한 갖은 위협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들어서면서 이처럼 모범적인 교회 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 펼쳐집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사건은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숨기고 싶은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모두에게 불편했던 이 사건이 기록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이 사건을 정직하게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와 분열의 징조를 보이고 있던 교회에 거룩성과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어떤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서 서로의 마음이 흩어지거나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자신을 높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저 교인들이 착하다고 칭찬을 듣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단순히 호기심에 이끌려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개인의 만족을 얻고자 했던 ‘그 나머지’ 사람들인 사이비 신자들은 다 떠나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참 신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누가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 어떻게 역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표적과 놀라운 기적들, 그리고 회개하고 주를 믿는 남녀 성도들이 날마다 늘어나면서 이전에 아나니아의 사건으로 불편했던 모든 장애물들을 말끔히 씻어냅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도 실현되는 거룩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에게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알고 있던 바대로 스스로 나사렛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도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 그러니까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무시했던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었던 사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했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더욱 놀랄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교회가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더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급작스런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예루살렘 전 지역에 알려집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사도들에 의해 나타난 놀라운 사건들이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 주변 지역만 아니라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아픈 친구와 친척들을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늘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대표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이 이번에는 아예 예수 소요를 끝장내려는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누가는 본문에서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식으로 반응한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고 들은 백성들이 두려움을 크게 느낀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더니, 세 시간 후에 그의 아내도 똑같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목격하게 되면 겁을 먹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던 백성들이 사도들을 ‘칭송’했던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심판을 받아서 갑자기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어서 자기들 눈앞에서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놀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은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비록 교회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도들에게 나름의 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일을 보고서도 분노로 반응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종교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중심이 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마음이 시기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사회에서 참으로 대단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었고, 사두개인이었고, 이스라엘 최고 법정기구인 산헤드린의 주도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과 백성들이 항상 자신들의 말을 듣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옷을 입고 거만한 자세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금방 없어질 것만 같았던 예루살렘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심지어 수많은 군중들이 배운 것이 없는 사도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따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사도들에 의해서 많은 표적과 기적들이 일어나면서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무대의 중앙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에서 산헤드린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에 고질적인 시기심이 일어났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기적들은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기득권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심대하게 상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가 사두개파를 강조하고 있는 부분을 보십시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본문에서 ‘사두개인’을 ‘대제사장과 함께 있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측근에 있었던 귀족들이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유대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당시 헤롯왕이나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기득권을 다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의 진짜 문제는 초자연적인 일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따위는 더더구나 일어날 수 없다고 늘 가르쳐 왔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종교 유물론자들’이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보이는 물질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의식적으로는 성경을 읽고, 절기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 일들이 나사렛 예수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사도들이 지금 자기들 앞에 서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나사렛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예수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자기들의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묻혔던 나사렛 예수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부인했던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만왕의 왕으로서 능력을 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부인해 왔던 부활이 실제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에게 더 큰 낭패와 굴욕을 안겨 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에 보초까지 세워서 굳게 지키게 했던 그날 밤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풀어준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부인해 왔던 천사의 존재도 실제로 완벽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활은 있을 수 없으며 천사 따위도 없다고 늘 말해 왔고, 그 말을 여러분도 믿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건들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저의 입장은 아주 곤란해질 것입니다. 아마도 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심각하게 흔들리면서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침에 거창하게 의식을 갖추어서 “죄수들을 끌어내라”라고 명령했는데, 감옥에 갔던 경비원들이 돌아와서 “옥도 그대로 있고, 옥문도 닫혀 있고, 보초들도 그대로 있는데 죄수들은 사라졌습니다”라고 보고를 한다면 그야말로 아주 난처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중심이 된 종교지도자들의 반응 속에 담긴 미움과 분노가 보이십니까? 그들의 얼굴에 “시기가 가득한” 것이 보이십니까? 지금 그들은 진실에 입각하거나 바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기에 의해서 박해를 일으켰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득하여’라는 말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이 넘칠 정도로 가득 채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끓어오르는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상황은 생각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오직 사도들을 박해해서 그들의 모임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릴 생각으로만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고에는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1세기에 살았던 자칭 똑똑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살았던 사람들도 시대를 막론하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유 없이 하나님과 교회를 거부합니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2천년 전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합리적인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본성에 따라 무조건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크나큰 연민과 사랑의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진 자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자들을 온전하게 해 주었고, 눈먼 자와 저는 자와 귀먹은 자들을 고쳐 주었으며, 죽은 자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해 주기 위해, 그리고 마귀의 속박에서 구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조롱한 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러한 불신자들의 맹목적인 시기와 거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오늘의 현대인들도 참으로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거부합니다.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수 있으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해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줄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구원의 복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갇힌 감옥은 ‘공동감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감옥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공동감옥은 가장 열악한 곳인데, 극악하고 더러운 죄를 지은 자들과 중죄인들이 수감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들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들은 명백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주정뱅이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닙니다. 더구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위험한 시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극악한 범죄자들을 모아 두는 가장 열악한 공동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무력을 동원해서 사도들을 침묵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완전히 해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에서는 그들이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드러난 이유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그토록 시기가 가득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본문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리고 28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사도들을 향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사도들이 ‘이 생명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중에 천사가 감옥의 문을 열고, 사도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 사실은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바로 ‘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백성들에게 다 말하라고 했던 ‘이 생명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생명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과 그의 부활입니다.
