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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뻐한 사람들
사도행전 5:33-42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복음을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반응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반대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은 언제나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신약성경은 교회나 교회의 복음 전파가 일으킨 반응을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나아가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은 척 가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좋은 결과뿐 아니라 나쁜 결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어떤 사건들을 유리하게 각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5장의 역사적 사건들을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복음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심으로써 값진 교훈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더 쉽게 배우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의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충직한 부하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몰아서 죽게 만듭니다. 그 후 아무도 모르는 완전범죄라고 생각한 다윗은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서도 아주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아주 현명하게도 다윗을 직접 걸고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래서 나단은 가난한 사람의 암양 새끼를 강탈해서 나그네를 대접한 어떤 부자의 극심한 불의를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다윗은 몹시 분노하여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우리는 놀랄 만큼 다윗과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는 그렇게 잘 지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범죄에 대해서는 최대한 너그럽게 이해를 하고 용서해 줍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자기 변명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헤드린의 사례를 통해 우리 마음의 실상을 들여다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오늘날 세상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다가 불러내서 위협과 협박을 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이들 구성원들이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그 사회의 종교계와 정치계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인물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헤드린의 말과 계획을 들으면서 성령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불신앙은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교회가 막 시작된 당시에도 복음은 오늘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거부당했습니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십시오. 우리는 그들에게서 오늘의 현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동일한 태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불신앙은 기독교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은 타락 이후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던 인간 본질의 문제입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사도들을 재판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소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을 앞에 세워놓고 심문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온 예루살렘에 너희 가르침을 퍼뜨려 너희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사도들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한 이 말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 특히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사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신성한 임무를 로마의 앞잡이 노릇과 바꾸고 살아왔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노릇이란 팔레스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에 순응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인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로마 제국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던 갈릴리 출신의 사람들로부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보십시오. 저들은 지금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로마의 권력자들의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런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마땅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그릇된 마음의 신경을 자극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들추어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이 되는데, 3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본문에서 ‘크게 노하여’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그들이 조각조각 잘려나갔다, 이를테면 그 마음이 두 조각났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갈가리 찢긴다는 것은 생각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격렬하고 무감각하며, 통렬한 분노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속이 심하게 부대껴서 내부의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고 싶은 분노가 문자 그대로 거의 폭발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재판을 하는 법정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는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분노’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광란, 그 자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이 무슨 일을 했기에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을까요? 아니, 그들이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그들은 법을 어긴 적도 없었고, 비난을 들어야 할 행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쳐준 것밖에 없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불쌍한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흔 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그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들도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그 앞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공회원들 앞에 꼿꼿이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걷고 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증거였습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체포해서 열악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 대한 기소 내용도 없고, 투옥이나 매질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는 어떤 말도 없이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이성적인 태도입니까?
그렇다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왜 그토록 크게 격분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사도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큰 분노에 사로잡혔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양심의 문제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심’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바른 삶을 인도해 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즉 자신의 행위를 양심에 비추어 보면서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합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끔찍한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빌라도에게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이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도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방식에 분명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양심이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양심이 괴로우면 언제나 쉽게 분노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들은 불쾌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었고, 그 사건을 의식 속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나사렛 예수라는 그 이름과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의 연설이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칭 성경 박사라고 자처하는 자신들 앞에서 구약성경에 대해 조금도 막힘없이 담대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자들이 대체 뭔데? 이들은 남을 가르친 적도 없고, 남에게 배운 적도 없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선생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자존심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자부심도 역시 불신앙의 일부 원인이 됩니다. 복음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그대로 폭로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고발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새로운 본성, 새로운 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오늘의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가말리엘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채찍질을 한 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맞은 ‘채찍질’은 가벼운 매가 아니라 율법에서 최고로 줄 수 있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불법으로 감금을 당하고 채찍을 맞는 등 많은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거나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데, 4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가 묻고 답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까? 