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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 5:29-32
우리는 사람들이 왜 여전히 복음을 반대하며, 그토록 놀라운 구원의 제안을 거부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빵이나 돈이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혼 구원은 모든 인간들에게 존재의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칭 똑똑한 오늘의 현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님 당시에 종교유물론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도, 내세도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단언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정말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고, 사람이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예수를 믿지 마십시오. 정말입니다.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고 존재하지 않는데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구주’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우리의 구주이십니까? 그것은 ‘장차 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장차 있을 무서운 진노에서 벗어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한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유일한 구원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구주로 믿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우리에게는 예수님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육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살다가 죽어 없어지면 됩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헛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모든 인생들은 죽음 이후에 두 곳 가운데 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입니다. 이 두 곳 외에 다른 곳은 없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의 삶 너머에 성경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음을 믿고 바라보며 기대합니다.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있는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그 무엇이 아니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자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한 힘과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신뢰하면서 값없이 주시는 복음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은 1세기 때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을 고친 일로 인해 산헤드린 공회의 권력자들은 사도들과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그 후에 사도들에 의해 일어나는 놀라운 표적과 기적들은 권력자들로부터 두 번째 공격을 유발시켰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격분했고, 사도들이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에서 명령한 금지령과 위협을 무시하는 것에 당황했습니다. 더구나 본래 배운 것이 없었던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었던 사도들의 성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권능과 군중들로부터 받는 인기로 인해 시기가 가득해진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동을 취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산헤드린 공회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이권과 어떤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예수님이 그런 처형을 받아야 할 만큼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어서 말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사악함과 더러운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며 명령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사도들을 흉악한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와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다 모은 후에 사도들을 데려오도록 경비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옥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는데, 문을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는 굴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사도들은 성전에 서서 당당하게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며칠 전에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다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거나 가르치는 사역을 못하도록 위협하며 명령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들의 명령을 어기고 계속해서 예수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놓고 본다면 모든 권세와 권위는 분명히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권력에 저항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제일가는 책임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29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최고 법정기구였습니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가 내리는 결정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권력자들이 철저하게 무시했던 갈릴리 출신의 사도들은 오히려 자신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보십시오. 아무리 겁이 없는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비위를 거스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권위와 체면을 세워주고 적당하게 타협하는 선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날 법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권력자들 앞에서 더 당당하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자신들은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철저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 13절 이하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이후에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본문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즉 복음 전파자의 아름다운 수고로 복음이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하며 거부했습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바울은 그들이 다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려주는 수많은 전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순종’은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복음은 저와 여러분이 그저 즐겁게 듣고 넘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반드시 반응을 요구합니다. 행동을 요구하고, 분명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견해 전체를 다스리는 지배자의 자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6장 17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여기에서 ‘교훈의 본’은 원어로 ‘어떤 형태를 찍어내는 틀’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기술자가 특별한 물건을 만들고 싶어 할 만한 철이나 쇠, 또는 쇳물이 있다고 가정하십시다. 기술자가 그런 재료를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쇳물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거푸집에 부은 다음에 식혀서 거푸집 모양대로 굳힐 것입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거푸집 안으로 부어진 사람들입니다. 즉 그 거푸집의 모양과 크기와 형태를 그대로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순종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복음이 여러분을 바꾸어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기독교 신앙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경탄한다고 말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삶에 지배적인 요인이 되든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의 거푸집에 부어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거푸집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 앞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왜 순종이 필요합니까? 그 이유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본질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8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본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본질적인 성향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반역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율법을 거스려 파괴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육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진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기질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을 위반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거푸집에 맞추어지기를 거부할 때 죄는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거푸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거푸집을 깨뜨리고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을 심대하게 훼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듣기에 앞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단순히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고, 도적질도 하지 않았으며,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한 나쁜 행동을 저질렀을 때도 죄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본질은 아닙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모든 삶의 통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자신의 거푸집,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만드신 것은 그들과 친구가 되어 즐거이 교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아가 사람들과 피조물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과 법에 따라 살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거푸집을 박살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자기 힘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가르치지도 말고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회개’의 필요성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것이지만 동시에 세상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처럼 회개에 대한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의 메시지를 엄청난 모욕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1세기와 21세기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보다 회개가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일으키신 모든 선지자들은 항상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1-32).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5).
