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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1-6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삶에 발생한 새로운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성경은 오늘 본문의 상황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에서 ‘그때에’라는 단어는 5장 42절의 마지막 절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강력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성전에서든지 집에서든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제자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양적 증가와 부흥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 증인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증거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전하지 않으면 듣는 자도 없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그런데 이런 고무적인 현상과 함께 교회에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먼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이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벨론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헬라 풍습이나 관습에 익숙해 있으면서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중에는 타국에서 살다가 아예 고국인 예루살렘에서 살려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절기나 다른 이유로 방문 차 왔다가 오랜 기간 체류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사람들’은 팔레스틴 본토에서 태어나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런 문화적, 언어적 차이로 인해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과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들,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런 사회적 갈등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원망했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였던 그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분열시키고 위기로 몰아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으려는 사탄의 세력은 두 가지의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하나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을 통해 사도들과 교회를 위협하고 핍박함으로써 교회를 멸절시키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위선과 거짓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어서 무너뜨리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또 다른 방법을 시도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불평을 통하여 교회를 공격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헬라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까?
본문에 드러난 문제는 ‘구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이나 집을 팔아서 헌금을 했고, 그것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본문에서 ‘매일의 구제’는 초대교회 당시에 매일 행해지던 식량 배급이나 다른 여타 구제를 말합니다. 특히 생계유지가 힘든 과부들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과부들은 재산의 상속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활동도 없었기 때문에 고아와 함께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에 따라 과부들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의 그와 같은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서 과부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서와 4장 32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온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였지, 결코 차별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만을 참지 못하고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적 텃세에 휘둘려 자신들이 현저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에는 ‘원망’이 생겼고, 그것이 교회의 존립을 위협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사탄의 시험을 교회에 불러들이는 신호음과 같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교회 안에서의 시빗거리가 되고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장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주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뭇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도록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위기를 교회와 사도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확실한 자질과 소양을 갖춘 사람,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뽑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사람이 뽑혔고, 사도들은 그들을 따로 세워서 ‘구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관심사는 사도들이 한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한 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임명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교회 안에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과부들이나 다른 고통 받는 교인들의 필요를 간단하게 채워줄 수 있었지만, 교인들의 수가 늘면서 그 일이 점차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 가운데는 사도들이 이 일에 시간을 전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의견이 하나님과 자신들에게 합당하지 못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에서 오늘 우리의 시대에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차적인 임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의 사역에서 우선순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잡으라!”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선순위가 아니라 그것이 결코 중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닥친 바쁜 일부터 먼저 하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일들이 뒤엉켜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늘 우선순위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시대의 진짜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까? 이 물음은 상당한 논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를 상당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 상황을 맞이하면서 사람들 가운데는 정통적인 기독교는 이제 생명을 다 했고, 기독교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음 설교를 듣는 일과 공적 예배에 대한 정통적인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주된 임무가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구제와 봉사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오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의 첫 두 구절에서 교회가 초창기부터 이 문제에 부닥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정체성에 일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만약 그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교회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지혜를 보게 됩니다. 사도들은 그때 다수의 이야기를 듣고 영영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옹호하고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일이 기독교의 메시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와 같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이런 일은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빈민구제나 복지도 정치인들과 국가가 생각해 내기도 전에 교회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힘들고 약한 자들을 향한 사랑과 구제를 세상보다 항상 앞서서 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사역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교회가 구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맞지만,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차적인 일로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사도들은 본문 4절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해야 하는 많은 사역들 가운데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들은 기도를 말씀 사역보다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왜 기도를 우순순위에 두었던 것입니까?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언제나 정확해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 참되지 않을 때 그 밖의 것들은 전부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정통신앙에 서 있어야 하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가짜를 분별할 줄 모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통신앙은 아주 중요한 본질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쓰리라.” 그렇습니다. 기도로 복음을 에워싸지 않을 때 복음은 참되고 적절하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기도로 우리의 신앙을 받쳐주지 않을 때 우리는 생명을 잃어버린 관념적인 종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기도의 중대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왜 지속적으로 기도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앞장에서 이미 그 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어렵고, 사람들이 방황할 때 참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은 언제나 기도였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이 제시했던 방법을 따라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들은 무능하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겠지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사도들을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지식도, 지각도, 타고난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서 최대한 발휘했다 해도 별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오순절 날 넘치도록 충만하게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을 때에도 건물이 진동하면서 비슷한 성령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그토록 성령으로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기도를 꼭 필요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도에 의존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면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가르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일을 계속하면 목숨이 위태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풀려난 그들이 동료들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보고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언제나 기도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기도가 지극히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한번 받으면 그만인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계속 성령님과 교제해야 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훈련된 웅변가도 아니었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같은 뛰어난 수사가도 아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말한 그대로 배운 것이 없는 소박한 어부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 앞에 당면한 문제를 보았고, 자신들이 무력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능을 얻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들이 기도에 힘썼던 두 번째 이유는,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쪽에는 복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소통의 문제입니다. 