오늘 교회 안에는 그렇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에 임한 재앙이었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했던 자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교회의 주된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정말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기독교의 확산과 승리가 단지 사도들의 설교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물론 그것이 첫째가는 중대한 요인이기는 했지만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제국과 당시의 세계를 흔들어놓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도들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했으며, 성경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져서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기독교는 대중집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 일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들과 대화하는 개인을 통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는 개인의 증거와 삶이라는 방식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삶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거룩한 도전과 감동을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복음 앞에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본질적으로’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단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근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사도들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세 가지의 주된 차이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보다 더 대비되는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훨씬 더 강력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은 원래 있던 것을 고치고 개선하고 칠하고 광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사도행전 5장의 이야기 표면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내적인 본질이 다르지 않는 한 이토록 상반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갈라놓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새로워진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다루시고,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불명확하고 모호하며 포괄적인 태도를 좋아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종교는 똑같이 가치가 있고, 똑같이 기여하는 바가 있으며, 똑같은 하나님께로 인도해 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너무 배타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반적인 풍토는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이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5장에 등장하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제사장이요, 바리새인이요, 사두개인이요, 종교지도자요,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쩌면 사도들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주위에 보면 이처럼 종교적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선한 삶을 살고 선한 행동을 하며,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해 버립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선을 많이 행했던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적대시했던 자들이 바로 산헤드린의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즉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별 짓는 유일한 잣대는 오직 한 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전체의 중심이자 핵심입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기독교는 결코 배타적인 종교도 아니고, 비관용적인 종교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종교든 저 종교든 믿기만 하면 다 괜찮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산의 정상은 한 곳이지만 그 정상을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고 여러 갈래이듯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과 길도 다양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인 우리를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길도 우리가 알아서 만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그 길’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입니다. 다른 이름도 없고, 다른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아주 배타적입니다. 비관용적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제 자신이 관용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 산헤드린에 잡혀갔을 때 그 앞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회에 잡혀 와서도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차선책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이 홀로 구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그렇습니다. 그가 없으면 빛도 없습니다. 불교나 유교나 다른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는 빛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빛은 오직 그분 안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보다 더 배타적인 주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산헤드린과 사도들을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도덕이라는 측면에서는 산헤드린과 사도들이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에서는 서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 번째 차이점은 예수를 믿는데서만 그치지 않고 그를 기뻐하며 자랑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본문 41절을 다시 한 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산헤드린을 빠져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말이 무시를 당하고 많은 군중들이 사도들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얼굴에 시기와 분노가 가득합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불법으로 감금을 당하고 사십에 하나 감하는 채찍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그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것을 감사하며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권력자들의 앞을 지나 당당하게 걸어 나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얼굴에 분노가 가득한 채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반면에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그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본문에서 ‘기뻐하였다’는 것은 아주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핍박을 당하고, 매를 맞고, 위협을 당하는 일을 아주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필적할 만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그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특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는 영광은 물론 치욕과 수난까지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교회에 다니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것이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들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높이며 자랑합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구타와 매질을 당하면서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들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왜 예수의 이름을 기뻐했을까요?
왜 그 이름을 위해 고난과 능욕을 받거나, 죽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생각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주되심 때문에 그 이름을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며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는 영광의 주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참 인간인 동시에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시려고 죽으신 후 지금은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을 즐겨 부르고, 그 이름과 연관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인들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들, 혹은 대통령과 연관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촌수가 멀더라도 어떤 위인과 한 집안이라는 사실만 입증할 수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그 특권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그분, 하나님이 ‘만물의 으뜸’으로 삼으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평상시에는 숨기고 있다가 주일에만 조용히 드러내지는 않습니까? 바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연관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되심으로 인해 그 이름을 기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되심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그 이름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유일한 구주로 지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재미 삼아 오신 것도 아니고, 실험 삼아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만유 위에 뛰어난 이름, 하나님 아들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몸소 지시고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모든 악에서 구원하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그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기뻐하며 침묵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을 주십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며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 사는 한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마지막 재판에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가말리엘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뜻대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집행유예 상태에 있으며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 행동을 보십시오. 본문 4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요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어쨌든 믿으면 도움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기독교에 입문을 결심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전부를 차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그 이름’을 자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들은 그 이름 때문에 고난 받는 것까지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주님과 같은 범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비웃고 박해하고 조롱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미쳤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장차 하늘에서 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은 숨질 때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여러분이 죽어서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모든 원수들을 멸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러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승자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어둠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이십니다. 승리의 날, 마지막 대환호의 날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가 오실 때 제 눈으로 그를 볼 것이며, 그를 보는 그리스도인들마다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습니다(요일 3:2). 제가 그 이름과 관계를 맺는 이유,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이유, 그 이름을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얼마나 놀라운 이름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이런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분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전부를 차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의 자발적인 종입니까? 이런 이름을 부인하시겠습니까?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인하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죽을 때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숨질 때까지 주의 이름을 의지하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이름을 땅 끝까지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