신약성경에도 같은 메시지가 나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묵시가 없었던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던 첫 메시지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첫 메시지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무리들을 향해 외쳤던 메시지도 “너희가 회개하여 …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것도 ‘회개’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렇다면 ‘회개’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회개’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repent)는 ‘다시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복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돈만 더 있으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세상의 것들을 더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은 돈과 빵으로만 만족하는 존재인가? 이 세상은 무엇이며,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편견과 충동과 정욕과 욕망에 따라 계속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말합니다. “멈추어 서서 생각하라.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그러나 ‘회개’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회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사고의 변화’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열심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만 한다고 해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을 했는데도 별다른 성과 없이 기존의 편견만 더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고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사고를 바꾸는 것입니까? 회개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사고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정확히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만 죄로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의 그릇된 행동과 편견을 합리화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신과 자신의 본질을 참되게 이해할 때 일어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산헤드린 권력자들에게 강력히 권고한 것처럼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또한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정말 끝일까요? 세상은 죽으면 끝이고,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 완전히 사라져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확신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역, 하나님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해 보고, 여러분의 사고를 바꾸십시오. 세상은 심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최후의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의 임무는 바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생각할 때에만 세상은 분별력을 되찾고 제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처럼 다시 생각해서 사고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히 정신적인 활동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한 슬픔과 애통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그렇습니다. 회개는 머리에서부터 마음에 이르기까지 전 인격과 연관된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하고, 사고를 바꾸며, 과거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슬퍼하게 된 사람이 다음으로 밟는 단계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 달려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했듯이 자신의 죄를 기꺼이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믿게 된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그 삶을 버리고 정반대의 삶을 살기로 시작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의 요청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삶, 정욕과 욕망을 토대로 세상의 길을 좇으며, 세상의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삶에서 돌이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그의 얼굴을 구하며 그를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참되고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진수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회개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완전히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악을 떠나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의 방식으로 완전히 옮겨가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메시지의 맨 앞자리에 두었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항상 우선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명령은 이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두 번이나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이유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산헤드린 권력자들 앞에서 강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복음입니다. 본문 3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이 물음에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중요한 질문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이 말해 주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인간의 죄와 무력함이라는 심각한 문제 때문에 그 모든 일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앞에서 세상이 그토록 회개를 싫어하고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모욕으로 여기는데도 회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회개가 꼭 필요할까요? 그 대답은 단지 우리의 죄만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대체 왜 세상에 위대한 구원을 보내주셨을까요? 본질상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 대체 왜 세상에 오셔서 갖은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까요? 이 구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이며, 새로운 빛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 영광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필요가 반드시 채워져야만 합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으며, 하나님을 설득할 수도 없고, 탄원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놓고 토론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형언할 길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우리를 대변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서로 대변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런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를 아는 사람,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 우리를 대표하여 탄원할 사람이 나서서 대변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그 대표는 완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변해 줄 사람은 흠도 없고, 죄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탄원하다가 시간을 다 보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본인 또한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대변해 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줄 우리의 대표는 인간이면서 죄가 없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하며, 그 앞에 설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두려움 없이 그 앞에 말씀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그 대표는 무엇보다 우리의 죄와 형벌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명백한 사실이며, 이미 저질러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적대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에 관한 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죄를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게 행동하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반드시 처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했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대변할 사람은 우리의 죄를 지고 그 형벌을 다 받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필요를 완벽하게 채우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써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참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대변자가 되실 수 있는 절대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주신 참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이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계속 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음 앞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 번째 명령은 이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내 증인이 되리라”는 위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권력자들을 향해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라고 말한 것은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항상 기억하며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증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입으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생명까지 다해서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이렇게 죽음을 불사할 만큼 복음을 신뢰하고 전하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명령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사 성도로 삼으신 것도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해도 되고 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시며,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듣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고, 우리는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허락하신 이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요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도들의 증거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삶의 최대 목표로 삼아서 그 일에 일생을 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은 자신이 참으로 복음에 순종했다는 증거를 바로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일 마음도 없고, 실제로 속이는 것도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아야 합니다. 어떻게 내놓습니까? 지금까지 섬겼던 우상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과 육신을 따라 살았던 마음에서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이켰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복음 앞에 순종했습니까?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 복음이 여러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여러분은 이 복음의 거푸집에 자신을 맞추었습니까? 그리고 이 복음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들에게 전해 왔습니까? 하나님은 이 복음을 여러분 앞에 제시하고 계시며, 이 복음을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순종은 여러분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며, 그 가르침에 맞추어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실한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입술과 삶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마음에 다시 새기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증인된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