1세기나 지금의 21세기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똑같이 어렵습니다.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와 방법들을 현대 시대에 맞게 수정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다 헛된 짓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본질을 부정하는 짓입니다. 사도들은 전도와 인간 사이에 소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과 인간 사이에서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있으며, 하나님 다음으로 능력 있는 어둠의 영적 세력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새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들 이런 권세들까지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마귀의 능력에 맞서 싸울 신적인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마귀와 싸울 때에는 지적인 영역의 똑똑함이든, 감정이나 의지적인 영역의 똑똑함이든, 인간의 똑똑함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이 문제의 배후에 있는 무서운 권세와 싸우고 있을 뿐 아니라, 악한 세력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간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타락하고 죄를 지은 인간의 실상을 에베소서 4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1세기의 이방 세계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는 이 말씀은 2022년 6월 12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습니까? 다른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바울이 말한 이런 존재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바로 그 마음이 어두워진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어떤 논증이나 증명으로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설득으로는 결코 믿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인간은 스스로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성령님뿐이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 외에 죄를 입증할 사람이나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에 관해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줄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의 실상을 보게 하고,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빛을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기도에 힘썼던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타락한 인간의 원래 상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위대한 구원의 본질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구원은 단순한 도움이나 위로나 행복이나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중생입니다. 우리에게는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그 유명한 대화를 나누시면서 친히 중생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요한복음 3장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며, 다른 모든 종교들과의 차이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어떤 도움이나 구제가 아닙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어떤 결단을 내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신의 성품을 심으시고, 우리 존재 자체에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와 기질을 넣어주십니다.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쓰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충만함을 얻으려면 오직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고, 기도에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머리와 가슴과 존재 전체를 활짝 열어 놓고서 나를 채우시며 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해야 하는 많은 사역들 가운데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는, 말씀 사역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한번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교회는 어려운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돌보고 구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하는 사역의 첫 번째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교회가 구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맞지만,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밀어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도들은 교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 우리는 오로지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그렇다면 왜 말씀을 전하는 복음 전파가 교회의 첫 번째 임무로 삼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위대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권능을 주시며 가서 가르치고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도들을 부르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몇 차례나 사도들에게 설교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베드로와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거기에 속한 과부들, 그리고 공동체 전체를 향해서도 자신들은 설교를 멈출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첫 번째 임무로 삼았던 둘째 이유는, 이 메시지만이 모든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먹고 입는 것, 돈과 사람의 관심을 근본적인 필요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 쾌락과 소유에 쏠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산 상속 문제를 가지고 왔던 딱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면서 다루신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4-15).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유혹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떡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 영악합니다. 죽음에 대비해서 보험도 들어 놓고, 노후를 위한 대비책까지 세워 놓습니다. 그러면서도 멈추어 서서 곧 직면하게 될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피상성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항상 겉치레에만 관심을 둘 뿐, 그 실상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말하는 이 ‘말씀’, 이 복음만이 인간이 겪는 곤경의 진짜 근원과 인류의 근본적인 필요를 파헤칩니다. 오직 이 말씀만이 우리의 인생관 전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전쟁이 일어납니까? 야고보가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쟁이 우리 안의 ‘싸우는 정욕’ 때문에 생긴다고 말합니다. 전쟁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궁극적으로는 돈과 음식과 옷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소유를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짓밟고 올라서서 환호하고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류의 내력이자 우리가 자랑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구제’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에 놓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지금 세상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문제, 내 고난, 내 아픔, 내 작은 불행, 온통 내 이야기만 합니다. 인간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끼어드실 자리가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중심에 놓는 태도는 사도들의 교회에도 아주 미묘한 유혹거리가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헬라파 과부들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았고, 입을 것도 적당하지 않았으며, 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무엇보다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가 시급하니까 이것부터 먼저 해결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그 일에 전적으로 시간을 투자했다면 복음은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온통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날, 먹는 것이 우리를 전혀 도와줄 수 없는 날이 우리 모두의 인생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에게는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육신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어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곧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시간에는 끝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오직 복음의 메시지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 심판은 영원을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두 번째 기회는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장차 어떤 영원한 존재로 살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극심한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의 생활형편은 100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인간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숭고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혼란과 쇠퇴만 이어집니다. 도둑질, 강도질, 성적 타락, 마약과 살인! 사람들은 위대하고 신성한 것을 자랑하는 대신 조롱합니다. 극심한 타락과 방황이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아모스 선지자가 부르짖었듯이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말씀을 듣지 못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재앙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고, 일말의 희망조차 찾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보다, 옷이나 집이 없어서 죽어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결국 인간의 가장 큰 필요이자 최고의 필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행위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길잡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영원한 세계에 대해 나의 바른 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우선순위가 올바릅니까?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앞자리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와 말씀의 자리에로 돌아가지 않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이 우선순위에 두지 않으면 교회도 끝장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붙잡았던 이 우선순위를 저와 여러분도 꼭 붙잡고, 주님 앞에서 충성된 제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