본문 30절과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고 곤경에 처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산헤드린에서 권력자들을 향해서 똑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권력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세상에 와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거부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의 이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 전체의 기초를 이루는 진술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수많은 뛰어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우리 가운데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인류의 범죄와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심각한 곤경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는 헤어 나올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없는 인자와 자비로 세상의 기초를 놓기도 전에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시행해 오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옛적에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을 고대하며, 하나님이 일으키실 한 구원자를 고대해 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세상의 관원들은 그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말하지 않고,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정해진 선을 넘은 자로서 ‘저주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참으로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저주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 끔직한 판결을 피해 보려고 애를 쓰는 빌라도를 향해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오만하게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없이 했다고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 예수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높이 올리셔서 오른쪽에 앉히셔서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들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불과 몇 주만에 일어난 사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속으로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그들이 져야 합니다. 그들도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책임을 자신과 후손들이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오히려 사도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을 자신들에게 떠넘기려 한다고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예수를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대체 왜 자기들을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많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유일하고도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화와 지식이 우리의 온갖 불행을 해결해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와 제도가 인생에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과거의 잘못을 줄기차게 반복해 왔습니다. 인류는 똑같은 과거의 오류와 헛된 희망에 매달려 왔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해결책으로 믿고 있는 그 일들을 다 시도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잘못된 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 분명히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해 보십시오. 그런 것으로는 참된 평강과 위로를 얻지 못하며 궁극적인 만족과 쉼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세상은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과 실망과 좌절만 가득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일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자 원천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또한 자신들을 사로잡아 노예와 종으로 부리고 있는 마귀와 세상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의 결과 왜곡된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를 보십시오. 우리의 본성은 새 집에 산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집을 돼지우리로 만들기 쉽습니다. 학문과 지식이 영혼의 부패를 막을 수 없습니다. 재산의 부요함이 새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마음입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를 알고, 그를 우리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스스로 중죄인의 자리, 악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빈정거리고 비웃었으며, 굴욕과 모욕을 주었습니다.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저주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꾀로 그를 끝장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한 능력으로 그를 일으켜 높이셨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모든 백성들에게 ‘다 말하라’고 한 ‘이 생명의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생명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교회 밖에 있는 세상만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모든 것들이 모호해진 시대입니다. 더구나 똑똑한 현대인들은 진리의 말씀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에 말씀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비록 과거에는 진리였을지 몰라도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시대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시대에 어울리는 메시지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맞게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도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결국 이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권위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끝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심대한 어려움은 한 마디로 ‘권위’의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한 번도 제 발로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바라보며 권위 있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 그 사람은 걸었고, 뛰었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바로 사도들이 선포한 메시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인간이 만들거나 찾아낸 어떤 이론이 나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의 끊임없는 사고와 명상의 결과물도 아니고, 철학자들이 오랜 사고를 통해 얻어낸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한다’든지, ‘메시지를 찾고자 애쓴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진리를 추구’하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천사가 베드로에게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한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추구하고 탐색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1장 1절에서 이렇게 증언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인간들의 탐구나 사색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복음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은 수많은 진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신 바로 ‘그 진리’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고,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지적했듯이 그들이나 다른 사도들이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이런 자들이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어내서 전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이처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똑바로 서서 당당하고 확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그의 모든 가르침을 들었고, 일어난 일들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셨고, 열방을 향한 선교의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예수님이 말하라고 하신 바를 정확히 반복한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교인들에게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사도들이 전했던 그 복음의 메시지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수도 없습니다. 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1세기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지였듯이 동일하게 다른 모든 시대에 사람들도 구원한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생겨났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메시지는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전해야 할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인간의 사상은 시대에 따라 유행을 타는 특징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유형의 가르침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의 메시지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메시지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충분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사상이 아닌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는 영원히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결코 가변적인 시대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천사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천사는 ‘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말하고 있는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이’ 생명이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사도들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야말로 저와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이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 기독교가 전하는 말씀은 결코 모호한 것이 아니며, 단순히 철학적인 명상이나 시적 감정의 발로도 아닙니다. 복음은 명확히 정의될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명확하게 정의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을 두려워해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단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구원의 말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려져야 합니다. 무엇을 빼지도 말아야 하지만 더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있어야 할 모든 말씀을 처음 사도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 생명의 말씀’만 있으면 됩니다. ‘이 생명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믿고 있습니까? 이 생명의 말씀으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부디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알고, 믿으며, ‘이 생명의 말씀’으로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이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다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